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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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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30

posted Feb 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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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2

 

마을은 구릉에 얹혀 있었다. 멀리 뒤로는 설산의 허리께로 옅은 구름이 휘감고 있었고, 가까이로는 거친 속살을 드러낸 산봉우리들이 구름을 머리에 이고 겹쳐져 이어졌다. 그중 한 줄기가 크게 용트림하듯 굽이쳐 흐른 끄트머리에 구릉이 펼쳐져 있었는데, 마을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구릉을 타고 앉아 있었다. 제법 군락을 이루어 거칠고 황량한 풍경을 민망하게 하는 참나무와 그 사이를 틈입한 듯 박혀있는 피스타치오 그리고 아몬드가 마을의 왼쪽 면을 감싸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듯한 아치를 인 성문이 오래전의 전란을 견뎌낸 유물처럼 버티고 있었고, 성문 양옆의 판축하여 쌓은 성벽을 따라 가옥들의 외벽이 잇대어져 있었다.

성문 앞에서 잘레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 밖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마을 안쪽의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문 벽에 기대어 앉아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멀리 마을로 들어오는 길손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반색을 하고 손차양을 지어 확인하곤 하였다. 그런 그녀가 아베스라의 모습을 발견하였을 때는 뒷발질을 하며 날뛰는 나귀처럼 폴짝폴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시님요, 여기니더.

아마도 아베스라의 옷차림을 보고 짐작하였을 그녀는 먼 길에서 돌아오는 오라비라도 맞듯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이고, 시님요. 눈 빠지는 줄 알았니더. 이거는 지가 들겄니더.

아베스라가 성문 앞에 이르자 잘레는 호들갑스레 다가와 스스럼 없이 아베스라의 허리춤에 매달린 물주머니를 끌러 들었다.

-어서 가이시더. 베흐자트(Behjat)님이 기다리니더.

잘레는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으로는 카나트에서 길어 올려진 물을 이용한 작은 수로가 성문 앞까지 이어졌다. 유속을 늦추고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려는 간이 둑이 설치되어 있어 유량은 넉넉해 보였다. 수로 양옆엔 고개를 쳐든 코브라를 닮은 산세베리아 같은 관속식물이 드문드문 보였고, 야생밀같이 생긴 풀과 들콩류의 식물들이 아무렇게 흐트러져 있었다. 수로를 사이에 두고 난 길을 따라 붉은 흙벽의 집들이 이어졌다.

-베흐자트 님이요? 베흐자트 님이 누구죠?

아베스라가 잘레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물었다.

-누겠니껴? 어제 돌우물에서 보고도 그라니껴.

잘레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힐난하듯 툴툴거렸다.

아베스라는 통통 튀듯 걷는 잘레의 발걸음을 보며 황량한 고원 산지에 오아시스처럼 떠 있는 마을 같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수로 양옆으로 난 길을 따라 이어지는 집들은 대부분이 2층집이었다. 붉은 흙벽은 햇볕에 찌들어 갈라져 있었고, 1층 현관의 문짝은 나무 판재가 뒤틀려 있기도 하였고 거뭇거뭇 회색으로 변색되어 고단한 주인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집의 2층 베란다에는 안주인의 소망을 담은 듯 화분을 넘쳐 피어난 꽃들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다 수로 서편으로 문득 참나무 두 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는 넉넉한 공터가 나타났는데, 그 안쪽에 다른 집들과는 사뭇 다른 품격을 자랑하는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염집의 출입문이 외짝 문이었던 것과 달리 널찍한 양개문이었고, 질 좋은 나무는 정성스러운 기름칠로 나뭇결이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더구나 문틀을 둘러싼 두 뼘 넓이의 회칠이 붉은 흙벽과 조화를 이루며 분위기를 한층 화사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다만 밖으로 난 창은 없었다.

-내 왔니더. 문 여소!

잘레는 문고리를 거칠게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시꺼럽다! 문 살살 뚜드리라 안 했나? 지집아가 참 말 안 듣네!

문 안에서 걸걸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그녀는 아베스라를 힐끗 보더니 서둘러 종종걸음을 치며 들어갔다.

-베흐자트 님요, 시님이 오셨니더!

여인이 맞은 편 2층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며 소리를 질렀다.

