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흐자트는 아베스라의 품상(品像)1)을 보면서 홀연 다섯 해 전에 이 고을을 찾아 들어왔던 사나이 부리(Bori)2)를 떠올렸다. 매우 거친 모습의 사내였다. 머리칼은 더부룩하게 부풀어 있었고, 검게 그을린 얼굴은 야생의 짐승 같았는데, 눈빛은 보는 이를 단박에 제압할 만큼 강렬하였다. 옷은 낡아서 색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였고 저고리 위에 걸친 가죽조끼는 빛을 반사할 정도로 반질거렸다. 그야말로 단기필마로 나타난 그의 말 안장 뒤에 꽂힌 싸리나무에는 낡을 대로 낡은 삼각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 속 문양은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퇴색된 채였다. 사람들은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을 거두러 온 존재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의 말 안장 왼쪽엔 궁대(弓袋)가 오른편엔 동개(筒箇)가 매여 있었고, 손아귀엔 날이 시퍼런 월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부리는 예의 바르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눈빛은 날카로웠으나 예를 표할 때는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듯 눈빛을 거두며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물며 허리를 굽혀 자신을 낮추기까지 하였는데 초원에서 온 무사로서는 드문 행동이었다.
그가 파르바르딘에 왔을 때, 베흐자트의 남편 쿠샤(KooshA)는 그를 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아미르카(Amirka)부족의 위협에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르카는 고산 부족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부족의 이름조차 그들의 습격을 받았던 대상들이 붙였다고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고산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의 연합체이며 약탈이 필요할 때만 모여 움직인다는 그럴듯한 추론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습격을 격퇴하더라도 인적 물적 손실이 클 수밖에 없었으므로 마을의 지도자인 쿠샤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즈음 중산간 지역으로 올라갔던 한 목부가 그들의 습격을 받아 양을 모두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까지 떠돌면서, 이곳 얌나르(Yamnar)를 비롯한 산 아랫마을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쿠샤와 부리는 곧 의기투합하여 마을을 돌며 방어시설을 점검하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하고, 창술을 겨누기도 하며 우의를 다져갔다. 특히 부리의 권법 수련을 지켜보던 쿠샤는 그의 춤사위 같은 동작에 매료되었다. 쿠샤와 함께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던 베흐자트는 허공을 차고 뛰어올라 뒤로 한 바퀴 돌아 착지하는 부리의 동작을 보고 무릎의 힘이 풀리는 경험을 하였다. 설표의 유연함과 순간적으로 치닫는 힘의 강력한 파장이 자신의 몸으로 전이되어 단전의 힘을 해제하며 무릎이 풀려버렸던 것이다. 그날 밤 베흐자트는 쿠샤의 품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베흐자트는 아베스라의 품상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근육 사이사이에 부리의 동작이 새겨놓은 전율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아베스라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먹과 다리를 휘두르고 막으며 대련을 시작했다.
아베스라는 느닷없는 상황에 순간 당황했으나 기꺼이 그녀의 초식을 받아 대응했다. 베흐자트의 주먹이 날아오면 아베스라가 몸을 돌리며 막아 밀쳐내고, 그녀가 몸을 날려 발길질을 해대면 그는 발끝으로 그것을 받아 가볍게 방향을 돌렸다.
베흐자트의 주먹질과 발길질에는 기대와 설렘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아베스라의 무공에서 부리로부터 받았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과 부리와는 다른 부드러운 공력이 주는 매력이 그녀의 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아베스라의 손길이 빠르게 스칠 때마다 와류가 그녀의 피부에 돋은 솜털을 어지럽혔다. 솜털의 세미한 움직임은 촉각을 자극하며 세포사이로 스며들어 실재하지도 않는 극치감을 전신에 흩뿌렸다. 그녀는 무릎의 힘이 풀리고 숨이 가빠져서 대련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베흐자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헐떡이자 아베스라도 심호흡을 하며 동작을 멈췄다.
-심호흡을 하십시오. 베흐자트 님 같은 여류는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베스라가 왼손바닥에 오른손 주먹을 감싸 가슴 위로 올려 예를 표했다.
-아이니더. 지가 모처럼 한 수 배웠니더. 시님의 무공이 절등이니더.
베흐자트가 가쁜 숨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혹시 흐트러진 마음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얼굴을 돌리고 앞장서 걸었다.
-정원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베스라는 갑자기 사그라드는 열기에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느끼며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평시엔 그저 잘 가꿔진 정원으로 비어있기 일쑤나, 고산 부족의 내침이 있을 때는 노약자들의 피난처이고 전투 지휘소가 되니더.
두 사람이 정자에 이르자, 베흐자트가 흐트러져 있던 좌식의자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 제가 선정에 들지 못하고 주먹질을 하러 가는 바람에 미쳐 정리를······못했습니다.
