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의 추모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와 故 강태완 산업재해사망 1주기
11월 2일은 천주교 위령 주일이었다.
평화바람이 무안공항에 간다기에 오전 11시 30분까지 군산으로 갔다.
무안공항은 작년 12월 29일에 참사가 나고 3주 후인 1월 19일에 혼자 조문하러 갔던 곳이었다. 겨울학기 매일 수업 기간 중 심야에 참사 소식을 알았다. 다음 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묵념을 했고, 종강하자마자 200km를 달려갔었다. 다음 날 올라오는 길에 전주 전북특별자치도청 앞 제26차 새만금 생태계 복원 기원 마지막 월요 미사에 갔었다. 그 월요 미사를 반년 전인 7월 22일부터 매주 봉헌했던 평화바람은 올해 8~9월 전주에서 서울까지 새,사람행진에서 유족을 만난 후 추석에 무안공항에 갔다. 그리고 11월 첫 주에 무안과 광주와 전주 등지와 연합해 미사를 열었다. 그렇게 2025년 11월 2일 토요일 정오에 평화바람 차를 타고 문정현 신부님, 완두, 오이, 딸기와 함께 무안공항으로 향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첫 추모 미사에 100명 넘게 모였다.
미사 중에 유독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있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분에게 다가오시더니 손을 뻗어 달래셨다. 엄숙한 미사 중에 이동하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슴 아픈 인물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예수님이 연상됐다. 그 여인은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협의회 2기 김유진 대표였다. 그분이 눈물로 발언했다.
"……그러나 저희 유가족들은 혹시라도 그분들이 돌아가신 이유가 저희가 지은 죄 때문에 (울음) 저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10개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참사와 마찬가지로 저희 참사는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고 10개월간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정부는 오히려 덮으려고만 하고 단순히 교통사고 정도로만 치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순간은 저희 가족들이 돌아가신 이유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저희의 죄로 인한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또 누군가의 불행을 막고 여기 계신 분들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일들이 되도록. 그것만이 저희가 위로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저는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는 남동생까지 세 분이 모두 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야기가 가장 슬픈 이야기가 아닌 게 마음이 아픕니다. 저희는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할지 (울음) 응원해 주시고 이 사고가 잘 밝혀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힘을 보태주시고 앞으로도 같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에 맷돌 하나 내리누른 듯했다. 진상규명 촉구와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부르짖는 분노가 아니라 자책이라니. 유족의 죄책감은 피해자 심리 중 대표적인 하나이다. 나 역시 과거에 어처구니없는 의료사고로 인한 유족이었다. 슬픔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은 합리화를 위해 자학으로 변하기 쉽다. 참사의 이유가 밝혀지지 않을 때,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을 때 결국은 가장 손쉬운 자신을 벌하는 참담한 심리. 그래서 참사는 사망자와 부상자만의 사고가 아니다. 일련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에게까지 미치는 피해를 환산하면 피해자는 179명에서 1,790명, 17,900명, 179,000명……. 그렇게 미처 잡을 수 없는 물살처럼 확산된다. 세월호 참사 때 전 국민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은 것처럼. 그러므로 참사는 반드시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특히 국민재난안전사고는 더더욱. 그런데 저열하고 잔혹한 인간들은 유족에게 2차 가해를 한다. 보상금 때문에 저런다고.
문정현 바르톨로메오 신부님은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유족들이 외칠 때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고 하셨다.
"……보상 문제 한 마디도 안 나오던데? 진상을 밝혀라. 진상을 규명하라. 그 얘기만 했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찬미받으소서>에는 우리 교회가 이런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외면해선 안 된다, 함께 아파해야 한다, 그런 말로 꽉 차 있습니다.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왔어도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마는 그렇더라도 이 아픔을 외면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더 크게 위로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은 무안에 그냥 오지 않으셨다. 참사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글귀를 새긴 서각을 만들어 전달하셨다.
'힘을 내어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아직 1주기도 되지 않은 유족이 어떻게 힘을 낼 수 있을까. 무너진 마음을 어떻게 굳게 가질 수 있을까. 그리되기를 강복(降福)하는 신부님들의 마지막 기도 후 해남의 나무는 공선옥 작가 시 낭송에 맞춰 키보드를 연주했다. 이어 노래도 했다. 지난겨울, 동안거(冬安居) 중 무안공항 참사 소식을 듣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나무. 이제야 그 애가(哀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무와 공선옥 작가
무안으로 가는 길에 혼자 속으로 이번 위령 미사를 기점으로 1주기 때까지 매주 미사를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미사 후 신부님들과 유족들이 의논하더니 정말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미사가 추진되었다.