아베스라는 중정과 사면을 채운 건물에 압도되었다. 가운데에 원뿔 모양의 삼단 분수가 있는 직사각형 못이 현실 너머의 세계처럼 보였다. 못을 둘러싼 잔디는 더없이 싱싱한 천연의 주단이었고, 잘 다듬어진 갖가지 모양의 나무들이 다소곳한 모양으로 심겨 있었다. 연못 곁으로는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폭으로 박석이 깔려 있어서 몸보다는 마음의 쉼이 필요할 때 걷고 싶을 것 같았다. 네 면의 건물은 1층의 회랑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본관 중앙부에 그럴듯한 캐노피를 머리에 인 현관이 있는데, 이 집은 남향의 본관과 동재(東齋) 사이의 계단실을 통해 본관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건물들은 기단부만 돌로 되어 있었고, 본관은 표면이 거칠게 다듬어진 석재로 지어져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잘 오셨니더.

베흐자트가 동재 끝의 계단실 앞에서 아베스라를 맞았다. 아베스라는 잘레가 돌우물이라고 말하던 산 위의 샘가에서 보았던 허름한 차림의 여인이 아니어서 놀랐다. 그녀는 눈부시게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 아래의 둥근 남색 깃은 흰색의 천과 대조를 이루며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손목으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는 소매는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양젖 빛깔의 팔뚝이 드러났다. 허리엔 한 뼘 넓이의 남색 띠를 둘러매어 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아름다운 집에 초대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베스라는 두 손을 모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레, 차 좀 내오니라. 시님, 올라 가이시더.

베흐자트가 앞서서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여러 겹으로 주름진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리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양젖 빛깔의 발목이 얼핏얼핏 드러났다. 아베스라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계단에 발이 걸렸다. 그의 몸이 기우뚱 앞으로 쏠렸다.

-조심하소. 괘안니껴?

베흐자트가 돌아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베스라는 쪽 팔렸다. 희게 빛나는 그녀의 발목에 수행자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소에 그가 쓴 가면의 끈이 끊기며 반쯤 벗겨졌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오르자 넓은 응접실이었다. 중정을 면한 쪽은 벽이 없이 기둥과 기둥 사이의 난간만으로 조성되어 중정의 풍경을 온전하게 끌어들이고 있었다. 바닥엔 사람이 서서 중정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질 좋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양탄자 가운데엔 단순한 형태가 오히려 호기로운 직사각형의 다탁이 놓여 있었고, 그것을 둘러싸고 좁은 면엔 하나씩 그리고 중정을 바라보는 긴 면엔 세 개의 방석이 쉼과 담화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응접실 난간에 서서 내려다본 중정의 모습은 지붕 너머로 보이는 황량한 산등성이의 풍경과 대비되면서 자연스럽게 별천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물과 잔디 그리고 다듬어진 나무가 한낮 햇살의 독기마저 달래어 무디게 하였다. 분수의 물줄기는 거세지 않아, 물방울이 흩어지지 않을 만큼의 세기로 솟구쳤다가 여러 줄기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하녀로 보이는 여인들의바쁜 걸음조차 정물처럼 느껴졌다.

-고마하믄 괘안치요?

베흐자트가 난간 앞에 서서 중정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베스라의 곁으로 다가오며 낮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렇게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보니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던 마음마저 절로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꽤 공이 많이 든듯합니다.

-저기 순전히 내하고 잘레하고 둘이서만 가꾼 기라요. 다른 직원들은 손도 몬 대게 하니더.

-직원이요?

아베스라가 생소한 말에 놀라자 베흐자트는 엷은 미소를 드러냈다.

-우리 집에서는 일을 도와주는 몸붙이들을 그레 부르니더.

베흐자트의 말에 아베스라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일을 도와주는 몸붙이란 하인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직원이라고 부르는 예는 들어 본 바도 없을뿐더러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자리를 타고 태어나 그 자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변고가 생겨 노비가 장상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것조차 하늘이 허락해야 하는 일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한처음에야 모두가 한가지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나, 남들과 구별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두각을 드러낼 때쯤엔 계층과 계급이 생겨나고 세습되어 이른바 큰무리의 작동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아베스라의 눈에 베흐자트는 잘 세공되어 찬란한 빛을 품은 청금석처럼 보였다.

-차 내왔니더.

잘레가 주둥이에서 옅은 김이 나오는 도기 주전자와 잔 그리고 찻잎이 담긴 흑도 차합을 쟁반에 담아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하며 들어왔다.

아베스라가 서둘러 쟁반을 받아 들었다. 도기 주전자가 생각보다 커서 무거웠다.

-하이고, 괘안쿠마요. 고마시니더.

잘레가 입구 쪽에 앉고 베흐자트는 입구를 마주 보는 쪽에 앉았다. 엉거주춤하던 아베스라는 세 개의 방석 중 가운데 것에 앉아 중정 건너편 하늘을 하릴없이 건너다보았다.

-씨름 바위에 오시기 전엔 어데 계셨니껴?

