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퀸틴 마시스(Quentin Massys)의 '그로테스크한 늙은 여인 (The Ugly Duchess)'에 대한 미술평론가 유경희씨의 2014년 1월 13일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칼럼에서 유경희 평론가는 이 그림을 통해 '노년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여성성을 잃어버린 늙은 여자의 꽃단장은 인생의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림의 해석은 '그로테스크한 늙은 여인'은 당시 사회가 노년 여성에게 요구하거나 투영했던 외모 집착과 허영심을 비웃는 풍자화의 성격이 강하고 과장된 머리 장식과 화려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늙고 추한 외모가 상쇄되지 않는 모습이 대비를 이루며, 이는 인생의 덧없음(memento mori)을 상징하기도 한다.
노년 남성과 여성의 대비를 기를란다요의 '노인과 손자' 같은 작품 속 노년 남성이 세월의 흔적을 가진 채 존중받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노년 여성은 아름다움을 잃은 것에 집착하는 조롱의 대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여성혐오(misogyny)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유경희 평론가는 이러한 그림을 보며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 노년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닌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아름다운 노년'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 그리스인 조르바라면, 꽃 같던 시절을 잊지 못해 늦은 오후가 되면 창가에서 오지 않는 남정네를 기다리는 늙은 창녀를 보고, "어찌 저 여자를 사랑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라면 이런 여자를 품어주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늙은 창녀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숭고한 연민으로 느껴졌고, 나도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마음으로 자유롭고, 따뜻하고, 넉넉한 상담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노인복지관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로 노년의 여성과 남성을 만난다. 평생을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 '어느 조직의 임원', '능력 있는 전문가' 등 자신이 수행하던 역할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 오셨던 그분들은 은퇴나 자녀의 독립, 건강 악화 등으로 인해 그 역할의 옷이 벗겨지는 순간 깊은 정체성 위기를 겪는다. 직업적 성취와 권위가 사라지면서 사회적 관계망이 끊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며, 잃어버린 '명함' 대신 그저 '나'라는 존재만 남았을 때 느끼는 막막함과 공허함이 노년의 이분들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
다시 조르바의 사랑이 필요하다. 조르바가 늙은 오르탕스에게 보여준 사랑은, 바로 이 '역할 없는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다. 조르바는 오르탕스의 '창녀'라는 사회적 꼬리표나, 잃어버린 '아름다움'이라는 역할을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혐오와 편견 없이 오르탕스라는 인간의 생명력과 본질만을 보았다.
사회적 역할의 상실, 노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 외모와 자존감, 내면의 가치 등 모든 상실을 겪어낸 그분들을 상담자로서 담담하게 껴안고 조르바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나의 걱정과 달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시는 많은 노인분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주도권을 스스로 결정하길 원했다. 자신의 마지막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존엄을 지키고, 남겨질 가족을 배려하려는 용기 있고, 사려 깊은 마음으로 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셨다. 막연한 불안감 대신, 다가올 죽음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정리된 마음으로 준비된 일종의 '인생 숙제'를 마무리하는 그분들이 진정한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나의 역할이 필요치 않은 홀가분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용감하고 자유로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