올라오는 길에 사고 현장을 지나쳤다. 둔덕이 그대로 있었다. 어느 기사가 기억났다.
경향신문 1월 21일 자에 따르면, '올 1월 21일 손창완 전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손 전 사장은 21일 오후 6시 3분쯤 경기도 군포시 아파트에서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신고했다. 경찰은 외부 침입 흔적 등의 타살 혐의점은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대학장 출신의 손 전 사장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2018년 12월부터 2022년 2월까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지냈다.
한국공항공사는 2020년 무안국제공항의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 개량 공사 설계용역을 발주했다. 개량 공사는 2023년 9월부터 2024년 2월까지 진행됐다.
무안공항의 콘크리트 둔덕 위 방위각 시설은 지난해 12월 29일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의 피해를 키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국토부는 올해 4월 30일 '항공안전 혁신방안'에 따른 전국 7개 공항의 방위각 시설 개선 작업을 내놓았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앞두고 제일 먼저 포항경주공항에서 8월 25일부터 9월까지 둔덕을 철거하고 경량 철골로 교체한 방위각시설(로컬라이저) 기초대 개선공사를 했다. 더불어민주당 맹성규 의원실 제공 자료를 보니 현재 포항·경주와 광주공항만 철거가 끝났고, 여수공항은 콘크리트 둔덕은 철거했지만 4m 둔덕이 존재하고, 사천과 김해공항은 콘크리트 기초대 제거, 제주공항은 H형 철골 교체로 2026년 8월 착공 예정이다.
지난 10월 20일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지난 4월 사고 110일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12·29 여객기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반쪽짜리란 것을 알게 된 유가족들은 5월 협의회를 구성했다. 특별법에는 진상규명에 대한 내용은 없이 추모와 지원에 관한 것만 담겼다. 김유진 협의회 대표는 "10개월 기다린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의 조사 결과가 '조종사의 과실이다'뿐이었어요. 관제 기록 일부, 관제사와 조종사 통화 기록 일부만 보여주면서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국토부 소속 사조위가 어떻게 제대로 (국토부에 대한) 조사를 하겠어요. 아직도 전국 공항에 둔덕은 그대로 있어요"라며 사조위를 국무총리실로 이관할 것과 독립 조사기구 구성, 유가족의 조사·검증 참여 보장 등을 강조했다.'
공항 길 건너는 습지였다. 철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습지. 그곳은 갯벌이었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정식으로 하지 않고 건설에 급급한 국토부가 애초에 잘못 선정한 공항 부지는 원래 철새도래지였다.
올 1월 13일 월요일 전북도청 앞 오후 3시 제25차 새만금 생태계 복원 기원 월요 미사 후 새만금신공항공동행동 김나희 홍보국장이 2024년 12월 29일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애도로 시작한 발언이 새삼 떠올랐다.
"무안공항의 환경영향평가서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들이 발견됐어요. 원래 조류 충돌은 미리 조사해서 조류 충돌이 별로 없어야 하는 지역에 공항을 지어야 안전할 텐데 (중략) 무안공항은 겨우 9일 했고, 몇 마리인지조차 제대로 기록이 안 되어있고, (비행) 높이와 방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사 대상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조류 서식지가 있는지도 조사도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사고가 난 다음 날에 조류 전문가와 함께 가서 봤더니 그냥 가창오리가 20만 개체가 한 번에 날아가는 게 보이는, 그런 어마어마한 조류 서식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지도에서 무안공항을 보시면, 그냥 바로 앞에 무안갯벌이 붙어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 법에도 8km 이내에 조류 보호구역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우리나라 법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무안공항 인근에 그런 여러 가지 보호구역이 9개가 있고요.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인 신안갯벌도 8km 이내에 있고 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안갯벌도 1km 이내에 있습니다. 조류 서식지 바로 위에 공항을 지은 거예요.
새들이 살고 있는 곳에 공항을 지어놓고 조류 충돌이 일어나니까 조류 퇴치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 새들은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멸종위기종이거든요. 법을 어겨가면서 공항을 엉터리로 지어놓고 이 새들을 퇴치해야 한다, 멸절해야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고요.
