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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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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9

posted Jan 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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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스라는 물주머니 하나를 어깨에 대각으로 가로질러 메고, 좀 작은 물주머니는 허리춤에 묶고 토굴을 나섰다. 니루샤를 떠나올 때 귀슈탐이 준 삼나무 목장(木杖)이 길도 분명하지 않은 경사가 급한 암산을 디디며 내려가는 데엔 제격이었다. 샘을 찾으려면 아무래도 관목이 군락을 이룬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서인지 듬성듬성 바위틈을 비집고 서 있는 볼품없는 관목은 더러 보였지만 덤불진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하릴없이 박토에 매달리듯 솟아있는 키가 낮은 풀잎을 향해 목장을 휘둘렀으나, 거친 환경에서 억세게 자란 그것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베스라의 목장이 스쳐 지나가자 움츠렸던 잎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참을 내려가자 등고를 따라 희미하게 나 있는 길이 나타났다. 잦은 발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일정한 시차를 두고 지나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소금이나 동방의 차를 팔러 다니는 소규모의 낙타 행상이 지나는 길인지도 몰랐다. 아베스라는 길을 따라 걷다가 너덜너덜한 바닥 창만 남아있는 샌들 한 짝을 발견했다. 고단한 여행자가 미처 씻어버리지 못한 삶의 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낙타 발에 이겨졌던 길옆의 풀잎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등성이에 올라서자 반대편은 절벽에 가까운 사면이어서 길은 능선을 따라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베스라의 발끝에 채인 돌멩이 하나가 길을 따라 점점 작아지는 포물선을 그리며 튕기다가 사면 아래로 긴 여운을 남기며 떨어지고 비명 같은 신음을 남겼다. 내려다보니 땅이 들고 일어나 구릉을 이루며 절벽이 멈춘 곳에 제법 덤불의 꼴을 갖춘 나무들이 보였다. 어쩌면 작은 옹달샘 정도는 있을성싶었다. 아베스라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급사면을 이루며 내닫던 능선이 끊기며 일부러 감춰두고 있었다는 듯이 널따란 평지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엔 그을린 돌덩이와 타다 만 나뭇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낙타 행상들이 아궁이로 쓴 흔적 같았다. 그들은 모처럼 만난 평평한 땅에서 차를 끓여 마시고 난을 뜯어 먹으며 피곤한 육신을 달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궁이 주위로 일부러 바닥을 반듯하게 고른 듯한 지면이 보였다. 야영을 하기엔 더없이 맞춤한 곳이었다. 능선이 있는 경사면 반대편으로는 반원을 이루며 서 있는 벼랑이 급한 층계를 이루면서 치솟았는데 그 중앙부 아래엔 제법 관목들이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암벽 한쪽엔 수직으로 길게 이끼가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다른 곳보다 짙은 얼룩으로 보였다.

-하! 샘이 있겠구나.

아베스라는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자기연민 같은 희망을 느꼈다.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겨우 얻은 난 한 장을 뜯으며 이유 없이 흘러나오는 헛헛한 웃음과 비릿한 눈물에 목이 메어오던 때의 기괴한 희망 같은 것이었다. 

···물 말고, 다른 것을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베스라는 기이한 기대감 뒤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미심쩍은 불안감에 잠시 멈춰서서 덤불진 관목 사이사이를 뚫어져라 훑어보았다. 본시 어두운 곳이나 그늘 깊은 곳을 오래 보고 있으면 허상이 꿈틀꿈틀 움직이게 되는 법이다. 아베스라는 서둘러 눈길을 거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산지의 하늘은 강한 햇살에 푸른색이 허옇게 바래지고 해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던 선이 멀어질수록 단속적으로 찢기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아······

그는 목장을 굳게 디디고 두어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목장을 힘주어 잡고 관목 덤불과 물기를 머금은 이끼가 있는 벼랑 앞으로 갔다. 과연 이끼 사이로 세로로 길쭉하게 바위를 가르며 흐르는 석간수를 받은 옹달샘이 있었다. 세 뼘 정도의 폭과 팔 하나 정도 길이 그리고 팔꿈치가 잠길 만한 깊이의 샘이었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샘이었다. 아마 대상들 사이에서는 선배로부터 후배들에게로 전해지는 곳이었을지 모른다.

