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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고상균의 "그곳엔 맥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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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2 - 전쟁 대신 맥주를! (아플리험 맥주)

posted Apr 1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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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에 전쟁의 기운이 가득하다. 미얀마의 내전은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태국의 압도적 화력 앞에서 라오스 국경지대는 얼마 전까지 포성이 가득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의 수렁에 빠져 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은 서남아시아 전역을 전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디 이뿐인가?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공격하곤 정유시설을 빼앗았고, 군사적 충돌이 없을 뿐 중국과 대만 간의 긴장은 나날이 더해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있는 한국은 북한과는 냉랭하고, 러시아와는 매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야말로 생존을 건 고민에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때, 아무 생각 없이 맥주가 어쩌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언감생심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휴가는 갔고, 장례식 중에서도 이따금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기도 하지 않던가? 그런 정도의 의미를 생각하다 문득 수도원 맥주 아플리험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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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북부의 소도시 아플리험에는 동네 이름을 딴 유서 깊은 수도원 '아플리험'이 있는데 이들의 출발은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1074년경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전 유럽에는 이슬람 제국이 언제고 휘어진 칼을 들고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했고, 국지적으로는 봉건 영주 간의 분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때 플랑드르 지방의 플람스 브라반트 주를 대표하는 유력 가문의 기사 6명이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대립 중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현실을 겪으며 깊은 회의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자신들도 타인의 생명을 살상하는 범죄에 가담했음에 대해 깊은 참회에 이른 이들은 지위와 계급을 상징하는 무기와 갑옷을 버리곤 은둔 수사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바로 이들이 세운 베네딕토 계열 수도 공동체가 아플리험 수도원의 출발이었다.

 

이들의 공동체는 규율에 대한 철저한 순명과 이행을 바탕으로 노동과 기도 생활을 이어가는 가운데 생필품인 빵과 맥주 역시 직접 생산해 나갔다. 아울러 처음부터 전쟁 반대와 평화를 염원하며 '환대와 화해'라는 기치를 내건 아플리험 수도원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과 찾아오는 이들 모두에게 수도원을 기꺼이 개방하고 빵과 맥주를 아낌없이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 공동체를 구현해 나갔다. 이는 심지어 과거 기사였던 시절, 자신들이 죽였던 사건을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나 분쟁 중 들이닥친 적국의 병사에게도 예외 없이 이어졌다.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그들의 실천은 곧 '아플리험의 빵과 맥주는 생명을 살린다'라는 소문이 되어 플랑드르를 포함한 인근 지역에 널리 전해지기 시작했다. 아플리험의 맥주가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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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떠나 분쟁을 멈추고자 했던 그들의 바람은 수도원의 역사에서 많은 경우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9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전쟁, 프랑스 대혁명, 제1·2차 세계대전 등의 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파괴를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플리험의 수사들은 그 같은 순간에도 얼마 남지 않은 맥주와 먹을 것을 모아 전쟁으로 피해 입은 이들을 먹였고, 심지어 수도원을 파괴한 적국 병사들도 식탁으로 초대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편, 맨손으로 무너진 벽돌을 모아 수도원을 재건했다.

 

이후 베네딕토 계열 수도원 중 좀 더 엄격하게 신앙의 근본정신을 지켜나가길 결의하는 공동체들에 의해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출범할 때, 여기에 참여한 아플리험의 맥주는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트라피스트 인준 마크를 달고 출시되었다. 그러나 점차 수도원의 수행과 물품의 생산과 판매라는 이원적 상황 앞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되면서 아쉽게도 1970년대에 이르러 하이네켄이 레시피를 받아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고, 이에 따라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비록 트라피스트 협회와는 결별했으나, 수도원의 계율과 전통을 최대한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하이네켄이 생산하나 전통적 생산방식과 레시피는 절대 바꾸지 못하도록 했고, 상업적 판매의 결과로 로열티 형태로 받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난민 구호, 사회적 소수자 지원사업 등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통해 "전쟁 대신 맥주(Make Beer, Not War)"라는 아플리험 수도원의 창립 정신은 여전히 살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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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던 지난 2022년 5월 15일, 한 익명의 비행사가 폴란드 서부 포즈난에 있는 비행 학교인 스마트 항공이 소유한 2인승 항공기 'Tecnam P2008JC'로 폴란드 서부 포즈난 상공을 3시간 56분 동안 날며 실시간 항공 공식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플라이트레이더24(Flightradar24)' 사이트를 통해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이를 연결해 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Make Beer, No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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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무기를 버리고 맥주를 빚으며 수도 생활을 이어갔던 아플리험의 전통,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함축한 문구로 레시피를 인수한 하이네켄이 아플리험 맥주의 홍보 문구로 사용하며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수도원 맥주 아플리험의 문장에는 두 개의 열쇠와 한 자루의 칼이 교차해 있다. 이 중 칼은 처음을 열었던 기사들이 수도 생활을 시작하며 버렸던 무기, 즉 전쟁을 의미한다. 한편 열쇠는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통해 약속받은 '천국을 여는 열쇠', 즉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 임하는 출발점을 의미한다. 칼을 막아선 두 개의 열쇠는 무력보다 더 큰 가치가 '평화와 용서'에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아플리험 수도원이 창립 이래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가치, 즉 평화의 상징인 것이다.

 

비록 우리가 전쟁을 멈출 순 없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평화를 염원할 순 있다. 그렇게 한 마음을 가진 이들끼리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맥주 한잔 나눌 수 있길 바란다.

전쟁 대신 맥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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