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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협동조합 길목이 생태문화학교라는 프로젝트에 협력사업으로 참여한 지 올해로 3년이 지나고 있다. 각 기수마다 상당히 긴 과정이 진행되지만, 시종 진지한 참여자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내 삶을 반성하게 된다. 이 같은 생태환경 관련 프로그램의 측면에서 지난해부터 생태기행을 연 1회 진행하고 있는데, 메밀을 심고 곶자왈에서 숲의 소리를 경청했던 지난 제주 기행에 이어 올해는 지난 9월 4일부터 6일까지 총 18명의 참가자와 함께 기타큐슈 환경 기행을 다녀왔다.
일단 기타큐슈는 조용하고 정갈한 느낌의 항구도시였다. 그리고 환경 뮤지엄 견학, 시민사회단체 및 대안학교와의 교류회 등을 통해 그 정갈함은 일본의 공업화 시기, 완전히 무너져 버렸던 도시환경 앞에서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단체, 대학 연구기관, 지역 내 공업지대에 속한 여러 회사 등 다양한 단위가 함께 30년을 노력한 끝에 얻은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제철소가 시작된 곳, 일본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기타큐슈, 그 이면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을 만큼 파괴된 죽음의 바다, 걸어 다니기만 해도 온몸을 검게 뒤덮는 재, '보랏빛'이라는 뜻의 강물이 시커멓게 죽자, 자조적인 말로 '검은 강'이라 불렀던 무라사키강이 있었던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만큼 환경을 파괴했던 동물도 없을 것이니, 너무 많이 늦었더라도 무언가 해봐야 할 존재 역시 인간임에 분명할 것이다.
2박 3일간 진행되었던 이번 기행은 평소 큰 고민 없이 쓰고 버리는 나와 우리 모두의 행동이 매해 다가오는 기록적 더위와 폭우를 넘어 네팔의 참사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너무나 뼈아프게 느끼고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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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글이 이렇게 끝나면 프로그램 참여 후기가 될 순 있겠지만, 결코 맥주 인문학 칼럼은 되지 못할 터!
일정이 끝난 후 나는 밤 시간의 탄가시장(旦過市場)을 찾았다. 기타큐슈의 올드 타운이라 할 수 있는 고쿠라 지역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존속하고 있는 탄가시장의 별명은 기타큐슈의 부엌, 단순한 관광명소가 아니라 여전히 지역민의 실생활과 연결된 시장이다.


그 한가운데 브라세리 소마(Brasserie SOMA) 펍이 있었다. 일본 중소도시의 많은 곳이 그렇듯, 기타큐슈의 펍은 대개 밤 9시 이전에 문을 닫는다. 그런데 너무나 황송하게도 이곳은 무려 '열 시'까지 열어주심으로 인해 늦은 시간의 방문객이 기쁘게 한잔할 수 있었다. 2020년에 다이닝 펍으로 출발한 브라세리 소마는 현재 기타큐슈 지역 유일의 크래프트 비어 소규모 양조장인 고쿠라 브루잉을 가게 내에 품은 펍으로 발전했다.
테이블 두 개와 바의 의자 서너 개가 전부인 매장은 아늑했다. 그리고 미국과 서유럽 스타일을 주요 라인업으로 하는 맥주는 일행 모두가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을 만큼 모두 준수했다. 나는 그곳에서 여행의 피로와 프로그램 진행과 인솔에 따른 긴장감을 내려놓고 시장과 펍의 편안함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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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큐슈는 후쿠오카현에 속한다. 참고로 서울 수유동 집에서 김포공항까지는 약 한 시간 반이 걸린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 후쿠오카까지는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일본이지만 도쿄보다 서울이 더 가까운 후쿠오카, 그 거리만큼 매우 오래전부터 후쿠오카는 한반도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한반도 남부에서 후쿠오카를 포함한 일본의 세토내해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통해 대륙의 쌀재배 기술이 전파되었고, 이는 조몬문화로 대표되는 일본의 선사시대를 근본에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가야, 백제와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던 이 길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백제가 재건을 위한 마지막 불꽃을 태울 때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전 국력을 끌어모아 마련한 대규모 병력의 출정로이기도, 조선통신사가 오가던 길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몽골제국의 일본 원정에 동원된 고려군 중 태풍에 살아남은 잔여 병력이 상륙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치른 곳도, 임진왜란 중 강제로 끌려온 조선 도공들의 집단 정착촌이 있었던 곳도 역시 후쿠오카였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기 수개월 전의 겨울, 조선 유학생의 중심에 있었던 윤동주와 송몽규가 너무나 짧은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 존재했던 후쿠오카 형무소는 해당 지자체인 사와라구(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 시설을 접수하기 위해 항구를 통해 진입한 미군은 기존 형무소 시설의 상당 부분을 1972년까지 미군기지로 점유했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축소된 형무소는 후쿠오카 구치소로 운영되고 있고,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평지는 수많은 외국계 기업과 관련 부처, 외국인 학교가 들어서 있다.
현재의 구치소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정문을 조금 지난 곳에 위치한 어린이공원이다. 그곳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윤동주 시비 건립이 추진되던 공간이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사와라구(區)의 불허로 무산되었다. 그곳에서 윤동주가 생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시를 읽었다.
쉽게 씌어진 시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도달할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작은 다다미 육첩방에서 나라 잃은 청년이 심적으로 겪었을 비탄, 죄스러움, 잡고 싶은 희망 등을 담담한 어조로 적은 이 시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는 문구가 유독 눈에 밟혔던 것은 그 기다림의 끝을 보지 못한 채, 끝내 눈을 감고 말았던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곳에서 두 청년 지사의 시신을 가족의 동의도 없이 화장한 곳으로 추정된다는 바닷가까지 걸어가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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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엄격한 기독교적 가풍과 마을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윤동주는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연희전문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 가장 가까운 벗은 당시 전남 광양에서 성업하던 망덕 양조장집 아들 정병욱이었다.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함께 하숙했던 두 사람은 5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허물없는 친구로 밤을 지새우며 시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1941년, 졸업을 앞둔 윤동주가 자신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을 때, 필사본 3권 중 1권을 정병욱에게 맡기면서 "내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 시집을 세상에 전해달라"는 뜻을 남겼다. 이후 정병욱이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자, 그의 어머니는 시집을 마루 아래에 숨겨서 보존했고, 이를 통해 윤동주의 귀한 작품은 우리와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은 술과 인연이 없었지만, 그의 시는 술도가를 통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 때문에 후쿠오카에서도 양조장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사람 사는 곳엔 그 어디나 술이 있고, 그중엔 맥주도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찾아간 곳은 브루홀릭! 쇼핑센터 가득한 후쿠오카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조용히 산책하고 싶다면 반드시 가 봐야 할 오호리 호수공원 지척에 위치한 브루홀릭은 일단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같이 뭔가 맥주 고수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고 할까? 무척 여유롭지만 아주 느리지도 않은 주인장이 손수 만드는 햄버거, 감자튀김 같은 안주와 무척 잘 어울리는 맥주 라인업은 모두 개성과 완성도에서 탄성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큰 기대 없이 갔던 곳에서 실력파 크래프트 비어 양조장을 만날 때의 기쁨이란 언제나 형언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