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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고상균의 "그곳엔 맥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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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7: 지구 한 켠의 변화를 위해 - 코닝스호벤 수도원 맥주

posted Sep 18, 2025

에피소드7

지구 한 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맥주

- 코닝스호벤 수도원의 라트라페 이야기

 

1

여름은 덥다.

이걸 글의 첫 문장으로 쓸 가치가 있냐 싶으시겠다. 여름이 덥다는 것은 '내란은 나쁘다'만큼이나 당연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위의 개념이 달라졌달까? 어느 순간부터 그 더위는 단순히 온도가 높다 정도가 아니라 숨쉬기 어렵다, 견디기 힘들다, 상상을 넘어선다 등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랬다. 환경이나 생태 등의 주제에 대해 이야길 나눌 때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야 어찌어찌 지나가겠지만, 정말 그 다음엔 큰일 날 것 같지 않니?'와 같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런데 앙코르와트를 찾아 십 년 전쯤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공항을 나서자마자 '우와! 한증막 같아!'라고 내뱉었던 느낌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에서 느낄 수 있게 된 지금, 내 생각은 근본부터 틀렸던 것이었음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세상 어떤 것이나 그렇지만, 특히 환경과 관련된 문제는 당장 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비록 기후재앙은 이제 더 이상 특이 현상이 아닌 '일상(normal)'이 되었고, 지구온난화를 넘어 '끓는 시대(global boiling)'에 진입했음이 선언되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지금보다는 나은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고 또 숭고할 것이다.

상황은 이와 같지만 사실 술과 관련한 산업 전반은 많은 경우 지구생태계에 악영향을 주는 행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선 가뜩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작황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술을 빚는 것은 좀 더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할 곡물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비록 그 결과로 만들어진 맥주가 사람들에게 행복과 응원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또 맥주를 포함해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소비하며, 폐수 역시 막대한 환경적 부담이 된다. 필터링 과정에서 사용하는 청징제 역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청징제의 원재료는 물고기 부레다. 뭐 부레 정도야 생선 손질 후 남은 부산물일 것이니 큰 문제가 없지 않겠나 하실 수 있겠다. 하지만 상당 기간, 청징제에 들어가는 부레는 철갑상어의 것만을 사용했는데, 알고 계시듯, 자연산 철갑상어는 남획으로 인해 이미 멸종했거나 대부분 멸종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만든 것에 적어도 초기 맥주 산업이 엄청나게 기여(?)했음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PET병, 캔 등 맥주 용기들 역시 생산과 재활용 등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슬프게도 만 얼마에 편의점에서 들고 온 맥주를 오징어 다리와 함께 한잔하는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구와 그에 속한 생명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2

 

모든 맥주 회사들이 다 이 모양인 것은 아니다. 기네스 등은 수년 전부터 전 생산 라인에서 부레 청징제 사용을 금지했고, 많은 회사가 사용한 물의 정화에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중 생산과 유통, 소비 등 전 과정에 있어 지역과 환경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맥주는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 트라피스트 계열 중 코닝스호벤 수도원에서 생산하고 있는 라 트라페가 단연 갑이다. 네덜란드 남부 한적한 농촌 마을인 딜부르흐에 위치한 코닝스호벤 수도원은 프랑스대혁명 과정에서 잿더미가 된 터전을 뒤로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수사들이 재건한 수도원이다. 그곳에서 생산하는 맥주 라벨 라 트라페는 원래 있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수도원 이름이며, '왕의 농장'이라는 뜻의 재건 수도원 이름에는 힘겹게 떠돌던 자신들의 정착을 허가해 준 네덜란드 왕실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다.

 

코인스호벤 수도원의 레스토랑1.jpg

 

코인스호벤 수도원의 레스토랑2.jpg

 

 