새만금신공항, 제주제2공항, 흑산도공항, 백령도공항, 서산공항, 가덕도공항까지 8km 이내, 좀 더 넓게는 13km 이내에 조류서식지가 없어야 하는데 없기는커녕 조류서식지 자체 위에 공항을 짓고 있습니다. (하략)"
철새들이 가득한 곳에 공항을 지어놓고 콘크리트 둔덕을 만들고는 조종사의 과실이라니. 많은 이들이 보도를 통해 조종석 기장의 최후 모습을 보았다.
2025년 1월 2일 YTN 보도에 따르면, '사고 당일이었던 12월 29일 오전 9시 3분,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 2216편 기장 한 모 씨(45)는 6,800시간이 넘는 비행 경력을 가진 공군 출신의 베테랑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안전에 대해 타협하지 않던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조류와 충돌한 비행기를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착륙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팔을 뻗은 기장의 모습이 영상과 사진으로 버젓이 남아있는데 그의 목숨 건 책임감에 무슨 모욕이란 말인가.
(필자는 KBS <시사기획 창> 2025년 4월 29일 방영분 추적보고서 1부 '4분 7초'와 5월 6일 방영분 추적보고서 2부 '치즈의 경고' 시청을 권한다.)
사고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기 위해선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와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 및 관련자 모두 진실의 거울에 자신을 정직하게 비춰야 할 것이다.
무안공항 참사 현장
11월 8일은 故(고) 강태완 1주기 추모일이었다.
작년 11월 8일, 다섯 살 때 몽골에서 엄마 따라와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26년을 살아온 강태완이 5년 근무 한국 국적 취득 조건으로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특장차 제조업체에서 일하다가 8개월 만에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와 친구가 엄동설한에 회사를 상대로 외롭게 싸우던 겨울 12월 2일, 전주 전북특별자치도청 앞 제19차 새만금 생태계 복원 기원 월요 미사에서 그들을 만났다. 8일 후인 12월 10일에 다행히 노사합의가 되어 35일이나 미루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나는 12월 15일 산본 원광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태완을 만나자마자 보냈다. 그렇게 잘 끝난 줄 알았다.
1년이 지났다. 사망일 하루 전인 11월 7일 오후 1시 국회 소통관에서 고 강태완 님 1주기 추모 기자회견이 있었다. 11월 8일 오전 11시에는 산본 정각사에서 유족과 지인이 1주기 기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2025년 11월 11일 화요일 오전 11시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청년 노동자 故 강태완(TAIVAN)님 1주기 중대재해 신속 수사 촉구 기자회견이 있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들이 있던 것이다. '강태완을 추모하면서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일들을 상기하는 자리' 셋 중 나는 전주로 갔다.
먼저 고인의 친구 김사강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이 경과보고 및 수사 촉구 발언을 했다.
"2024년 11월 8일, 전북 김제시 소재 특장차업체 HR E&I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32세 청년 노동자 강태완(몽골명 Purevtseren Taivan) 님이 산재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강태완 님은 HR E&I가 산업통상자원부의 예산을 지원받아 개발 중이던 10톤짜리 텔레핸들러를 시험하기 위해 해당 장비를 리모컨으로 조작하며 이동시키다가 경사로에서 미끄러지는 장비와 뒤쪽에 줄지어 야적되어 있던 고소차 사이에 끼어 숨졌습니다. 강태완 님이 HR E&I에 입사한 지 8개월 만에 벌어진 끔찍한 재해였습니다.