샘을 보자, 아베스라는 조금 전까지 머릿속 한켠에서 똬리를 틀고 호시탐탐 그의 전신을 지배하려던 미심쩍은 불안감 따위는 잊었다. 그가 바위틈을 흐르는 석간수 옹달샘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알 수 없는 신비감이 석벽에서 풍겨 나오는 미세한 냉기를 타고 가슴께를 서늘하게 했다. 초원의 도량에서 가을의 새벽바람을 맞으며 안행할 때 새겨진 그 서늘함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는 옹달샘을 감싸 안고 있는 낮은 돌무지에 목장을 내려놓고 어깨에 두른 양피 물주머니와 허리춤의 물주머니를 끌렀다. 고맙게도 샘가의 관목 아래에 투박한 목기 바가지가 바짝 마른 상태인 채 놓여 있었다. 아베스라는 목기 바가지로 수면을 두어 번 휘젓고는 절반쯤 채워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물은 내장까지 청량한 기운이 전해질 정도로 시원했다. 알싸한 맛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천천히 달큰한 맛으로 혀를 감싸 안는 게 일품이었다. 그는 모처럼 입안에 가득 차오른 안온한 촉촉함으로 행복해졌다.

-이건 뭔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편안함이로다. 육신이 해체되는 듯한 기이한 편안함이라니······

아베스라가 중얼거리며 다시 바가지에 입을 대려고 할 때였다. 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내동댕이쳐졌다. 느닷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목이 졸리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숨이 막혀오자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조르는 어떤 힘을 떼어내려 발버둥을 쳤지만, 오히려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함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컥, 컥······

억센 힘에 막힌 기도가 들숨을 차단하자 날숨이 기도의 벽을 찢듯이 간신히 틈을 만들며 단말마가 터졌으나 그도 잠시였다. 경동맥의 혈류가 차단되자 얼굴은 급격히 상기되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죽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쉬익, 쉬익······

저승 문이 열리려는 순간 갑자기 목에 가해지던 힘이 풀렸다. 그의 몸에서는 한껏 공기를 담고 있던 양가죽이 박힌 송곳을 튕겨내며 내뿜는 소리가 났다. 졸렸던 경동맥이 열리면서 혈류의 흐름이 시작되자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지러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러나 시야가 뿌옇게 열리려는 순간 다시 목졸림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고통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 육신의 모든 스위치가 곧바로 해제되면서 다른 세계로 전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목 졸림의 고통은 감각이 마비되어 느낄 수조차 없었지만,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강렬한 자극에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허상과 실상을 분별하지 못하면, 지 몸뚱아리도 지께 아닌 겝지.’

돌연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의 모습이 도무지 마땅치 않을 때 돌아앉아 혼잣말처럼 벽에 대고 던지던 그 목소리였다. 

아베스라는 스승의 목소리가 들리자 섬광에 안구가 찢기는 충격을 느끼며 벼락에 감전되듯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파편처럼 조각 나 있던 정신이 강한 자력에 일제히 들러붙는 쇳조각처럼 모이자 육신에 가해지던 일체의 자극이 사라졌다.

-빌어먹을 마구니 새끼······

그는 그대로 누워 심호흡으로 혼란에 빠졌던 육신을 달랬다. 

···초원의 도량에 계신 스승은 지금 내가 허깨비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걸 아신 게라. 

