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아래에서 잠드는 밤
20251025 제58회 팽팽문화제
매달 세 번째 일요일이 지나고 돌아오는 토요일에 민가는 간데없고 미군기지만 가득한 군산 하제마을에 있는 팽나무에게 간다. 내 반려 자동차 탈핵브리드 트렁크에는 언제나 초록색 접이식 자전거 뷔나와 감색 헬멧 그리고 연두색 텐트와 동색의 얇은 매트와 등산화와 스틱과 낫과 호미와 톱이 들어있다. 최근에는 초경량 의자도 살포시 들어있다. 언제든 떠나서 어디서든 잘 수 있게 배낭에 담아두던 옷가지와 침낭과 베개는 가끔 꺼내두었다가 다시 떠날 기미가 보이면 뒷좌석에 보릿자루마냥 세워둔다. 카메라 가방에 틈틈이 학생들 피드백해 줄 노트북까지 가방만 세 개. 거기에 바리바리 싸 온 짐. 이제 비움실천은 말 꺼내기도 민망한지 꽤 되었다.
팽나무 저만치 앞에서 새,사람행진 때도 그랬듯이 팽팽문화제에도 역시 몇 시간은 일찍 오신 박영길 샘과 인디가 채식카레를 주걱으로 젓고 있었다. 영길 샘이 오신 날과 오지 못한 날의 팽팽문화제는 서울 광화문 뷔페와 군산 단품 식당만큼 메뉴 차이가 난다. 문화제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먹을 기쁨에 위장이 일찌감치 운동을 시작했다.
완두가 팽나무 앞 평평한 자리에 텐트를 쳤다고 하셨다. 나는 텐트를 들고 가 주황 텐트 오른쪽 옆에 펼친 후 주섬주섬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지난 5월 팽팽문화제 캠핑 이후 처음 편 것이니 설치 순서도 뒤죽박죽 기억이 나지 않고 손은 원래 굼뜬데 기운까지 없으니 가뜩이나 가느다란 철사 팩이 돌 틈에 박힐 리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 멍하게 있는 내게 미리 와 연습하던 풍물패 팽수 중 가지가지가 다가왔다. 그는 망치 대신 근처 돌멩이로 철사 팩을 박아 줄로 이어 텐트가 기우뚱 형태를 잡아가자 말했다.
"텐트가 주인 닮았네."
작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1인용인 그것이 내겐 2인용이니까. 작은 것이 모두 아름다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기준에는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아름답다. 텐트를 다 치자 팽나무 옆에서 잘 생각에 마음이 스산했다. 날은 저물어가고 계절은 늦가을이니까. 완두 텐트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대형 텐트가 순식간에 설치되었다. 그 텐트에선 그날 정오부터 한 시간 이성당 앞 사거리에서 함께 피켓 선전전을 한 앵두가 주무신다고 했다. 일 년에 두 번 하는 캠핑인데 달랑 텐트 세 동이 팽나무 그늘 아래 쳐있었다.
오후 세 시가 되자 더덕의 사회로 팽팽문화제를 시작했다. 오기로 했다던 40여 명은 사정이 생겼는지 못 오고 팔레스타인 해방과 자유를 외치는 이들이 평화로워 보이는 복장으로 앞에 섰다. 지난달부터 내 왼 손목에 걸려있던 유기만 제작 실팔찌의 색깔과 같은 초록, 빨강, 검정, 하양 팔레스타인 깃발이 LED 선전 차량 앞에서 휘날렸다. 그 앞 매대엔 오이와 작두가 지난달 팔던 양말과 수첩을 올려놓고 없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스티커가 가득했다.
새 모자 쓰신 문정현 신부님
갓 깎아놓은 나무 냄새가 날 듯한 여성이 기타를 메고 앞에 섰다. 누구의 친구라고 제 소개를 했다. 곡목이 친구였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가사가 쏙쏙 귓속으로 들어왔다.
