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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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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38

posted Oct 1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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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의 마지막 추장이었던 퀼이 죽고 나자, 그의 곁에서 온갖 길흉을 점쳐주던 늙은 당골은 무엇에게 홀렸는지 하나 남은 피붙이인 손녀만을 데리고 초원의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졌지라. 헌디 전해진 얘기로는 나린(Naryn)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분지 한가운데에서 텡그리를 향해 제를 지낸 후, 그 제물로 손녀의 목을 치려다가, 뜻밖의 모습을 본 사냥꾼에게 피살되었다고 그라요. 할매 손에 죽을 뻔하다 살아난 손녀는 반 미친 상태로 초원을 떠돌았는디, 나중에는 텡그리를 맞아들인 후에 영검이 남달랐다 안 허요? 그래서 힘깨나 쓴다는 부족에서 그 당골을 데려가려 애썼는디, 그때마다 바람같이 사라져 부렀다요. 그렇게 초원을 떠돌먼서 부족에게 내쳐져서는 누구의 외호도 받을 수 없는 서러운 뜨내기들만 챚어댕기먼서 병을 고쳐주고 위로를 나눠주었다요. 그 당골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능만요. 대물림을 끊어버릴라고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힘이 작용을 허였는지, 즤 어매를 배우덜 않고 칼질을 배웠다요. 젊은 옌네가 칼을 품고 댕기니 그걸 우습게 여기고 달려들었던 칼잽이 십 수 명이 그 옌네의 칼끝에 목쉼을 잃었고, 더러 살아난 칼잽이들의 입을 통해 전설이 되어 부렀다요. 그 후로는 감히 그 옌네에게 도전하는 칼잽이가 없었다능만, 그니는 홀연 칼을 집어 던지고 어매에게로 와 당골을 배웠는디, 홀몸이 아니었던 게요. 메마른 풀잎 사이로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을 때였다고 그럽디여. 온통 붉은 라레(lale)1)가 초원을 뒤덮은 어느 날, 흰색 나비 떼가 라레꽃의 선홍색을 덮어버린 날이었다고 그러던디, 산달이 가까워 만삭인 그니가 문득 신물(神物)들을 챙겨들더니 나비떼가 지천인 그곳으로 달려갔다는 게요. 그니가 신물을 흔들먼서 춤을 추자, 나비떼가 그 옌네 주위로 모여들어 그니으 몸을 덮어버렸는디, 그 바람에 겔국은 모습을 감추었고, 딸그라랑 떨렁, 딸그라랑 떨렁그렁, 그르러렁 방울소리만 남어 나비들의 춤사위를 도왔다능 만요. 그렇게 방울소리와 나비 떼의 군무가 어우러진지 한 식경이 지날 때쯤, 때아닌 무지개가 하늘로부터 내려앉고, 폴폴 흔들리는 나비의 춤사위를 따라 부정형의 호가 겹겹이 그려지는디, 게서 분가루가 흩어지듯 짙은 향이 뿌려지며 퍼져나갔다 안 허요? 그러더니 한순간에 모든 움직임이 멎어불고 시간조차 멎어버린 순간이 영원처럼 챚어오자마자, 초원을 뒤흔드는 피비린내가 앞서 흩뿌려진 향을 덮으며 하늘을 찢었다요. 오지말었으먼 좋았을 한 사내가 태어난 것인 디, 해필 피비린내였던 것은 그 아그의 운명에 새겨진 빗금에 힘사(Himsa)2)의 내력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지라. 계집아이였다면 즤 어매의 일을 받기 위해 살렸을 테지만, 힘사의 명운을 타고 태어난 그 아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요. 그 아그가, 그 아그가······, 바로 나였더랬소. 긍께, 나라는 인간은 태생부터 홀로였던 것이고, 타고 태어나길 힘사의 그늘에 사로잡힌 거였다는 야그요. 나비떼에 둘러싸여 있던 그 아그를 구해내 길러준 사람은 오른쪽 눈두덩이로부터 광대뼈까지 깊은 자흔이 뚜렷한 사람이었습지요잉. 그렁게 칼잽이였던 게라. 나으 명운은 그렇게 맞춤한 인연을 마련해두고 있었던 게 아니었겠습네? 그분의 무술은 당할 자가 없었습지. 나으 수련은 혹독했고, 당신이 그어놓은 금에 이르지 못허믄 반죽음을 면헐 수 없었지라. 해서 이른 나이에 스무 명 남짓의 비적떼와 싸워서 그들을 모두 도륙헐 수 있었고, 비로소 아비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소잉. 그런디, 그분은 초원에 절대자가 둘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분이었소. 무신 말인지 짐작허시겄소? 끄끄끄끄!