아베스라가 허둥거리며 의자를 들려다 그만 베흐자트의 손등에 닿고 말았다. 그는 놀라 손을 뺐다. 그 바람에 의자가 균형을 잃고 등받이가 지면에 누었다.
-호호, 무공 수련을 하실 때는 치타가 날 듯하시더니 지금은 우예 이리 허둥버둥이시니껴?
베흐자트는 대련을 하면서 가졌던 설렘도 옅어지고, 아베스라가 오히려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암문이 열렸다 닫히는 둔중한 소리가 정원의 사방 벽에 도달하여 부딪치며 맥놀이를 일으켰다. 그 현란한 파동을 뚫고 잘레와 로샤낙이 걸어왔다. 잘레는 찻잔과 다과를 담은 쟁반을 받쳐 들고 앞장서 걸었고 로샤낙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주전자를 물지게 양편에 걸린 물통 손잡이를 쥐고 걷는 모습이었다. 주전자를 쥔 손과 팔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도를 유지하며 걷는 로샤낙의 걸음걸이에는 수련의 공력이 숨어 있었다. 마치 좁고 위태로운 나무 징검다리를 정확하게 디디는 훈련을 받은 걸음걸이였고 체중은 최대한 분산시켜 발바닥이 지면을 밟지 않고 스치는 것 같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저 로샤낙이란 여인은······, 예사 사람이 아니군요.
아베스라가 저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을 내어 뱉었다.
-그래보이니껴. 이 집에 있는 여자들이 모두 기구하기는 하지만서두 로샤낙은 좀 특별하니더. 얼골을 봐서 알겄지만 우리네 겨레는 아니니더. 초원에서 쫒겨나 떠돌던 당골의 딸로 태어났다 카니더. 무술을 따로 익히지는 않았다는데, 몸동작에 절도가 있고 가볍고 어떤 리듬을 타는 듯 하니더.
-아!
아베스라는 베흐자트의 말에서 로샤낙의 굴레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당골 어머니는 로샤낙에게 가혹한 훈련을 견뎌내도록 했을 것이다. 처음 파르바르딘의 문을 열어주던 때와 정원으로 통하는 암문을 열어주던 때에 보았던 로샤낙과는 다른 모습이 보였다. 마치 그녀의 내실을 몰래 들여다본 것 같았다.
-다과가 왔니더!
잘레가 쟁반을 정자 가운데에 깔린 카펫에 내려놓으며 베흐자트와 아베스라를 힐끗 쳐다봤다. 약간의 의혹 혹은 기대감이 서린 야릇한 눈빛이었다.
로샤낙은 주전자를 카펫 밖 바닥에 내려놓더니 돌아가려 했다.
-언니, 어데 갈라꼬. 같이 마시자!
베흐자트가 돌아가려는 그녀를 제지했다.
아베스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하녀들을 직원이라고 부르는 집이라고 하더라도 파르바르딘과 저들의 주인인 베흐자트가 로샤낙을 언니라 부르는 것은 뜻밖이었다.
-아이고, 손님이 계시는데 언니라니 베흐자트 님도 참······.
로샤낙이 베흐자트의 말에 민망스러워했다. 그녀는 사리 분별이 정확한 사람인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언니 동생 하며 지내는 것 같은데 외부인이 있을 때는 깍듯이 주종의 예를 갖추는 게 확실했다.
-괘않타! 시님은 손님이 아니다.
베흐자트의 말에 놀란 것은 아베스라만이 아니었다. 쟁반의 밀과자를 목기 접시에 나눠 담고 있던 잘레가 불에 덴 듯 놀라며 베흐자트를 바라보았다.
-두, 두 분이 알고 있었니껴?
-그럴 리가? 니도 알다시피 돌샘에서 처음 보지 안 했나?
베흐자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태연했다. 그 모습이 잘레에게는 더욱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 처음 왔는데도 손님이 아니란 말이시껴?
-맨날 천날 드나들어도 손님인 사람이 있는 기고, 처음부터 지기인 사람이 있는 법이다. 알제?
베흐자트의 말을 잘레는 기어이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제국의 성립 이후 전쟁은 사라졌으나 관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간간이 비적들이 출몰하여 마을을 약탈하곤 하였는데, 이곳 얌나르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쿠샤가 샤트라프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한때 소규모 관병이 주둔하기도 하였으나, 전략적 비중이 작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리자 마을의 방어는 전적으로 촌장인 쿠샤와 촌민들의 책임이 되었다. 두세 해 간격으로 얌나르를 비롯한 인근 여러 마을이 비적들의 습격을 받아왔는데 그때마다 홀로 남은 여인들이 생겨났다. 베흐자트는 그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일과 급여를 제공하였다. 그들이 그녀가 말한 직원들이었다. 파르바르딘은 그렇게 독특한 여인들의 공동체가 되었다.
