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고상균의 "그곳엔 맥주가 있다"

d2d0d9

에피소드 11 - 맥주는 평등하다! -3.8 여성대회를 맞이하며

posted Mar 12, 2026

에피소드 11

맥주는 평등하다!

-3.8 여성대회를 맞이하며-

 

 

1

 

여행력(?)을 자부하는 분들에겐 대개 자신만의 여행 콘셉트가 있다. 맛집, 소품 가게, 인스타 감성 카페, 빵지순례 같은 것들 말이다. 여러분들께서 '너야 뭐.......' 하실 것 같긴 하지만, 내겐 당연히 지역 양조장과 펍 방문이다. 특히,특히 맥주 양조시설은 꽤나 자주 보고 설명을 들어왔지만, 여전히 신기하고 경이롭다. 각각의 특징이야 모든 양조장에 다 있겠지만, 거의 예외 없이 양조 공간 한쪽엔 뭔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 같은 것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는 산업 현장엔 로봇만 가득하고 글도 발표 자료도 AI가 다 작성해 주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은 있는지라, 양조 공간에서 그 무거운 것들을 운반하고 탱크에 넣고 하는 자리는 오랜 시간 사람, 그중에도 남자 사람의 전유물 같은 인상이 있었더랬다.

 

술자리는 또 어떤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의 만취는 많은 경우 낭만으로 인식되는 반면, 여성은 심지어 그가 피해자인 경우에도 그 음주와 늦은 귀가가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여전히 부정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단언컨대 맥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2

 

인류 문명 대부분에서 술의 처음은 신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효모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썩어가는 것 같았는데 뭔가 전혀 다른, 게다가 엄청 기분이 좋아지고 자꾸 생각나는 그 맛으로의 변화는 고대인들에게 있어 신의 조화가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영역이었다. 맥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맥주 문명인 수메르의 경우, 이 신비한 맥주 양조술을 전해 준 것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던 여신 닌카시였다.

 

대지에 흐르는 강에서 탄생한 이여,

엔릴 신께서 정성껏 돌본 이여,

닌카시여!

당신은 큰 삽으로 향기로운 속재료와 꿀을 섞으십니다.

당신은 커다란 화덕에서 '밥피르(양조용 빵)'를 굽고

껍질 벗긴 곡물을 갈무리하셨나이다.

당신은 항아리에 물을 붓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맥주를 빚으십니다.

당신이 다 빚은 맥주를 큰 그릇에 따를 때,

마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처럼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나이다.

 

닌카시 여신을 위한 찬가 중 일부 -

(Miguel Civil, "A Hymn to the Goddess and a Drinking Song" Studies Presented to A. Leo Oppenheim, 1964에서 발췌)

 

전해주신 이가 여성이시니, 이를 계승하는 권한 역시 여성 사제에게 있었을 터! 수메르에서 맥주 양조 기술뿐 아니라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은 여성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 같은 사회에서 여성들이 맥줏집에 모여 늦도록 술 한잔 나누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고상균-맥주2.jpg

 

 

3

 

중세 초기의 유럽 역시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기독교에선 여성들의 공적 활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었지만, 맥주를 빚고 판매하는 것은 에일와이프(Alewife), 즉 여성 양조사들의 영역이었다. 그녀들은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동네마다의 맥줏집을 운영했고, 이를 통해 가정 구성원들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이들은 마케팅을 위해 맥줏집 현관문 위에 큰 빗자루를 걸어두었고, 자신이 직접 큰 모자나 잔을 들고 문 앞에 나가 손님을 끌기도 했다.

 

고상균-맥주1.png

 

 

끓는 맥아가 담긴 큰 솥, 커다란 빗자루와 검고 긴 모자....... 훗날 이 같은 이미지들은 중세에 마녀사냥이라는 광풍이 불 때, 빗자루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의 전형적 이미지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그들이 가진 경제력을 빼앗기 위한 음모이거나, 이들이 쥐고 있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남성 정치 권력 및 종교 권력 기반 양조장의 모함이었다. 결국 이들 에일와이프들은 마녀로 비난받으며 삶의 자리에서 내몰렸고, 술 마시는 여성은 신앙을 버리고 타락한 존재, 교회에 의해 남성 아담을 파멸에 이르게 한 장본인으로 규정되었다. 정죄당한 또 다른 하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여성을 솎아낸 맥주의 자리에서 남성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의 소유였던 것인 양 행세하기 시작했고, 이는 전 사회적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대물림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겠다.

 

4

 

하여 3.8 여성대회가 있는 이 3월에 꼭 말하고 싶었다. 맥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적지 않은 광고 속에서 남성성 뿜뿜하는 남성들이 멋들어지게 들이켜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맥주란 남성 질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거의 유일했던 여성들의 영역이었다고, 그 유산을 따라 지금의 맥주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고상균-맥주3.png

 

 

이 같은 정신에 기반해 크래프트 비어 업계에서는 2007년부터 시작된 여성운동의 흐름이 있는데 '핑크 부츠 소사이어티(Pink Boots Society: PBS)'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단체는 미국의 브루마스터 테리 파렌도프에 의해 설립된 이래 맥주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육과 네트워킹을 통해 그들의 커리어를 지원하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 여성 양조인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상균-맥주4.png

 

 

PBS의 여러 활동 중 가장 유명한 활동은 세계 여성의 날에 개최하는 'Collaboration Brew Day'와 여성 양조사들을 위한 장학금과 전문 교육비 지원 프로그램 등이다. 이를 통해 PBS는 업계의 유리 천장 타파, 즉 여성들이 맥주 산업에서 단순 보조 인력이나 매장의 얼굴이 아니라 레시피를 설계하고 공정을 책임지는 마스터로 자리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전히 강고하게 남성 중심적 젠더 위계가 작동하는 세상에서 어떤가? 점차 봄이 다가오는 3월, 마음에 드는 맥주 한잔 가득 담아 들고 모두의 평등을 외치는 술자리 한번 가져보시는 것, 멋지지 아니한가?