스승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사태를 볼 수 있었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내 공부야말로 여태껏 그림자를 쫓아 허둥거려온 허망의 사태였구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바랜 코발트 색 보자기가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것을 보는 것은 인간의 눈일 것이요, 하늘이야 구겨지고 말고 할 것이 없을 것이니 귀결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인간의 마음이다. 마음에 때가 끼고 구겨지니 세상의 상이 흐려지고 쭈글쭈글 우그러져 보이는 게고······, 마구니가 끼어드는 게지. 빌어먹을······, 나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인가.

문득 조막만 한 구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짙은 회색을 띤 구름은 빠르게 내려오면서 검고 둔중한 솜뭉치가 되었다.

-끙, 저 마구니 새끼가······

아베스라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엄청난 무게가 그의 몸을 덮쳐 누르며 옴짝달싹할 수 없게 하였다. 아베스라는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모았다. 벼린 정신의 끝을 그의 몸을 덮은 거대한 어둠의 심장을 향해 겨누고 힘껏 찔러 넣었다. 쩍! 하고 질기디질긴 가죽이 찢기며 단단한 살을 뚫고 들어가는 예리함의 감촉이 그대로 아베스라의 몸에 전해졌다.

···크억! 빌어 처먹을 바스나의 아들놈······

악마의 탄식이 허공에 흩어지며 아베스라의 몸에 드리웠던 중량감이 해소되었다.

아베스라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목장을 집어 들었다. 오른손으로 목장의 3분의 1지점을 굳게 움켜쥐고 왼손은 목장의 끝에서 한 뼘 정도 안으로 밀어 가볍게 쥐었다.

···그럴 것 없다. 이번에도 네가 이겼다. 그러나 아베스라여! 너는 이미 세상의 꿀물을 맛보았다. 이곳에 와 처음 맛본 저 샘물이 그것이다. 말라서 생명이라곤 싹 틀 기미조차 없던 황무지, 네 혀끝에 적셔진 것은 샘물이 아니라, 네 육신이 은밀하게 갈망하는 세상의 영화와 다르지 않다. 내가 그것을 네게 줄 수 있다. 나를 네 신으로 인정하는 순간 너는 세상 제일의 부요와 영화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악마는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며 아베스라를 위무하였다.

-터무니없구나. 사악한 마구니여. 너는 상대를 잘 못 골랐다. 내 수행이 부족하여 아직까지도 네놈들의 시험을 받고 있으나, 한 번도 곁길로 나가본 적이 없는 수행자다. 아둔하여 공부는 더디고 자주 절망을 샘물 삼아 들이키곤 하였으나, 북극성처럼 빛나는 그곳을 향한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었으니, 몸은 진리의 외피를 덧댄 지 오래고 핏속엔 묽게나마 그것의 맛이 흐르는도다! 그러니 육신이 찢겨지고 정신이 녹아 사라진들 네 놈의 발아래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무익하기만 한 허상이여, 씨앗조차 남기지 말고 화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질지어다! 카악!

아베스라는 단호한 어투로 악마를 꾸짖고 있었으나, 실상은 자신에게 던지는 경계의 언사였다. 그는 여전히 안갯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나타난 악마는 그의 태만을 질책하고 정진을 촉구하는 또 다른 스승일 수 있을 터였다. 털썩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꺼져라, 뒤틀린 악의 전사여! 네가 내게서 얻을 것은 없느니,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

치욕을 견디는 것이 새로운 출발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아베스라는 목소리를 높여 악마를 내쳤다.

···오늘은 네가 나를 극복하였으나 완전히 이긴 건 아니다. 인간의 한계는 태만과 망각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끊임없이 자라는 자만에 있음을, 그래서 각자(覺者)라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무너져갔는지를 보아서 안다. 우리는 그 틈에서 생겨나고 지배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하하하, 내가 말이 많았도다. 아베스라여! 나는 네가 모르는 네 급소를 알고 있느니······ 흐흐흐, 곧 다시 보자. 

악마는 작은 짙은 회색 구름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낮게 웅웅거리는 허무를 담은 목소리를 남기고 허공중으로 사라져 갔다. 