그 어느 날 내가 초라해 보이고
무모하고 이기적이고 못생겨 보일 때
이런 나라면 여기서 뭘 하든
한 발자국의 아름다움도 없다고 느낄 때
너흰 지긋이 나를 보며 말했지
그런 너이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자, 보라고. 네가 이룬 기적을
네가 보여준 삶의 진심을
사라지지 않는 나의 미운 모습에
부끄러워하며 혼자만의 자책이 늘 때
구겨 숨겨버린 나의 초라한 마음에
먼지를 털고 너는 내게 말했지
잘 봐 어둠이 아냐 그건 너의 날개야
네가 자유로이 이 세상을 날게 해 주는
잘 봐 어둠이 아냐 그건 너의 빛이야
너를 너답게 살게 해 주는
미워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네가 멋지다고 생각해
주저하지 말아 친구야
그런 너를 우린 좋아한 거야
(간주)
바뀌어도 좋아 그대로여도 좋아
그저 너의 당찬 웃음이 좋아
느려도 좋아 멈춰도 괜찮아
밝은 숨을 쉬는 생으로 가자
직선도 좋아 구부러져도 좋아
그저 너의 당찬 웃음이 좋아
대학도 좋아 아니어도 괜찮아
밝은 숨을 쉬는 생으로 가자
미워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네가 멋지다고 생각해
주저하지 말아 친구야
그런 너를 우린 좋아한 거야
*
그런 너를 우린 좋아하니까
그런 너여도 돼 친구야
그런 너를 우린 좋아하니까
그런 너를 잃지 말아
친구야
까르
딸뻘 되어 보이는 가수가 너라고 부르며 내 어둠을 날개라고, 빛이라고, 이런 내가 멋지다고, 좋아한다고 노래해 주었다. 그게 위안이 되었다. 그 위안은 박수와 함성을 저절로 나오게 했다. 그 가수의 이름은 까르. 이어 이날 살다가 처음 당하는 일이 있는 사람 둘을 위해 신곡을 노래했다. 노래를 듣는 이들의 표정 위에 가을 오후의 위로가 내려앉았다.
오후 4시 30분이 지나자 아마 가마우지였을까. 팽나무 너머에서 새들이 옥녀봉 쪽으로 날아갔다. 새들도 어둠 전에는 제 집을 찾는구나. 훠얼훨
자전거를 타고 70km를 달려 팽나무까지 온 녹색당 여섯 분까지 더해 노래로 귀와 마음이 부른 사람들은 영화 <수라> 황윤 감독의 막바지 영화 촬영에 팽나무와 함께했다. 600년 된 팽나무를 감싸 안고 도는 문정현 신부님, 문규현 신부님 그리고 우리는 2025년 가을에 제2의 수라 영화가 이 평화를 지켜주기를 기원했다.
표고버섯무침과 장아찌, 양배추 당근 샐러드, 곶감 두부무침, 두부김치, 콩카레와 부대찌개, 세현과 백구가 부친 콩전… 퍼도 퍼도 또 있는 반찬의 레일을 지나 배까지 부른 사람들은 어둠이 깔린 팽나무 앞에서 설해 감독의 진행으로 영화를 보았다. 지난봄부터 여름까지 전주 전북환경청 앞 천막 농성과 새,사람행진을 여러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작품들이었다. 판결 전 서울 꿀잠에서 보았으나 다시 보아도 감회가 뭉클한 영화였다.
상영 후 서로들 몇 회 출연했냐를 겨루는 농담과 함께 마시멜로를 숯불에 구워 먹었다. 잠시 후 딸기와 인디 셰프와 더덕 셰프의 화덕은 경쟁이 붙었으며 굵은 천일염을 친 돼지 목살은 노릇노릇 구워져 옹기종기 모인 이들의 목구멍을 넘어갔다.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지난 여름날의 새,사람행진에 머물러 있었다.
밤 9시 30분. 소화도 시키지 않고 일찌감치 텐트로 들어간 나는 갖고 간 옷들을 두둑하게 껴입고 침낭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팽나무 가장 가까이에서 밤을 보낼 생각에 심지어 경건해서 낮은 천장에 코가 닿을 듯한 답답함도 참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박자박 텐트 주변을 살금살금 조심스레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기 화면을 켜보니 새벽 2시 30분. 잠시 후 숲 쪽인 왼쪽 옆에서 톡톡 누군가 텐트를 두드리는 듯했다. 제 땅에 갑자기 이사 온 헝겊 집 안에 뭐가 있나 궁금해하는 듯했다. 나도 톡톡 텐트를 두드려서 내 존재를 그에게 알렸다. 허락 없이 자리해서 미안하다고.