사고 순간이 담긴 CCTV 영상과 현장을 목격한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 당시 강태완 님은 리모컨으로 텔레핸들러의 방향을 전환하려고 했지만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강태완 님의 기숙사에 있던 주간 회의록을 확인한 결과, 텔레핸들러와 리모컨 사이에 통신 단락 현상이 수시로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며 통신 단락을 대비해 긴급정지 기능을 추가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일까지 긴급정지 기능은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는 회사가 그러한 상황에서 텔레핸들러를 경사로에서 이동시키도록 하면서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충분한 작업 공간도 확보해 놓지 않았던 것이 강태완 님을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강태완 님의 산재 사망 사고는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만 다섯 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경기도 군포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성장기를 보내고 고교 졸업 후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지내다가, 가까스로 체류자격을 얻고 대학을 졸업한 후 안정적인 체류자격을 얻고, 영주권을 따고, 귀화하기 위해 전북 김제로 내려왔던 강태완 님의 고군분투기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강태완 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한 달이 넘도록 사과와 합의를 거부한 HR E&I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강태완 님의 산재 사망 사고의 진상이 밝혀져 책임자가 처벌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강태완 님이 떠난 지 1년이 넘도록 아직 고용노동부의 중대재해 조사는 마무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는 강태완 님이 산재로 사망한 지 6일째 되던 2024년 11월 14일, 이곳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강태완 님의 산재 사망 진상조사 촉구 기자회견을 가진 바 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저희는 지청장 면담을 가졌고, 그 자리에서 중대재해 수사 절차를 따라 최대한 신속하고 철저하게 원인을 파악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문의한 결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 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길어지면 2~3년도 걸릴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오늘 다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강태완 님은 충분한 작업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긴급 정지 기능과 같은 필수적인 안전장치를 장착하지 않은 장비를 시험하다가 끼임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HR E&I의 안전 불감증에서 기인한 명백한 인재입니다. 강태완 님의 산재 사망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이러한 터무니없는 인재로 또 다른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의 수사는 철저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루빨리 중대재해를 초래한 책임자가 처벌받고 구체적인 재발 방지 대책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 정부가 강태완 님의 비극적인 죽음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故강태완 님 1주기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 기자회견
이어 이민경 민주노총전북본부장과 박영민 민주노총전북본부 법률지원센터 공인노무사가 발언했다. 마지막으로 고인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저는 강태완의 엄마 엥크자르갈입니다. 지난 토요일은 제 아들 태완이가 산재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된 날입니다. 아들의 첫 제사를 지내는 제 가슴은 너무도 아팠습니다. 아들이 제 옆에 없다는 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태완이는 저 때문에 비자 없이 살았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도 갈 수 없었고, 핸드폰도 못 만들고, 카드도 못 만들고, 운전면허도 딸 수 없었어요. 한 마디로 젊은 사람답게 살 수 없었어요. 하지만 태완이는 한 번도 저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정말 착하고 듬직한 아들이었어요.
태완이는 서른 살이 돼서야 겨우 비자를 받을 수 있었어요. 비자를 받고 대학에 가서 전자공학을 공부했고, 졸업하고 나서는 자동차 회사의 연구원이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26년을 같이 살았던 경기도 군포가 아니라 전북 김제에 가서 취직했어요. 전북 김제에 가면 5년 안에 영주권을 따고 귀화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 아들이 취직한 지 8개월 만에 산재사고로 사망했어요.
태완이가 취직하고 나서, 저는 태완이랑 전화할 때마다 일이 위험하지 않은지 물어봤어요. 태완이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어요. 저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 아들이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저는 정말 알고 싶어요.
지금 태완이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났는데 노동청에서는 아직 조사 중이라고만 해요. 2년이 걸릴지 3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해요. 내 아까운 아들이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잘못한 사람을 감싸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조사가 오래 걸리는 건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답을 해주면 좋겠어요. 또, 회사에서는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는데, 무슨 대책을 어떻게 세웠는지도 모르겠어요. 회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려주면 좋겠어요.
태완이는 죽었지만, 다시는 누구에게라도 태완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고, 잘못한 사람이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그렇게 해주세요."
강태완 어머니와 친구
기자회견문 낭독으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강태완 어머니의 제안으로 함께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어머니는 또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하셨다. 외아들 없는 빈집에서 텅 빈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밥과 차를 사주며 이야기하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 그이는 아들의 휴대전화기를 사용하고 계셨다. 그 전화기에는 아들의 추억이 아직도 체온처럼 남아있을 터.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애달픈 모정이 느껴졌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 어머니 허리춤에 매달린 아들의 것이자 어머니의 것이 된 휴대전화기에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전주 독립책방 토닥토닥 주인과 고객들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설이면 산본 댁까지 가서 몽골 만두를 함께 먹는다는 그들. 아들 없는 빈자리를 채워주는 또 다른 새 자녀 혹은 친구들. 그들은 한국 국적이다. 어머니가 29년을 같은 땅에서 살아도 취득할 수 없는 국적을 그들과 나는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고 있었다.