 

[추신 ] 핑크 부츠 소사이어티 가맹 양조장은 출시하는 맥주에 분홍색 장화 라벨을 붙인다.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브루마스터 김정하 대표가 운영하는 바네하임(서울 공릉동), 여성 양조사 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릴라 브루잉(부산 해운대), 개성 있는 맥주 실험을 이어가는 미스테리 브루잉(서울 마포), 이제는 레전드라 말할 수 있는 화수브루어리(울산, 경주, 서울 수유동)와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경기 일산) 등이 PBS에 참여한 바 있다.

고상균 프로필.png


  1. 에피소드 11 - 맥주는 평등하다! -3.8 여성대회를 맞이하며

    에피소드 11 맥주는 평등하다! -3.8 여성대회를 맞이하며- 1 여행력(?)을 자부하는 분들에겐 대개 자신만의 여행 콘셉트가 있다. 맛집, 소품 가게, 인스타 감성 카페, 빵지순례 같은 것들 말이다. 여러분들께서 '너야 뭐.......' 하실 것 같긴 하지만,...
    Date2026.03.12 By관리자 Views12
    Read More
  2. 에피소드10 - 맥주 관련 최신 소식

    새해가 시작되고 앗! 하는 동안에 벌써 2월을 맞이한다. 벌써 2월이라니, 어쩜 이렇게 시간은 해마다 가속도를 붙이는 것인지....... 가는 시간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안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없...
    Date2026.02.12 By관리자 Views58
    Read More
  3. 에피소드9 - 뭔가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에피소드9 뭔가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영국의 시민단체 캄라(CAMRA) 이야기) 1 새해가 시작되었다. 2026년은 사회적협동조합 길목의 맥주 인문학 유럽투어 '맥투더퓨처' 시즌2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해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1월 초반...
    Date2026.01.16 By관리자 Views57
    Read More
  4. 특집 1주년 특집 - 올드 라스푸틴

    특집! 내란 1주년에 즈음하여 마시면 좋을 맥주 추천 : 올드 라스푸틴 1 내란의 겨울이 시작된 지 일 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같은, 그 어떤 거대한 담론을 떠나 내겐 매우 개인적인 그날의 기억이 있다. 지난해 12월 4일, 그러니까 내란발표가 없...
    Date2025.12.10 By관리자 Views93
    Read More
  5. 에피소드8 - "자유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

    에피소드8: "자유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의미한다!" (Freiheit ist immer nur Freiheit des anders Denkenden.) 1 아마존 밀림에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피라항'이라는 부족이 있는데, 이들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앙체계를 가...
    Date2025.11.18 By관리자 Views65
    Read More
  6. 맥주 인문학 유럽투어 시즌1 성사 기념 호외

    맥주 인문학 유럽투어 시즌1 성사 기념 호외 가끔은 연착된 기차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준다! (잘츠부르크 루퍼티키르탁 축제 참여기) 1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코로나19 이후 독일의 기차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소식은 진즉에 듣고 있었다....
    Date2025.10.14 By관리자 Views303
    Read More
  7. 에피소드7: 지구 한 켠의 변화를 위해 - 코닝스호벤 수도원 맥주

    에피소드7 지구 한 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맥주 - 코닝스호벤 수도원의 라트라페 이야기 1 여름은 덥다. 이걸 글의 첫 문장으로 쓸 가치가 있냐 싶으시겠다. 여름이 덥다는 것은 '내란은 나쁘다'만큼이나 당연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Date2025.09.18 By관리자 Views264
    Read More
  8. 에피소드 6: 그래도 신앙이 가치 있다면 - 리투아니아 사울레이의 십자가 언덕

    에피소드 6: 그래도 신앙의 사회적 존재가치가 있다면 리투아니아 사울레이의 십자가 언덕과 볼파스 엔젤맨 1 오래전, 친구 세 명과 대만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우리 중 대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가장 많은 친구가 준비 단계부터 일관되게 대만 동부의 항...
    Date2025.08.16 By관리자 Views263
    Read More
  9. 에피소드5: 고흐의 꿈과 닮은 맥주 - 트라피스트 맥주 준데르트 이야기

    에피소드5: 고흐의 꿈과 닮은 맥주 트라피스트 맥주 준데르트 이야기 1 언젠가 앙코르와트를 방문했을 때였다. 정말 정말 가보고 싶었던 그곳에서 나는 살짝 이성을 잃고 있었다. 힌두교 창세 설화와 왕조의 서사를 담고 있는 회랑 부조를 따라가며 그 엄청난 ...
    Date2025.07.09 By관리자 Views278
    Read More
  10. 에피소드4: 맥주로 사회복지를 실현한 나라 - 에스토니아 맥주 이야기

    에피소드4: 맥주로 사회복지를 실현한 나라 에스토니아 맥주 이야기 1 헬싱키 항을 떠난 배 '에케로라인'이 핀란드만을 지난 지 두어 시간 정도 되었을 때, 차 한 잔, 책 한 권 들고 발트해를 바라보며, '나는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
    Date2025.06.11 By관리자 Views28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