부리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예 촐폰의 갈기에 얼굴을 묻었다. 초원을 떠돌며 무수한 살생을 일삼던 사내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뜻밖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칼날로 돌을 긁어내는 소리를 내며 울음을 끄집어내던 그가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나를 키와 준 그분이 나으게 자신의 칼을 내어주며 명을 건 칼섞기를 요구허신 겝지요. 비록 핏줄로 이어진 건 아니었지만, 아비라 부르던 사람이 목쉼을 건 결투를 말했을 때, 나으 심정이 어땠겄소. 첨엔 나가 죽을 때라고 생각했소. 나가 어띃게 나를 거둬 키워준 분과 칼을 섞는단 말이오. 헌디, 그분은 진심이었지라.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이룩한 유일한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고, 자신을 초월한 후계자의 손에 숨을 맡기고 싶었던 거였습지. 그렇다고 마지막이 정해진 대련은 아니었소. 섬뜩한 살의가 칼끝에서 피를 부르고 있었응게요. 나으 광대뼈에 그어진 금이 그때 그분에 의해 그어진 것이었소. 몇 차례 칼이 섞이고 검광이 어둔 별의 통증을 내비쳤을 때, 그때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지라. 이분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구나! 뜨겁고 짙은 사랑이었구나. 나는 그분께 그만큼의 사랑을 표시한 적이 없었구나!

문득 부리의 눈빛이 빈 하늘에 직선으로 날아가며 낮빛을 조각내고 있었다. 

-나는 뜨겁게 울면서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전해 주었소. 그분의 칼끝에서 만들어지는 불꽃이 별똥별처럼 눈앞을 스쳐가기를 몇 차례, 나는 그분의 칼질 사이에서 살의를 비껴간 틈을 찾았던 거였소. 그 틈으로 칼끝을 깊숙이 밀어 넣었지라. 정확하고 간결한 길이 그분의 심장 한가운데로 났고, 뜨거운 액체가 그 길을 타고 내 얼굴에 뿌려졌지라. 나는 칼을 내던지고 머리통이 부숴지는 통증을 절감허먼서 그 핏길을 막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라. 그런디 그분은 내 손길을 막으며 말했소. ‘아그야!’ 그분이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은 처음이었소. ‘아그야! 나으 피를 온전히 받거라잉. 이것은 우리 가문의 거룩한 의식이랑게. 나으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고, 나가 나으 아버지에게서 받은 걸 너으게 전해 주는 것이여. 이걸 통해 비로소 너는 가문의 온전한 전승자가 된 것이고, 나는 너으 칼을 받아 조상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랑게. 육신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는 세계로 가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몸을 버리는 것이니, 애통해 헐 일도 아니고 눈물을 뿌릴 일은 더욱 아녀.’ 

부리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려지고 눈꼬리에 힘이 들어갔는데, 어떤 것을 이루고 그것을 인정받은 자의 만의보다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받은 상처가 더 커서 고통이 증폭된 낯선 기괴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하안검에 갇혀있던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허면······,

애초부터 아베스라가 탄 말이 촐폰의 뒤를 쫓고 있었으므로, 그는 부리의 뒤통수를 향해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부리 님도 조상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자식의 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베스라의 말에 부리는 촐폰의 발을 묶었다. 멈춰 선 촐폰의 등 위에서 그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베스라의 질문은 매우 직접적이고 비켜설 틈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한때는······, 그게······, 칼질보다 우선하는 책무처럼 여겨지기도 허였던 게라잉. 그랬고만요. 초원에선 칼질로 나를 당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었기에 더욱 그랬지라. 허지만 나으 링가를 받아줄 옌네를 찾는 것은, 나으 칼을 받고 목쉼을 내줄 사내를 찾는 것보담 더 어려웠능 게라요. 그렇다고 사내허고 잘 맞춰 사는 옌네에게 다짜고짜 수크라를 쏟아부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겄소. 초원을 떠돌아 댕김서 칼질을 무시로 험서도 늘 뒷꼭지 한 펜에서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지라. 허지만, 사람이 지 뜻만 가지고 헐 수 없는 일이 분멩히 있는 벱이 아니겄소? 시간이 약이란 말도 있질 않으요. 시간은 그저 뵈덜 않는 것인 중 알었더니 어떻게든 흔적은 남기지 않소? 그 흔적을 보고 나서야 시간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구나 느낀께요. 그러다 보니 옌네를 만나 나으게 칼집을 내줄 아해를 맹글어야 헌다는 열망도 옅어지고, 그저 그렇게 떠돌아 댕겼던 거 아니겄소?