베흐자트가 니루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이유였다.
-그분이 특별히 여인들을 거둔 이유가 있니껴?
네 사람이 각기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자, 베흐자트는 아오슈나르와 니루샤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잘레는 찻물을 우려내 따르면서도 여전히 아베스라를 곁눈질하였고, 로샤낙은 부드럽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아베스라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요. 처음의 때엔 여인들의 프라바쉬(fravaši)3)적 심성이 경배 되기도 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엔 가르침이 오도되면서 여인들에게서 그런 면을 빼앗아 버렸다고요. 그분은 오랫동안 유랑 사제로 떠돌았답니다. 그 때 여인들이 겪는 고난의 크기를 가늠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여인들이 숙명을 벗고 내면에 잠자고 있는 프라바쉬성를 깨달아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돕고 싶었던 거죠. 니루샤는 그의 첫 실험이었던 셈이지요.
아베스라가 잘레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고 멀리 하늘을 보았다. 새가 되어 하늘에 오른 아오슈나르가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여인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궁금해 지니더.
베흐자트는 여인들이 모여 사는 이야기가 추상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라며 그들에게서 프라바쉬를 발현시키려면 발을 딛고 선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인들만 모여 산다고 저절로 그 시상을 꿈꾸게 되진 않더니더. 천지 사방에 남자들 이얘기로 가득 차 있는 데 여인들의 말이 돋아나기 쉽겠니껴? 여자들의 내뱉는 말이 자꾸 비틀리고 숨가지면서 말에 담긴 뜻도 차마 피어나질 못하고 맙디더.
아베스라는 베흐자트의 말을 들으며 놀라고 부끄러웠다. 수도자로서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말하는 훈련을 받아온 그로서는 현실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부차적 존재로 여겨지는 여인들이 그들의 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언어는 세상에 관한 것이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말은 관계와 사랑에 대한 말이었다. 세상에 관한 언어는 지배 관계와 질서, 현상의 유지를 위한 것들이었고, 관계와 사랑의 말은 현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이를 꿈꾸게 하는 말이었다.
아베스라는 벌떡 일어섰다. 의자 뒤로 돌아 나와 세 여인을 향해 큰절을 했다.
아베스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여인들이 손에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어찌할 줄을 몰라고 했다.
-시님, 와 이러시니껴?
베흐자트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엉거주춤하였고, 잘레는 놀라서 거의 울상이었다. 로샤낙은 눈을 크게 뜨고 아베스라의 눈 너머의 무엇을 보려 하는 것 같았다.
-수도자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니 가르침을 주신 분들에게 예를 갖춰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베스라는 진심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여인들은 처음 겪는 일이어서 두렵기까지 했다. 남자가 그것도 수행자가 여인들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님, 수도자가 아녀자의 말에 이렇게까지 하시면 저희는 우짭니꺼.
베흐자트의 말이 떨렸다.
-아닙니다. 처음 세상의 말은 여인들의 것이었고 오랫동안 그것에 의지해 살아왔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세상에는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말로 두루 평안하게 살았는데, 여인들의 말을 남정네들이 빼앗고부터 계급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면서 여인들이 나눠주던 이야기는 남정네들의 담론으로 변하면서 다툼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지요. 저는 수행자로 살면서 현상을 추상적인 말로 생각하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남정네의 언어를 이식받고 증식하도록 길러진 거지요. 제가 유식해서 어려운 말을 쓰는 게 아니라 그런 말로 생각하고 말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추상화되고 논리적인 말은 사유를 확장하고 정교화하는 데 적합하여 현상 너머의 세계를 보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잃고 말았기 때문에 대중들의 삶에 스며들 수는 없었던 겁니다.
아베스라의 말에 여인들이 조금은 안도를 하는 것 같았다.
-이얘기를 잃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니껴?
잘레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예를 들어 할머니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들에 사는 쥐와 집쥐 이야기를 들려줄 때 하고, 교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풍족하더라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사는 것보다 가난하더라도 맘 편히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얘기할 때와 같은 거죠. 누구 얘기가 더 오래 기억되고 그 뜻이 가슴에 와 닿을까요? 베흐자트 님이 니루샤의 이야기도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져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아오슈나르 님도 장황한 교설보다는 불새가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글이 아닌 말로 전해지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겠다고 했었거든요. 그걸 저를 포함한 남정네들은 자꾸 추상적인 말과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대중들이 귀를 내어주지 않는 거죠.
-그라마 울 어마이가 들려주던 동쪽 초원 이얘기도 잊아뿔먼 안 되겠니더!
맞은 편에서 계속 아베스라의 눈을 응시하고 있던 로샤낙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듯 말했다.