잠시 후 다시 톡. 톡. 이번엔 동물 발소리가 아니었다. 빗방울이 텐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영화 상영 전에 이미 이른 이슬이 내려 천막이 축축해 있었다. 더덕에게 큰 천막을 텐트 위로 옮겨달라고 부탁했었다. 남자들 네 명이 옮겨준 천막은 세 동의 텐트 중 둘만 가려주었고 정작 부탁한 내 텐트만 가리지 못했다. 이슬만으로도 젖은 텐트에, 셋 중 가장 작은 텐트에 비까지 내리다니. 흐흣. 저절로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심야의 정적을 깨뜨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 좋은 일하는 건 어제오늘이 아니다. 기껏 공들여놓으면 남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그런 일,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내 글의 장르 역시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주가 되지 않는가. 그래서 이젠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쓰련다. 팽나무 곁에 누운 나, 밤이면 깨어나는 숲에서 덩달아 깨어난 나, 그런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미군기지의 소음에 대해서.
그놈의 소음은 숲의 아무도 단잠에 들지 못 하게 했다. 밤새 무슨 엔진을 돌리는 걸까. 특수 훈련도 아닐 테고 밤샘 공사는 더욱 아닐 테니 그 소리의 출처를 알고 싶었다. 그들은 남의 나라 땅에 살고 있던 주민을 내쫓고 이젠 숲의 잠까지 방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러한 만행에 팽나무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인간을 대표해 내가 죄스러웠다. 평화의 반대 소리가 있다면 바로 그 밤의 미군기지 소음이었다.
축축하고 으슬으슬한 가을밤 추위에 엎드려 웅크리고 꼬부려 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소리는 잠시 멎었다. 텐트 문을 열어보니 팽나무가 어제 그 모습 그대로 늠름하게 서 있었다. 젖은 땅 위 운동화는 축축했지만 물기까진 없었다. 저 건너 콘크리트 길 위에 쳐있는 녹색당원 텐트들과 토니가 친 오이 텐트에는 습기 피해가 없어 보였다.
새들이 다시 먹이를 찾으러 동서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이른 아침에 어느새 더덕과 토니는 따뜻한 모닝커피를 준비해와 막 일어난 이들을 한기 속에서 구해주었다. 부스스 깨어나는 그 아침에 DMZ에서 온 해남의 나무가 등장했다. 곧이어 문정현 신부님도 딸기와 함께 오셨다. 캠프의 백미는 한밤의 불꽃놀이가 아니라 다음 날 아침의 호젓한 노래인가. 영길 샘과 설해 감독이 짐을 챙기는 내내 나무와 길 떠나기 전 녹색당원들과 신부님의 연속 노래는 전날 밤 미군기지의 횡포를 잠시 잊게 해 주었다.
1871년 신미양요와 1950년부터 3년간의 한국전쟁 후 분단 75년인 2025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에서 미국의 군대를 본다. 군산공항을 이용할 때마다 사용료를 내고 있는데, 격납고를 새로 정비하고 스텔스기를 더 들여오면서 동시 이착륙할 군사 공항이 필요하다고 새만금 신공항을 요구하는 미군. 그런데 공교롭게도 뉴질랜드에서부터 오는 철새들은 일만km 날아 새만금 수라갯벌 신공항 자리에서 딱 한 번 쉬면서 양분을 섭취한 후 알래스카까지 7천km 더 이동한다. 반대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날아갈 때는 만삼천km를 날아간다. 그러다 간혹 인간이 초래한 기후 온난화로 인해 텃새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우리 주권과 갯벌 그리고 그 공간에 살거나 그곳을 지나치는 새와 게와 풀과 삵과 조개 그리고 뭇이라 칭하는 셀 수 없는 생명체들. 곧 겨울이 오면 다시 새만금 수라 갯벌과 금강과 서해안엔 새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때까지 지상을 비추는 태양의 시간은 더욱 짧아질 터이니 생명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팽팽문화제 제59회는 11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