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녀의 목소리를 지우고, 내 안의 숨을 쉬는 자유
어릴 적 나는 줄곧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의 미소를 보기 위해 투정을 참았고, 선생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 내가 진짜 원하는 것보다 어른들이 원하는 선택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인 줄 알았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오늘의 내 삶은 온전히 내가 선택한 자유로운 삶이었나?"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참자기(True Self)'와 '거짓자기(False Self)'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세상에 태어난 아주 어린 아기는 처음에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기에게 엄마는 곧 세상의 전부다. 이때 엄마가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수용해주면 아이는 안전하게 참자기를 키워나간다. 존재 자체로 환대받는 경험, 이것이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누리는 가장 원초적인 자유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아이의 욕구보다 자신의 요구를 앞세운다면, 아기는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한다. 내 욕구를 지우고 타인의 욕구에 맞추는 비극적인 착각, 즉 '거짓자기'가 탄생한다. 위니콧은 이를 세상에 대한 과도한 '순응(Compliance)'이라 불렀다. "엄마가 기쁘면 나도 기뻐"라는 생각은, 사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나약한 아이의 슬픈 선택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계의 비극은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잔혹한 동화 속 마녀들은 사실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왜곡된 양육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백설공주의 새엄마는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지 못했다.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자신의 탐욕으로 백설공주를 격렬한 '시기(Envy)'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화 속 백설공주가 새엄마의 위협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치고 일곱 난쟁이의 집에서 숨어 지내야 했던 행동은 새엄마라는 무서운 마녀 앞에서 자신의 참자기를 숨기기 위한 눈물겨운 순응이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집의 마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달콤한 과자와 따뜻한 침대를 제공하며 보살펴주는 듯하지만, 결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살을 찌워 자신의 도구로 잡아먹으려 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이 마녀들처럼 아이를 존재 자체가 아닌, 자신의 불안을 해소할 도구나 소유물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존재한다. 그 달콤한 통제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내면화된 마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녀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라고 착각한 채 거짓자기로 살아간다. 부모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고, 사회가 정해준 안전한 역할(딸, 아들, 부모)의 가면을 쓴 채 "이것이 내가 원한 삶"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동화 속 주인공들은 마냥 무기력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도 눈부신 반전과 빛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백설공주는 독사과를 먹고 쓰러졌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일곱 난쟁이와 왕자의 도움으로 다시 눈을 떴고, 헨젤과 그레텔은 무서운 마녀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서로를 지켰다. 우리 삶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다시 눈을 뜰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보이지 않는 창살 없는 감옥 같을지라도, 백설공주의 목에 걸린 독사과를 뱉어내게 도와주듯이,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얀 조약돌이 달빛에 빛나주듯이,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위한 진정한 타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참자기를 믿고, 이 떨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흔히 동화의 결론인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을 기대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반전은 결말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피엔딩은 내 삶을 지배하던 내면의 목소리가 마녀의 속삭임에서 나의 목소리로 바뀌는 그 순간에 찾아온다. "이걸 해야 부모님이 기뻐하겠지", "남들이 나를 착하게 보겠지"라는 마녀의 음성을 걷어내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거짓자기의 가면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다해내면서도 그 중심에서 '나'라는 고유한 존재를 잃지 않는 것, 타인의 시선이라는 오래된 감옥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위니콧이 말한 참자기를 찾는 여정이자, 내가 마주하고 싶은 진정한 '자유'이다.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유는, "나는 나다."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말 안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