잘레가 찻잔에 주전잣 물을 따라 휘휘 내저어 대접에 쏟아내며 설핏 아베스라를 보며 물었다.

-떠돌이 수행승은 늘 길 위에 있어야 하는데, 우르 인근의 선지식에게서 한 철을 지내고 오는 길입니다.

-우르요?

-우르라 캔니껴?

두 여인이 동시에 외치듯 말하고는 크게 뜬 눈으로 아베스라를 바라보았다.

-하모, 불새가 되가 하늘로 올랐다는 현자 이바구를 아시니껴? 아주 장한 마구쉬 님이라 카던데?

잘레가 잘 다듬어 깎은 나무 차 바침에 얹은 찻잔을 아베스라 앞에 놓으며, 그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눈길을 박아놓고 있었다.

-거그서 참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 카니껴?

여인들은 아오슈나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베스라는 놀랍고 두려웠다. 산중의 여인들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고, 어떻게든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불새가 된 그분과 함께 지냈습니다.

아베스라의 대답에 두 여인은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꼴깍꼴깍 침만 삼키고 있었다.

-하이고, 베흐자트 님. 우야믄 좋니껴. 이를 우야믄 좋니껴.

잘레는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야야, 쫌 가마 있어봐라. 정신 사납꾸로.

베흐자트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그 현자가 참말로 불새가 되었니껴? 그 서슬에 악마가 죽이삤다더마 그기 참말이니껴?

잘레는 악마를 물리친 불새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마구쉬 님이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을 뭬 살았다카던데 우예 그랬니껴?

베흐자트는 니루샤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아베스라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새삼스레 자신과 아오슈나르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과 그 강렬했던 불꽃을 복기하려 애썼지만, 이상하게도 다만 짙은 안개 속에서 실루엣만 드러내고 있는 커다란 나무의 모습만 보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천상의 존재는 지상의 신물을 통해 자기 뜻을 드러낸다더니······, 아오슈나르 그가 나무에?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방식의 현현에 대해선 도무지 부정적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보인 흐린 나무는 무엇이지?

아베스라가 쉬 대답을 못 하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동재(東齋) 너머 황량한 구릉을 내처 바라보았다. 베흐자트는 아베스라의 망연한 눈빛에서 새벽 물안개 속에 보이곤 하던 물상이 지연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베스라가 아직 목격한 것에서 자유롭지 않고, 심상(心傷)이 아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크게 보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일지라도 곁에서 지켜본 사람에게는 고통스럽고 황망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석되고 윤색되는 과정을 지나오지 못했을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참말로 이약멘치 나쁜 놈들을 절단냈으마 좋겠니더.

잘레는 여전히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 속에서 몸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됐다. 시님이 좀 쉬구로 이약은 낭중에 듣제이. 차 맛이 어떻니껴? 괘않치요?

베흐자트가 잘레의 말을 끊으며 화제를 돌렸다.

-향이 아주 좋군요. 고향에서 마시던 차 맛입니다.

-그라니껴. 다행이시더. 소그드1)를 건너온 게라서 향이 좋니더.

아베스라가 소그드라는 말에 놀랐다. 그들의 상단이 이곳을 거쳐 가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혹시 카스피 동쪽 초원을 거쳐온 그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겼다.

-소그드 상인들이 이곳을 지납니까?

-여는 아이고 읍성 너머에 케르반 사라이가 있니더. 거게서 동방의 차를 농가 받은 이 지방 상인이 개져온 거시더.

아베스라가 연신 차향을 맡으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두 여인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일어섰다.

-시님요, 이자 좀 쉬시소. 여게가 시님이 묵을 방이시더.

베흐자트가 응접실을 나가자 잘레는 그곳에 딸린 방의 문을 열어 보였다.

 

아베스라는 눈에서 시퍼런 불빛을 내뿜는 괴물에 쫓기고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하늘에는 해가 떠 있었으나 안개에 갇힌 듯 빛을 잃고 창백한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반대쪽 하늘엔 음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달이 뒤집힌 배 모양으로 둥둥 떠가고 있었다. 아베스라를 뒤쫓는 시퍼런 불덩이의 거친 숨소리는 도망하여 달리는 아베스라의 숨소리를 빨아들였다. 쫓는 괴물과 달아나는 사람의 사이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다 보니 몸뚱이에서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아베스라에게는 더 이상 뱉어낼 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윽고 숨이 멎어버리자 그의 몸뚱이는 실체를 잃고 수증기가 흩어지듯 날아올랐는데, 그 수증기가 기화해버리는 몸인지 그것을 빠져나온 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비로소 태양은 제 모양을 찾아 강렬한 햇살을 내리쬐기 시작했고, 뒤집힌 배 모양을 하고 있던 달은 어느새 돛까지 매단 온전한 모습으로 하늘을 노 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베스라를 삼켜버릴 듯 지옥의 울음을 내뱉던 시퍼런 불덩이는 훅 불어버리면 꺼질 듯 연약한 불꽃이 되어 수줍게 빛나고 있었다. 숨조차 잃고 기체가 되어버린 아베스라는 자신의 존재를 무엇이라 해야 할지 몰랐다. 집을 잃은 칼, 깨진 독에서 흘러나온 올리브유, 흐르지 않으니 보이지도 않는 바람······.