로샤낙은 사카(Sakā)4)로부터 내쳐진 떠돌이 당골의 딸이었다. 당골은 밤마다 잠자리에서 로샤낙에게 무가를 들려줬는데, 한 대목을 마치고 나면 초원의 신들과 위대한 당골들 그리고 그곳의 자연에 대해 말해줬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초원의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것 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는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고 그랬니더. 어매가 부르는 노래도, 말도 낯설고 두려웠니더. 어매는 둘만 있을 때면 내를 아이귈(Aygül)5)이라 불렀니더. 그게 진짜 내 이름이라며, '니는 초원의 달맞이꽃이여! 내가 부르는 노래를 잘 들어둬라잉, 이것이 너를 구원해 줄 거여!'그랬제요.
베흐자트와 잘레도 처음 듣는 얘기인 듯 놀라워했다.
-언니야! 아이귈이라는 이름, 너무 이쁘다.
잘레는 로샤낙의 손을 잡으며 '아이귈, 아이귈'하며 이름을 되뇌었다.
-우예 이름 이얘기를 한 번도 얘기를 않했능가 모르겄네. 그런 것도 모르고 내 철없이 툴툴거렸제?
아픈 얘기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실없이 웃으며 살았을 로샤낙이 잘레의 가슴에 아프게 다가왔다.
-괘않다. 내도 잊아뿔고 있었다. 시님이 여자들에게 전해지는 이얘기가 귀하다카니 생각이 났제. 그라고 내는 어매를 닮지 않을라꼬, 어매겉이 살지 않겠다고 그 이얘기를 까맣게 잊아묵고 살았는 갑네.
-내가 참말로 무심했제요. 십 년도 넘게 겉이 살면서 언제나 공사분별이 명확하고 사리판단이 정확해서 믿고 의지할라고만 했제, 당골이 어매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심 속에 이런 아픈 이얘기를 담고 있는 줄을 몰랐네. 여장부 로샤낙이 달맞이꽃 이이귈이었을 줄 누가 알았니껴.
베흐자트가 자책하듯 탄식했다.
-하이고 무신 말이라요. 여그 파르바르딘에 그런 아픔 하나씩 가지지 않은 사램이 어데 있는데? 여자들은 그런 이얘기를 숨가놓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제, 입 밖에 내놓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니껴.
로샤낙의 말을 듣고 있던 베흐자트가 고개를 돌려 아베스라를 쳐다보았다. 여인들의 가슴에 맺혀있던 아픈 이야기를 풀어헤치게 하고, 그 여인들을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전승자로 자리매김해 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스승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베스라 앞으로 자리를 옮겨 서서 허리를 굽혔다.
-시님, 시님이야말로 저희 여인들의 스승이시니더! 아께 로샤낙 언니가 한 말대로 여기 파르바르딘 아니 이 시상의 여인들은 말 못 하고 가심에 담아둔 아픈 이얘기를 하나씩은 개지고 있니더. 차마 여인들끼리도 풀어놓지 못하는 그런 이얘기도 있제요. 그란데 시님은 그 이얘기들을 저희들이 스스로 풀어내고 전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 주시니더. 그러니 적어도 여그 있는 세 여인의 스승이 아니겠니껴?
아베스라는 베흐자트의 행동에 놀라 벌떡 일어나 맞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시생은 그저 아오슈나르 님에게서 배운 바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분은 토판이나 석비 그리고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라 촌노와 여인들의 이야기 속에 보물이 들어 있다고 말했죠. 애초에 하란에서 우르 지방으로 방향을 잡은 것도 그곳에 전해지는 제국 이전의 이야기를 연구하기 위해서 였다고 들었습니다.
아베스라가 전하는 아오슈나르의 이야기에 여인들은 놀라워했다. 옛날이야기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흐자트와 로샤낙은 이야기가 지어지고 전해지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잘레는 이야기의 사실성과 원형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베흐자트는 다양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면모를, 잘레는 하급 서기관 계급의 젊은 여인이 가진 자유로운 상상력의 티가 묻어났다. 반면 로샤낙에게서는 당골의 서사무가와 당골 자신의 모진 삶을 한탄하듯 풀어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랜 구술청자(口述聽者)로서 이야기의 구조와 연행에 대한 감각적인 이해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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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술의 초식招式이나 투로套路를 통칭하는 말로 만들었다.
2) 늑대의 옛 돌궐(튀르크)어.
3) 천상의 자아(참된 자아) 혹은 수호자(수호자性)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메리 보이스의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에 따르면 초기 조로아스터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여성집단의 프라바쉬가 경배 되었다는 표현이 나온다.(공원국 번역, 민음사판 356쪽)
4)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곳에 살던 부족을 가리키기도 한다. 동이란계 유목민족이라 알려졌으며 스키타이와 같은 부족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지역이 겹쳐졌다고 여겨진다. 현재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다.
5) 돌궐의 말로 달처럼 아름다운 꽃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Ay(달) + gül(꽃).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