강태완 어머니와 친구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와 그들의 자녀인 미등록 이주아동은 노동 현장과 학교와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당하고 있다. 이에 지난 11월 7일 국회소통관에서 낭독한 故 강태완 님 산재 사망 1주기 추모 기자회견문 일부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1991년 한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에게 차별 없이 권리를 보장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법무부의 「국내 장기체류 아동 교육권 보장을 위한 체류자격 부여 방안」은 여전히 이주아동에게 안정적인 거주 자격이 아닌 임시적 체류만을 허용하고 있다. 강태완은 사망하기 3주 전, 'Let Us Dream: 지금 여기서 꿈을 키우는 이주아동' 영상 촬영을 통해 이주아동의 체류권 보장을 호소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주아동이 불안정한 신분으로 한국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청년 강태완처럼 이 땅에서 꿈을 키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이주아동들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정부 지침이 아닌 법제화를 통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강태완의 죽음은 안전 관리 의무 소홀로 발생한 명백한 인재이기도 하다.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2%에 불과하지만, 산업재해 사망자 중 이주노동자의 비중은 10%가 넘는다. 노동환경의 개선 없이 위험한 일자리를 이주노동자로 채우는 '위험의 이주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고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사업주의 안전 의무 위반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 산재 사망사고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상 신속하고 철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국가에 다음을 촉구한다.
첫째,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적 장치를 즉각 마련하라!
둘째, 임시 구제대책이 아닌, 미등록 이주아동의 정규화를 위하여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라!
셋째, 고 강태완 산재 사망사고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상 신속한 수사를 진행하고, 책임자를 엄중 처벌하라!
11월 23일 주일 오후 3시 일요일 무안공항에서는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새벽부터 수산나가 쑨 잣반쌀반 죽을 든든히 먹었다. 그리곤 수산나와 내가 주먹밥을 쌌다. 점심때가 되어 문정현 신부님, 완두, 오이, 작두, 무밍, 인디, 앵두, 알알이, 토니, 수산나, 흑미, 해바라기와 내가 세 대의 차에 나눠타고 군산에서 무안으로 향했다. 고창 고인돌 휴게소 잣나무 아래에서 점심 도시락을 나눠 먹을 때까지만 해도 화창했다.
그런데 무안으로 마저 가는 길에 지난주에 발언하셨던 유족 한 분의 부고를 들었다. 간암 투병 중이셨지만 딸과 사위의 참사로 명을 재촉하신 건 아닌지 차 안 분위기가 일순 침통해졌다.
미사 한 시간 전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에서부터 참사 현장까지 2킬로미터 넘게 걸어갔다 왔다. 철책에는 푸른 리본이 가득 묶여있었다. 목포신항에 가면 노란 리본이 가득하듯. 그 아래에는 제상처럼 희생자들이 좋아했을 음료수와 간식이 놓여있었다. 저 너머에 참사 현장인 둔덕이 보였다. 그리고 탕 탕 새를 쫓는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곳은 가창오리 수십만 마리가 이동하는 경로다. 한두 발 총알과 공포탄으로 쫓을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우리는 하제마을 600년 된 팽나무 뒤에 있던 대나무를 하늘 향해 꽂아두고 왔다. 하늘에 계신 분들에게 손짓하듯.
참사 둔덕
숙연한 추모 미사가 더욱 슬픔에 젖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이 무안공항 참사는 엄청난 참사였습니다. 백일흔아홉 분이 순식간에 산화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윤석열 계엄 선포와 계엄 해제로 완전히 묻혀버렸습니다. 유족들의 아픔이 더 컸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대고 모욕한 사람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이 세상이 그렇게 악할까요?
그래서 이 무안공항을 찾아봤는데 2층에는 아직도 천막이 그대로 쳐져 있습니다. 유족들이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욕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정부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명확하게 드러내야 하는데 국토교통부 자체가 유족들을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단순한 교통사고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 유족들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어젯밤에, 딸과 사위가 돌아간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지병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지병이 있었기에 속으로 얼마나 썩어서 어젯밤 아홉 시 경에 운명하셨습니다.
이 아픈 곳에 와 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늦게나마 와 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가까운 신부님들이랑 12월 29일이 기일인데 그때까지 미사를 봉헌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미사 참여 자체는 자체가 유족들에게 특히 교우들에게 큰 위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여러분 함께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해남의 나무는 나희덕 시인의 시를 조사(弔詞)로 읊었다.
박공식 신부님의 주례로 문정현 신부님, 문규현 신부님이 공동집전하신 미사가 끝났다. 문정현 신부님과 완두는 광주 장례식장으로 가시고, 나머지는 차 두 대에 나눠서 익산과 서울, 군산에서 각자 집으로 향했다. 참사와 사고사와 병사와 자연사. 숱한 변수가 널린 세상에서 우리는 다음을 약속하지 못한 채 그저 안녕을 인사하며 미지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삼가 희생자의 명복과 유가족의 평안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