갑자기 거센 모래바람이 불었다. 약한 인력으로 겨우 서로를 지탱하고 있던 수증기 모양의 기(氣)가 흩어지며 모래 알갱이에 들러붙었다. 그러자 인력은 사라지고 수증기 모양의 존재도 사라지고 없었다. 물질과 물질의 정보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자아는 존재하는가. 열체(熱體, 에너지)가 거센 회오리에 휩쓸려 사라지고 나자, 단일한 존재로서의 아베스라 자신을 불러모을 그 무엇도 남아 있질 않았다. 완벽한 무화(無化)였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사유하는 존재가 있었다. 열체의 씨앗이라고 해야 할 그것은 무화되고 없는 자신을 향해 애처로운 울음을 보내고 있었다. 회오리의 날카로운 바람 소리 속에서 우웅, 웅웅, 낮고 여린 울음은 흩어져버린 입자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폭발은 늘 갑작스러운 사건이다. 예정되었던 폭발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그것이 갑작스러운 것은 시간의 연속성을 순식간에 찢어버리는 돌발성 때문이다. 흩어져 모래바람 속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던 입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듣는다는 것은 지향성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비로소 하나의 위치에 모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밀도 높은 연합체를 이루자 거대한 폭발이 생겨났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새로 지어진 한처음의 산만한 조화는 원인자가 서로 흩어져 있었으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절대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방의 시간이 생겨나고 원인자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여러 가지 성질의 물질이 경합하게 되었다. 그것 중에 새로운 지향을 꿈꾸는 것들이 생겨나자 절대적 존재의 조정(간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을 질서라고 불렀다. 질서의 본질은 조화였으므로 평화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일말의 변화도 없이 지루하게 계속되던 질서의 시간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거부하며 나온 것이 반질서의 존재인데 죽음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어둠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것의 본질은 반창조이며 파괴였다. 그렇게 지루한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하는 가운데 사람이 만들어졌다. 절대자 신이 자신의 일상에 약간의 재미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만 자그마한 실수가 있어 불순물이 떨어져 들어갔고, 그 때문에 사람은 자연과 반자연의 양면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평화로운 일상을 지겨워하던 일부 사람들에게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어둠은 곧장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세가 불어나자 절대 존재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어둠의 세력과 그를 추종하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반생명의 파괴행위가 자신들의 존립마저 뒤흔들게 되자, 그때서야 그들은 절대적 존재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신은 그들이 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조건으로 용서하였다. 평화는 그렇게 왔다. 그러나 평화는 어둠의 파괴를 기억하는 자들이 살아있는 동안만 유지될 수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고 구부러지자 악은 다시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의 달콤하고 역동적인 유혹은 자연과 반자연의 균형이 무너져가던 인간의 무리에겐 더없이 매혹적이어서 곧 악마의 무리에 규합되었다. 그들은 질서와 조화는 신의 언어이고 신의 영속을 위한 조건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더 많은 소유와 더 짜릿한 쾌락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신은 몹시 불쾌하였으나 평화를 깨지 않으려 약간의 소란스러움은 모른 척했다. 악마는 그걸 신의 약점이라고 판단했다. 신이 작은 소동을 묵인하는 사이 악의 세력은 인간들을 충동하여 신의 질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질서 속 일상의 고단함에 투정을 부리던 사람들을 짐승의 논리 곧 힘과 송곳니의 광포함 속으로 내몰았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했으나 신은 침묵했다. 신은 인간 스스로 질서와 조화 그리고 평화에 대해 숙고하고 악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심판이 무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침묵은 길어졌다. 성급한 인간들은 신의 죽음을 들먹거렸으나 일부는 인간의 탐욕이 악마를 부르고 파멸을 가져온다고 경고했다. 그나마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지옥이 되어갔다.