그리 어렵게 시작했기 때문이었을까? 설립 초기부터 코닝스호벤은 지역과의 상생을 최우선에 두었고, 이윤을 반드시 지역사회와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원에 속한 코인스호벤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 번째, 코인스호벤은 수도원에 속한 지역의 모든 농지를 지역의 농민들에게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다.(투어 중 보게 되는 소개 영상에서 연 1유로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같은 파격적 대우에는 엄격한 조건이 있는데 유기농 농법을 준수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농지 사용에서 배제된다. 두 번째, 이를 통해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대부분 수도원에서 적정가격으로 구매하여 농민들에게 안정적 판로를 제공한다. 수도원은 맥주, 레스토랑의 식자재, 치즈, 빵, 초콜릿, 꿀과 같은 기념품 가게 물품 등의 제품으로 생산한다. 세 번째, 수도원은 맥주 양조에서 소비하는 막대한 양의 물 모두를 자연정화 시스템을 통해 하천 생태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정화하며, 이렇게 확보한 수자원을 지역 농가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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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과정을 통해 코닝스호벤 수도원은 라 트라페 생산에 있어 원재료로부터 폐수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지속 가능한 환경친화적 시스템을 구축하여 지역 생태계 보전에 앞장서고 있다. 수도원 하나가 지구 전체를 바꿀 순 없지만, 적어도 코닝스호벤은 지역의 변화를 위해 지금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울러 대개 엄격한 수도원 운영으로 유명한 트라피스트 계열에서 희귀하게 수도원 영내의 많은 부분을 개방하는 양조장 투어를 진행하고 있으며, 방문자용 숙소를 운영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3

 

필자가 방문했을 때, 투어 이끔이는 무척이나 성격이 좋으신 수사님이셨다. 시종 끊이지 않고 농담을 이어가던 그에게 투어가 끝난 후 조심스레 물었다.

 

수도원 유지를 위한 수사님들은 충분히 계신가요?

 

살짝 진지해지려다가 다시 웃음을 머금고

 

어렵죠. 약 50여 명의 수사가 있는데 그중 절반은 수행에 집중할 것을 서원하고 각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으십니다. 나머지 절반이 수도원과 펍 운영, 맥주 양조 및 각종 생산라인 유지 등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많이 힘듭니다. 새로 오시는 수사님이 점점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도 사실 이렇게 투어 진행하는 것보단 그냥 편하게 맥주 한잔 하고 싶어요.

 

투어 이끔이 수사님2.jpg

 

 

위와 같은 어려움은 코닝스호벤뿐 아니라 트라피스트 수도원 전체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특유의 엄격함과 폐쇄성은 진입장벽을 높게 했고, 가뜩이나 수사, 신부 자원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는 수도원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이는 맥주 양조라는, 매우 섬세하고도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현장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세계적 명품 맥주인 라 트라페의 양조 기술을 유지하고 전수할 수사가 더는 수도원에 없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코닝스호벤은 '비 수사 수석 양조사 채용'이라는 엄청난 실험을 선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도원의 이 같은 결정은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겼고 격론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생산과 운영 방식에 있어 수도원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을 원칙으로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양조사가 비수도자라는 것은 자칫 규율의 파괴와 세속으로 후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을 의식해서인지 코닝스호벤의 양조장 투어의 첫 과정인 설명 영상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우리의 맥주는 세속과 다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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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을 방문하면 투어도 투어려니와 입구 오른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그야말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라 트라페 맥주 라인을 모두 생맥주로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격도 한국에서 병맥주로 마시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만큼 가성비가 좋다. 라 트라페 맥주들은 장르, 도수를 넘어 모두 은은하며 부드럽고 목넘김이 경쾌하다. 아는 상당히 도수가 높은 복비어나 쿼드루펠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기분 좋게 취하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더욱이 방문했을 땐 보슬보슬 비까지 내렸으니 그야말로 낮술하기 딱 좋은 날이었던 데다가, 자주 마실 수 없는 오크통 숙성 쿼드루펠 생맥주까지 영접할 수 있었던지라 정말이지 취했다.

그 결과 나중에 강연할 때 사용하려고 애써 찍었던 당시 동영상 속 고상균은 풀린 눈을 하곤 말이 꼬이고,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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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

네덜란드 남부, 벨기에 북부에 위치한 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원 대부분이 그렇듯 이곳 역시 대중교통이 정말 아쉽다. 하여 운전이 가능하다면 렌트를 추천한다. 레스토랑은 동절기와 하절기 운영시간이 다르니 방문 전, 반드시 홈페이지를 통해 시간 확인을 하기 바란다. 아울러 시간 여유가 있다면 수도원 입구에 있는 여행자 숙소를 이용하며 하루 묵어가는 것이 어떨까 한다.

테이블은 실내와 바깥에 모두 있는데, 비가 와서 밖에 있진 못했으나 날이 좋다면 수도원 전경과 숲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외부 좌석이 좋지 싶다.

끝으로 상점은 술을 마시기 전에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장담하건대 한잔하고 가면 '와 여기 너무 좋은데!'라며 정신없이 구매하다 패가망신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다양한 유기농 제품과 맥주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다.

고상균 프로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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