단어나 구로만 말을 하며 살아왔다는 부리는 뜻밖에도 유랑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한 이야기는 아베스라를 온전한 청자로 만들고 있었다. 부리의 거칠고 우악스러운 성정을 걱정하며 아베스라의 동행에 안도하던 로샤낙의 의중을 돌아보면, 오히려 부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펼치는 계기를 만들어 줘, 그의 가슴 한편에서 점점 단단하게 굳어져만 가던 한을 녹여보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당골의 딸로 태어났던 로샤낙이 역시 당골의 아들로 태어나 곧바로 버려져야 했던 부리가 뿌려놓은 피의 흔적을 씻어보려는 말굿이 연행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흘려보내먼서 어찌 수크라를 건네준 옌네가 없었을 것이오. 어쩌다 만난 옌네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링가를 들이밀기도 허였고, 나겉은 뜨내기 사내에게 험한 꼴을 당허던 옌네를 구해 놓고는 은혜랍시고 몸을 받아 안기도 했응게요. 흐흐, 그게 구해준 것이겄소? 그렇지만 스치는 인연에서 어떤 열매가 맺었는지는 확인할 바는 없으니, 나으 무술을 전해 주고 그 아이에게서 나으 몸이 시상을 떠나는 호사를 누리기 바랄 수는 읎었지라.

부리가 내뱉는 웃음기는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라고, 나가 완전히 그 소망을 접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 있었지라!

그의 말이 더없이 허허로워져, 음소 하나하나가 허공 중에 떠서는 채 의미소를 이루기도 전에 흩어져갔다.

-나으 아비가 처음 나를 거뒀다는 곳을 찾아간 것은 순전히 나비떼 때문이었소. 겨울을 지낸 풀이 묵은 뿌리에서 푸릇한 새싹을 밀어 올리고, 성질 급한 라레가 붉디붉은 꽃을 피워내던 때였지라. 그때, 소복을 입은 옌네의 춤사위 같던 나비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인디, 허공을 가득 메운 나비떼가 나를 미쳐불게 했던 것이오. 그 엄청난 나비떼를 봉께 아비가 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소. ‘늬를 첨 본 곳은 나비 천지였어야! 살다살다 그런 나비떼를 본 건 첨이었지. 그란디 라레꽃 향기보담 짙은 피비린내가 그 가운데에서 풍겨나지 않었겄네? 피비린내라먼 진절머리를 내던 나가 신기허게도 그것을 더듬어 갔던 겨. 거기 핏덩이 하나가 오롯허니 놓여 있었는디, 울지두 않고 말여, 갓난쟁이가 울지두 않구, 벙긋벙긋 웃음서, 손을 내저으먼서 나비떼허고 놀고 있더랑게! 늬 몸뗑이에 남어있는 핏기를 나비들이 꿀을 빨아들이듯 허고 있었당게. 거그가 어디냐먼 말이지, 쾨펠리(käpǟli)3)라고 허는 딘디, 사리다리야 강 건너편에서 서남 쪽으루 한 식경쯤 말을 달려야 허는 디여.’