아베스라는 안타라바바(Antarābhava)2)를 지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인간 세상이기도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울부짖고 있는 악귀들은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누구에게 공격당한 상처가 아닌 탐심과 집착과 불만족을 못 견뎌 자해하여 생긴 상처로 괴로워했다. 그들은 살이 뜯기고 피가 튀고 뼈가 드러나고 있었으나 자해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베스라가 보기에 그들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영원히 자기의 몸을 찢고 뜯어야 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탐심과 집착이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변형을 가져왔다.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악귀들이 여전히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다음 방에서는 한 무리의 악귀들이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와 증오로 인한 격정을 참지 못하고 육식동물들의 발톱처럼 변해버린 날카로운 손톱을 서로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상대의 몸이 찢기고 자신의 몸도 뜯겨나가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는 가시와 뿔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분노와 증오심은 가라앉지 않고 증폭되어 더욱 난폭해지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그들의 끔찍한 모습에 토악질을 할 것 같아 서둘러 그곳을 지나쳤다. 세 번째 방에 있는 악귀들은 자해도 다른 것의 공격도 없었으나 그 자리에서 흉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악귀는 두 걸음 앞에 있는 함정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알려주는 이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또 다른 악귀는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겨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으며, 또 어떤 악귀는 밝은 대낮임에도 횃불을 들고 자신이 세상을 밝히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들은 아집과 독선이라는 함정에 빠져 흉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벌을 받고 있었는데, 한 번의 행위가 끝날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은 유리판을 송곳으로 긁는 소리를 내었다. 그 비명이 자신들의 살을 파내고 그곳에 허옇게 백태가 낀 눈알을 심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무명(無明)의 죄업이 혼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끔찍한 징벌의 방 세 개를 지나온 아베스라가 문을 박차고 나오자 급작스럽게 마주한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사물의 실루엣을 소거하는 강렬한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자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눈이 꺼풀을 힘주어 닫았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꺼풀을 통과해 들어온 미명이 머릿속을 벼락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가 몸을 입고 있었다. 몸이 생겨나자 감각이 살아났다.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상쾌한 바람결이 살갗에 와 부딪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청금석을 통과한 빛처럼 반짝이는 파란 하늘이 내려앉고 있었고, 초목의 싱그러운 녹음이 질 좋은 카펫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시퍼런 불덩이에 쫓기다 기화된 후, 새롭게 얻은 몸이어서인지 다가오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는 무성한 잎이 쏟아질 듯 흐드러진 커다란 참나무 아래에 서서 자신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습은 분명 예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육신의 질감은 달랐다. 살갗은 세상의 길을 닮은 실낱같은 선과 역참 같은 모공과 나무 같은 터럭을 통해 세미한 공기의 흐름을 읽어 세상을 추론하고 있었다. 한껏 긴장하며 부풀어 오른 감각점이 모든 감각기관의 기능을 통합해버린 느낌이었다. 꽃향기를 품은 산들바람이 살갗을 간지럽히자 두 눈이 절로 감겼다. 시각을 포기한 자리에서 스멀스멀 야릇한 손길이 몸을 더듬고 있었다. 나비의 날개가 간질이는 것 같기도 하였고, 잘 손질한 양털 뭉치가 가벼이 훑고 지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 감질나는 감각에 하복부의 세포가 힘차게 팽창하였고, 숨구멍이란 숨구멍은 모두 활짝 열린 채 절정을 훔치듯 받아 맞으려는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들이마시는 숨결엔 잘 익은 복숭아 향이 짙게 묻어 있었고, 내쉬는 숨결엔 비릿한 밤꽃 향이 수줍었다. 감각점은 치열해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은 꿈결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형세였다. 종국엔 박사(薄紗)의 감칠맛이 전신을 휘감아오면서 링가의 근기를 고무해 수크라(Śukra)를 쏟아버릴 지경이었다.

···후잇힛힛, 나는 너를 보았도다!

어둠이 빛 가운데 숨겼던 몸뚱이를 드러내며 아베스라를 비웃고 있었다.

-야, 이 빌어먹을 마구니 새끼야!

어둠의 간악한 농간에 분노한 아베스라가 목장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시님요! 꿈꾸셨니껴? 무슨 소리를 그래 씨게 지르니껴.

잘레가 잘 손질된 옷을 두 손에 받쳐 들고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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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아시아에 있던 고대 국가 연맹체로 소그디아 혹은 소그디아나라고도 불렸고 그곳의 사람들을 소그드인이라 하였다. 고대 이란계 종족으로 소그드 어를 썼으며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고대에도 이미 그들의 상단이 페르시아 지역에서 활약하였고, 후일 실크로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산스크리트어로 사후와 환생 사이의 49일 동안의 상태를 일컫는다. 티벳에서는 바르도(Bardo), 한자로는 중음(中陰), 중유(中有)라 한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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