-빌어먹을······ 마, 구, 니······

아베스라는 목장을 내던지고 벌렁 누웠다. 파란 하늘은 여전했으며 관목 덤불 사이를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태연했으므로, 악마에게 목을 졸리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투를 벌인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현상일 것이었다. 설령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눈에 악마가 보일 리 만무했을 것이고,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베스라의 모습을 보았다면 미친 떠돌이의 발광쯤으로 치부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수행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일 뿐이로구나. 마치 세상을 구할 것 같은 혹은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품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그렇다면 지혜의 스승들이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행동을 변화케 한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들의 변모가 세상 사람들이 가지 못한 길을 가고 다다르지 못할 경지에 이른 사람에 대한 존숭과 모방행위의 결과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다. 그가 던지는 말의 힘인가? 말······말이라······

한바탕의 쟁투로 노곤해진 육신 때문에 의식마저 후줄근하게 늘어지면서 시간의 흐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때 절벽으로 단절된 오른쪽 하늘에서 수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정신이 번쩍 든 아베스라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누워있다가는 꼼짝없이 사체로 오인되어 수리의 공격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으되 죽은 몸뚱이를 가졌으니 수리가 두려운 게로구나! 

그는 중얼거리며 샘가로 갔다. 벗어 두었던 양피 물주머니에 물을 부어 넣고는 주둥이를 틀어쥐고 마구 흔들어 헹구어 냈다. 그리고는 바가지에 물을 떠 물주머니를 채워갈 쯤이었다. 그가 지나온 능선을 타고 내려와 좁은 평지에 들어서는 입구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정확히 인지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베스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쨌든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물주머니를 둘러메고 허리춤에 묶었다. 물을 채운 양피 주머니의 무게가 허리와 무릎에 전해졌다.

본래는 흰색이었을 누렇게 퇴색한 일자형 원피스에 검은색 허리띠를 넓게 두른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나이 든 여자와 붉은 원피스에 흰색의 넓은 천으로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께를 둘러 묶은 수줍은 듯 생기가 넘치는 젊은 여자였다. 젊은 여인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진회색 토기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그들이 여성들이라는 것을 보아 알게되자, 아베스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서둘러 토굴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인들의 곁을 스쳐 지나며 가벼운 합장을 하고 잰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저, 시님?

나이 든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낮고 기름진 목소리였다. 

아베스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입성을 보네께네 우덜 마구쉬 님은 아이니더. 분명 동방에서 오셨니더. 글치요?

여인은 기어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릴 모양이었다.

-여행 중이시니껴?

여인은 어느새 아베스라의 코앞에 서서 아주 질겨 보이는 눈길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갑자기 물주머니의 무게가 무릎에 쏠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서둘러 여인의 말을 끊어내지 않으면 긴 시간 흐름 위에서 현기증을 경험할 것 같았다.

-시생, 아그레의 수행자로 만행 중이나······

-만행? 신두 강 너머에서 오셨니껴?

아베스라는 여인이 자신의 말을 끊어내자 자신이 말을 잘 못 꺼냈다는 것을 알았다. 

-정처도 없이 떠돈다는 말 아입니껴······ 행각승인 갑네요.

젊은 여성이 아베스라를 흘깃 보더니 나이 든 여인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듯 말했다. 

-슈라마나(sŕamana)1) 중이시니껴?

-아닙니다. 시생은 아그레의 수행자로 만행하고 독공도 하긴 하지만 슈나마나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아베스라는 여인의 말에 손사레를 쳤다. 여인이 슈라마나를 입에 올릴 정도면 신두강 너머의 수행자들을 접촉했거나 그들의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서늘한 눈매가 깊게 느껴졌다. 누추한 옷차림을 보고 섣불리 판단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그레는 어떤 가르침을 전하니껴? 시님만 괘안으시다믄 저 집에 초대해서 말씸을 듣고 싶은데 어떻겠니껴?