부리의 말이 떨리고 있었다. 부리의 말이 미풍에 흔들리는 박사마냥 떨리고 있었는 데, 뒤따라 가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베스라의 가슴은 더 떨리고 있었다. 영웅의 탄생담을 노래로 듣고 자라는 것은 초원의 아이들에겐 일상이었지만, 한낱 살생이나 일삼는 무지렁이 무인의 탄생담이 이리도 절절한 한의 노래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가 송장나비라고 불리는 흰 나비떼의 군무에 홀려, 나를 잊은 채 챚어 들어간 그곳에서 무얼 본 줄 아요? 나비떼의 황홀한 춤사위가 어느 한 곳으로만 몰려들고 있었는디 말인게라, 그곳에는 한 옌네가 나비떼의 애무를 받으며 누워있었던 것인디, 옷이란 옷은 다 벗겨진 채로 누워 나비떼의 춤을 온몸에 받으먼서 접신, 그라요, 그건 접신이라고밖에 다른 말로는 표현헐 길이 없는 신기(神氣) 충만한 장면이었단 말이오. 헌디 일순간 나비떼가 길을 열 듯 공간을 맹글었는디, 아······, 아······, 아······,

부리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이미 예전의 그 광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 그는 들숨과 날숨을 사이에서 혼란스럽지만 세미한 눈 떨림을 겪으며 그날의 접신 풍경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보고 말었소. 그 옌네가 누운 채 한껏 치들고 있는 치골 사이에서 서러운 눈물을 머금고 있는 요니를······, 어둡지만 빛나는 거뭇한 색······, 우주의 처음 모습 같은 그 요니를 보고야 말었당께요. ······,  ······, ······, 그러고 봉께 요니를 그렇게 본 것이 처음이었던 게라요. 그걸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응께요. 그저 링가를 합하는 물건이라 여겼던 것인디, 백주에 드러난 그것을 보니, 감추어진 것에 숨겨진 시상이 보이는 것 같은 환상이 내 뒤통수를 내리치더랑게요. 나는 꼼짝없이 서서, 움직일 수도, 맘 놓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도 없었다요. 뭘 해야 하겠다는 생각조차 헐 수가 없었지라. 그때, 나를 발견한 옌네가 고혹이 흐르는 웃음을 웃어 보였소.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이 녹아부는 것 같었소. 그 웃음은 찐헌 사우마(Sauma)였지라. 나는 꼼짝헐 수가 없었지라. 그냥 그 옌네의 손길에 내 몸을 맡길 수밖에는······. 폭풍 같은 시간이 공간을 압도하였소. 나와 옌네는 송장나비가 어지럽게 군무를 추는 속에서 그렇게 태초의 시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게라요. 그때, 나는 육신이 사라지고 혼백마저 사라진 진공을 느꼈소잉. 그 진공은 뭐라고 해야 헐까, 비었으되 빈 것은 아닌, 그렇다고 뭔가로 채워진 것도 아닌,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경지라고 해야 헐까, 뭐 그런 나를 경험헌 게요잉. 시님은 수도자닝께 나가 뭔 소리를 허는지 벌써 눈치를 채셨을 거고마요잉. 터무니없이 허술헌 얘기지만 말이오!

부리의 숨소리가 격정의 터널을 지나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어서, 숨을 놓아버릴 것 같은 격랑의 파고가 낮아지고 잔물결에 서린 억센 가시가 살을 파고드는 그런 것이었다. 

