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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한강 읽기'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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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posted Dec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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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안의 '여수'를 받아들이기

 

주인공 나(정선)은 지독한 결벽증을 갖고 있다. 그동안 정선과 함께 방을 썼던 룸메이트들은 그런 그녀에게 질려 떠나버렸다. 새로 구한 룸메이트 자흔은 여러모로 정선과는 정반대였다. 지저분했고 허술했고 덤벙댔다. 두 살 때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진 그녀는 양부모의 상황에 따라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자흔은 자신의 고향을 막연히 여수라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자흔과 맞춰 살던 정선은 기어코 여름에 다시 결벽증이 재발한다. 결정적으로 정선을 못 견디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47쪽)

 

자흔으로 인해 그날 여수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자신과 동생을 바다에 빠트려 죽이려 했던 그 날. 아버지와 동생은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던 그 충격적인 사건. 그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정선은 신경질적으로 자흔을 밀어내서 결국 그녀마저 떠나게 만든다. 정선은 막연히 자흔이 여수로 떠났을 거라 생각하고 그녀를 찾아 여수로 찾아간다.

 

이 작품은 결벽증이라는 증상으로 표현된 억압된 기억과 무의식의 재현을 통해 자아의 균열과 회복을 탐색하고 있다. 자흔이란 인물은 실제로 정선의 방에 머물다 간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자흔은 정선의 무의식이 분열되어 탄생한 또 다른 자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억압된 상처와 그 상처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심리가 만들어낸 인물. 여수의 냄새가 자흔에게서 풍겨온다는 것은 내부의 트라우마가 감각적으로 소환된 것을 의미한다. 자흔(自欣)은 어쩌면 '스스로 기뻐함'이란 뜻을 갖고 있을 것이다. 즉 억압된 정선이 되찾고 싶어 하는 해방의 상징 같은 이름 같은 것. 정선에게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떠오르는 바다에 대해 자흔이 이렇게 말하는 데서 이러한 단면이 드러난다.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57쪽)

 

이것은 죽음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동시에 그 품으로 도피하고 싶은 타나토스의 모순된 표현이다. 여수는 정선에게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지만 자흔에게는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며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다. 이는 곧 자흔의 본래 인격체인 정선에게도 해당된다. 자흔은 떠나지 말라며 자신을 붙잡는 정선을 어린아이 달래듯 품에 안는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정선의 심리를 이렇게 묘사한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포근하였다.(62쪽)

 

이 장면은 정선이 그동안 자신을 억압해온 트라우마와 마침내 마주하고 잃어버린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흔이 떠나고 나자 비로소 정선은 결벽증에서 벗어난다. 나흘 동안 한 번도 먼지를 닦지 않았고 강박 증상도 사라진다. 이는 곧 외부로부터 주어진 구원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통합을 통한 치유를 의미한다. 그렇게 정선은 자흔을 통해 자신 안의 여수를 받아들이고 죽음의 기억을 삶의 일부로 재편한다.

 

'가족의 상실'이라는 감옥

 

<여수의 사랑>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의식은 '가족의 상실'이며, 작가는 이 상실감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잠식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표제작을 포함한 수록작 전편에 걸쳐 인물들은 죽음, 실종, 혹은 가출로 인해 발생한 가족의 부재라는 덫에 걸려 있다. 이들에게 상실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생의 전반을 짓누르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 하게 하는 '감옥'이자 '지옥'이라는 기제로 작용한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족 해체의 비극을 체현한다.

명환은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자신도 장애인이 되어 희망없이 살아가며(어둠의 사육제), 황씨의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가출해 버렸고 심장병을 앓던 어린 딸은 결국 죽었다(진달래 능선). 인규는 어린 시절 동생 진규를 잃은 아픔을 평생 끌어안은 채 살아가고(질주), 동걸의 쌍둥이 동생은 의식불명 상태로 살다 끝내 죽게 되며(야간열차). 인규의 아버지 역시 익사했다(붉은 닻). 이처럼 이들은 모두 가족과의 단절이 남긴 폐허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개별적인 인물들이 갖고 있는 상처의 상호 텍스트성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 소설집의 독창성은 개별 인물들이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비추는 거울처럼 조응한다는 점에 있다. 이 인물들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자각하고 행동의 동기를 얻는다.

여동생을 진달래 능선에 버려둔 채 내려왔고 결국 가족을 떠나온 정환은 진달래 나무를 태우며 죽은 처자식의 재생을 기원하는 황씨를 보며 가족을 되찾고 싶어 한다(진달래 능선).

살 집을 잃은 '나'는 그런 나에게 집을 주고 싶어 하는 명환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자각하고(어둠의 사육제), 가족으로부터 떠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동걸을 대신해 '나'는 야간열차를 탄다(야간열차).

 

한편 개별적인 작품 간의 연결성은 인물들의 운명을 '만약(if)'의 가정법으로 묶어낸다. 만일 명환이 살아남았다면 황씨처럼 진달래 나무를 태우며 처자식의 넋을 위로했을 것이며(「진달래 능선」), 만일 진규가 죽지 않았다면 자기 반 친구에게 폭력을 가하는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붉은 닻」)는 서술은 비극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굴레라는 것을 드러낸다.

동생이 죽은 후 나타난 인규의 결벽증(「질주」)은 정선의 결벽증(「여수의 사랑」)과 마주 보고 있다는 점은, 상실의 고통이 병리적 강박으로 치환되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강의 인물들에게 정신적 고통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육체의 질병으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인숙의 간암, 동걸의 이명, 정환의 위궤양, 동식의 간경변 등은 모두 가족의 부재라는 정신적 외상이 육체에 각인된 흔적이다. 이는 내면의 붕괴가 육체의 붕괴와 궤를 같이한다는 작가의 인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 상처의 근원을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족의 붕괴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집이 보여주는 가족에 관한 세계관은 지독히 비관적이다. 타자나 사회로부터의 구원은 도래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깝다. 한강이 끈질기게 형상화한 이 희망 없는 인물들은, 세계의 폭력을 내면화하여 결국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존재들이다. 이는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등에서 언급한 '세계의 폭력'에 대한 탐구가 초기작부터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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