여인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아베스라를 바라보았다. 

아베스라는 당황했다. 예기치 않은 사태였다. 그는 아직 대중 앞에서 설강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생······, 아직 공부가 미진하여······, 대중 앞에······

-괘안니더. 지 집에 머무르시면서 법문을 정리하시면 되지 않겠니껴? 지가 일 년에 한두 번 교사(敎師)를 모시고 가르침을 청하는데, 이번에는 시님이 하시믄 딱 좋겠니더.

아베스라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여인은 다시 한번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단정하듯 말하였다.

-지금 어데 계시니껴?

여인은 당장이라도 그를 데리고 돌아갈 태세였다.

-시생, 저 산 위의 토굴에서 수행 중입니다만······

-아, 씨름 바위 밑 동굴 말이니껴? 거게서 도인이 여럿 나왔니더. 옛날에 도인이 수도를 하고 있는데 귀신이 찾아와 ‘여는 내 집이라’카멘시리 시비를 걸어왔니더. 그래 밤새도록 씨름을 했다 안 합니껴. 겔국엔 도인이 이깄는데 그라고 나서 도를 얻었답디더. 오늘 시님을 만낸 것은 참말로 맞춤이시더.

여인의 태연한 단정에 아베스라는 퇴로가 닫혀 있음을 깨달았다. 

‘시험에 들었다면 맞닥뜨려 해결하든지 아니면 회피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를 풀어버린다면 다시 그 문제를 마주하지 않을 것이나, 도망한다면 언제든 다시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 직면하여 보자.’

아베스라가 마음의 방향을 정하고 고개를 들어 토굴 쪽을 바라보았다. 토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씨름 바위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구름이 서녘의 햇살을 받아 뚜렷한 음영을 만들면서 발그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시생의 바랑이 토굴에 있습니다. 그걸 가지러 갔다가는 날이 저물 것이니, 내일 댁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베스라가 목장을 쥔 채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라모 내일 아침 두 번째 시각에 쟈가 마을 입구에 서 있을 낍니더. 쟈는 이름이 잘레(Jaleh)이고, 사람들은 우리 집을 파르바르딘(Farvardin)이라고 하니더. 

여인은 자신이 아베스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토기 항아리에 물을 길어 걸어오고 있는 젊은 여인을 가리키며 아베스라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잘레라고 불리는 여인과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내일 저 시님이 마을로 내려오리라는 보장이 어데 있니껴?  

젊은 여인이 힐끗 뒤돌아보며 나이든 여인에게 물었다.

-수도하는 시님이 헛말하겄나? 그라고 눈을 보이 빈말은 몬 할 사람인기라.

-눈이요? 눈만 보고 그걸 우째 아니껴?

-보마 안다!

두 여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지는 사이, 아베스라도 서둘러 능선 길을 타기 시작했다.

-시님요, 무거우께네 큰 기는 나뭇가지에 묶아 놓고 가소. 내일 내리 오면서 가지고 오마 안 되겄니껴?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아베스라의 뒷통수에 꽂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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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인도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류의 수행 전통을 가리킨다. 제사 중심의 베다와 브라만 전통에 대한 자성 운동으로 일어난 수행 방법이다. 현대에도 자이나교의 중요한 수행 전통이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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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1

    흑암 속으로 잠겨버리고 싶었다. 모래를 반사하며 빛나는 작은 빛조차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얇은 꺼풀을 통과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어서 케피예로 눈을 둘러 머리 뒤에서 묶었다. 그러나 눈을 막는다고 망막을 통해 들어온 사실에 대...
    Date2025.05.14 By관리자 Views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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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0

    굴바하르가 돌아오고 열흘쯤 뒤였을 것이다. 행정관 카마란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읍내를 떠도는 유녀 십여 명을 니루샤에서 받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읍청으로서는 니루샤가 정기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정중하고도 간...
    Date2025.04.08 By관리자 Views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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