-나비떼의 어지러운 군무도 잦아들고, 하늘 건너편을 향해 있던 나으 눈이 다시 시상의 빛을 분별허게 되아지면서, 문득 옌네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신물(神物)이 보였소. 순간 나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이 거꾸로 치닫는 의혹에 휩싸였고만이라! 무령(巫鈴)과 무고(巫鼓) 그라고 날 선 월도(月刀). 그걸 보는 순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매의 얼굴이 떠올랐는디, 아······, 떠올랐는디 말이요잉, 그게······, 그게······, 요니를 한껏 치들고 있던 바로 눈앞의 그 여인이 아니겄소? 그 순간 나는······, 나는 말여라, 아비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루 칼을 섞자고 했을 때, 그때······, 바로 그때 느꼈던 절망이 다시 한번 찾아왔음을 직감했지라. 아니, 아녀라, 그냥 절망이 아니라 잘 버려진 송곳이 걍 내 목을 뚫고 들어온 것이었어라. 무신 말인지 알겄소? 시님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허시겄소? 정신이라는 것이 내 머리통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소. 그랑께 숨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 치욕이었다는 말인게라요. 옌네가 몸을 일으켰소. 눈가의 잔주름이 보였소. 그건 불행하게도 나으 예감이 맞아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겄소? 내 손이 칼을 찾고 있었소. 그것만이 모든 것을 종결지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식이 아니라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었지라. 근디, 옌네가 먼저, 칼을 찾아 더듬고 있는 내 손을 잡었고만이라. 따, 따뜻한 손이었지라. 그렇게 따뜻한 손은 처음이었소. 뜨, 뜨거운 것이 아니라 나의 심장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순식간에 온몸을 뎁혀주는 그런 따스함이었소. 혼란스러웠소, 참말로 혼란스러워서, 나가 기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라. 옌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고만이라.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옌네가 송장나비의 날개 겉은 옷을 걸치더고만이라. 그라고 흰색 천으로 둘둘 말려 있는 것을 풀어헤쳐 칼 한 자루를 꺼내 보였소. 검기(劍氣)가 심상하덜 않은 칼이었소. 옌네는 그걸 내 손에 쥐어주었더랬소. 그라고 말허였고만이라. ‘나는 다만 나으 아들을 거둬들인 것이여. 이제 나으 탯속으로 늬가 다시 들어온 것이여! 시상의 모든 목쉼에는 들고 나는 시간이 새겨져 있어야. 시방 나으겐 나는 시간의 때가 된 거여. 그려서 내가 시상에 내어놓은 고단한 목쉼의 초령(初靈)을 거둬가려고 헌 것이제. 늬가 지집애기였으먼 나를 전해줬을 낀데, 사나애기로 태어나 연이 끊쳤어야.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이닝께 원망을 허덜 말고······, 이 칼은 나가 당골이 되지 않을라고 칼질을 허고 댕길 때 쓰던 것이여. 늬도 칼질을 허는 사램이니, 이젠 늬가 주인이다.’ 옌네는, 나으 어매는 나를 거둬가기 위해 지달리고 있었던 거였어라. 어매으 말대로 시간은 시상의 모든 것을 낳기도 허고 거두고 허는 것이어서 원망헌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하찮은 게 되아버립디다. ‘가라, 이제 나으 때는 다되었으니, 너는 다시 나를 떠나야 하는 겨.’ 어미는 나으 등을 떠밀었지라. 나는 도무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소. 나으게 그런 상황이란 게, 누구와 눈 뜨고 작별을 헌다는 상황이란 게 한없이 낯선 일이어서 말이요이, 정말로 어띃게 해야 헐지 몰랐던 거요. 헌디, 영결이라는 건 그 자체로 하염없는 슬픔을 품고 있는 시간이었던 게라요. 어미가 등을 돌리자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슬픔이 솟구치더라 그말이요. 나는 꾸역꾸역 슬픔을 되새김질하면서 나으 어미, 나으게 시간을 남겨 준 그 옌네를 가만히 안아주었소. 그건 나가 이 시상에서 누구를 진정으로 품어 안은 유일한 일이었지라. 어미의 몸이 팽팽허게 긴장을 허던 게요. 그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소. ‘어떤 시간은 터무니없이 질어두 건져낼 이약이 읎기두 허구 말여, 또 어떤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다로워두 영원처럼 긴 이약을 담고 있어야. 무신 말인 중 알겄지잉?’

부리의 숨소리가 따사로운 햇살에 사그라드는 안개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영원의 시간을 만난 지상의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증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베스라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가 제모습을 찾아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산목숨은 순간 밖에서 영원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부리가 의식 속에서 만난 영원의 시간이 순간의 감각일지라도, 그가 이전의 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렁게 시방으 나는 어매가 시상에 남겨 놓은 하나밖에 없는 물건일지라두, 본질적으루는 혼불의 씨앗을 회수 당헌 허깨비일 수 있는 것이고, 아비의 소망이기두 헌 가문의 전승을 원천 차단 당헌, 말허자먼 조상의 시상으로 가는 질이 아주 끊쳐버린  영원한 외사람이란 거 아니것능게라. 그래서 더 추운 게라요. 사램들과 섺여 있어두 외롭고 춥더랑께요. 쿠샤 성님이 얌나르에 남으라고 했을 때, 눈물이 났소. 어쩌먼 여그서는 덜 추울지 모르겄다 그런 생각을 헌 것이었는 디, 저 급살맞을 산 껏들 땜시 산통이 깨져 분거요. 그려서 첨엔 산 껏들을 없애버릴 궁리만 했는디, 그게 쿠샤 성님의 참뜻은 아니었응께 고민이 많었소. 근디, 어매가 나의 혼불씨를 거둬간 뜻을 가만히 생각해봉께 쿠샤 님의 뜻을 이해헐 수 있었지라. 

초점을 잃은 부리의 눈 속에서는 어둠이 초원의 풀물결처럼 커다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휩쓸고 지나면 자지러지듯 몸을 뉘었다가 발작을 하며 일으키는 풀물결이 그의 눈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일렁임 속에는 그의 고단했던 일생이 당골의 춤사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때로는 격렬했을 시간이, 때로는 무료했을 시간이 무고(巫鼓)에 박제되었다 뛰쳐나온 리듬을 타고 내려앉아 있었다. 어둡고 깊은 시간이었다.

-그라고 봉께 시님은 나으 터무니없는 이약을 듣고도 아모 훈수를 안 허는 게라잉. 나가 그동안 솔찬히 만나 본 먹물들은 대개 훈수를 못혀서 안달이었는 디 말여라. 그 훈수라는 게 개갈도 안 나던 것들이긴 했지만······ 

부리가 성근 이빨 사이로 헛헛한 바람을 내뿜으며 아베스라를 돌아봤다. 촐폰이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하하, 훈수라니요. 그건 도무지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요. 부리 님은 이미 영원의 경계를 경험한 분이신데, 누가 자발없이 훈수를 한단 말입니까. 

그랬다. 아베스라가 생각하기에 부리의 말속은 어쭙잖은 수도자들이 내뱉는 설익은 오도송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 이름 없는 무인의 생에 새겨진 처절한 한과 그 매듭을 풀어가는 이야기가 주는 감동의 크기가, 사변의 결기를 쌓아가며 치열한 말의 그물을 짓던 수도자의 그것보다 결코 작지 않았다. 비록 운명에 짙게 새겨진 힘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어도, 당골의 해원 의식처럼 빚어진 그의 삶을, 거기 쌓인 이야기의 크기를 누가 가볍다 할 것인가. 

 

‘사형, 세상엔 고수가 참말로 많은 것 같소!’

언젠가 사제(師弟) 바수로치스(Vasu-rociṣ)4)가 만행 길에서 만난 늙은 목부의 지혜에 탄복하며 호들갑스레 아베스라에게 던진 말이었다. 

목부답지 않은 훌륭한 솜씨로 시타르를 타며 노래하던 그 목부는 ‘공간이란 시간에 사로잡힌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어느 곳에 존재하느냐보다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가 영원에 다가가는 열쇠일 것이라고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그는 생계만을 위해 염소 떼를 몰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머물러 삭아가는 시간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초지도 아닌 황량한 광야를 떠돌며 시간의 근원을 탐색하는 알려지지 않은 현자였다.

‘깨닫겠다며 안달하지 말라고 한다면, 무슨 말도 되지 않는 권면이냐고 하겠지만, 깨달음이란 게 포충망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잠자리를 낚아채듯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바에야 안달한다고 손에 쥐어지겠습니까? 다만,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기류 속에 담긴 시원의 이야기를 알아챌 수 있으면, 문득 비밀스런 씨앗 하나쯤은 볼 수 있을 겁니다.’

사흘을 같이 지내고 헤어질 때, 그는 조바심내지 말고 정진하라며 염소젖으로 손수 만든 쿠루트(курут)5)를 바랑에 담아주며 덕담까지 함께 건네주었다.

‘세상엔 미처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참말로 많네요!’

바수로치스는 사흘 만에 그에게 완전히 매료된 모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눈 크게 뜨고 돌아보면, 조용히 자신만의 빛을 내고 있는 고수들이 시원의 시간을 품고 있는데, 그저 삿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눈을 밝혀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무심한 듯 속 깊은 눈동자를 하고, 제 시간의 심연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 부리 또한 고수이고 현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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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튤립을 가리키는 튀르키어로 페르시아어 'lâleh'에서 유래한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튤립의 원산지이며, 영어의 tulip은 튀르키어의 터번을 뜻하는 'tülbent'에서 유래하였다.
2) 살생, 폭력, 상해 등의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3) 나비의 고대 튀르크어.
4) 고대 인도이란語로 ‘빛나는’이라는 뜻이다.
5) 양, 소, 염소의 발효유에 소금을 섞어 수분을 빼고 단단하게 말려 만든,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전통 건조 치즈.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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