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아지기 전에
산책로에서 죽은 새를 본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불길한 조짐이다. 새가 죽었으니 곧 사람이 죽겠군.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우울하게 전개되리란 예상이 불행히도 적중되었다.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종류도 많다. 은희 남동생의 죽음, 시체를 태우는 인도 사람들 이야기(가장 늦게까지 타는 심장), 우울증에 걸린 K 선생님의 그림(심장),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 같은 죽음, 은희의 죽음.
죽음의 이미지는 너무 강렬하여 모든 감정과 생각과 기대와 미련과 후회 같은 것들을 마구 응축시켜 버린다. 죽음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희미한 그림자같이 존재감을 상실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독자를 긴장시키고, 곁눈질도 낙서도 못 하게 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며드는 느낌을 가지고 마음 졸이며 작가의 이야기에 끌려가게 만든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자주 옮기면서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지만, 독자의 기분이 같은 속도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장면이 바뀌어도 앞에서 그려진 죽음의 잔상이, 느낌이, 그리고 뒷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함이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다. 죽음 이야기에 나포된 마음은 좀처럼 풀려나지 못한다.
죽음 못지않게 심장 이야기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인상이 너무 깊어서, 마음의 목판에 칼로 음각을 새긴 것 같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다니. 우울증 걸린 K 선생님의 심장 그림 전시회, K가 본 전시실 그림 액자의 백지 귀퉁이에 0.3밀리 샤프펜슬로 쓴 나의 심장 이란 글씨. 주인공이 쓰는 글의 제목 심장.
작가는 아들 윤이 이야기와 과거의 은희 이야기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지만, 이미 바닥에 가라앉은 마음이 이런 이야기들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마저 없었다면, 독자는 물속 깊은 곳에 발이 묶여서 질식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인공은 은희 언니에게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라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주인공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로 시작하는 소설을 쓰려다가, 그녀가 회복되었다, 로 바꾸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이건 무엇을 암시하는가? 여러 죽음이 지나간 뒤에 주인공은 회복을 기대하는가? 아니 이제 회복되었는가? 회복은 이룰 수 없는 꿈인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로 시작하는 게 나을 듯싶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아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궁금하다.
회복하는 인간
앞글에서 그녀가 회복되었다, 로 소설을 시작할 거라고 예고한 대로 회복하는 인간이 시작된다. 시작부터 당신은 당신의 발에 뚫린 구멍들을 보고 있다. 직경 일 센티미터 남짓한 구멍들을. 시작부터 나는 구멍 뚫린 발을 가진 환자가 되어 움츠러든 기분으로 글을 읽는다. 내가 글 속의 당신이 아니고, 그 당신이 아니라는 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글을 읽지만, 어느샌가 그 당신이 내가 되어 있다가, 자의식이 살아나는 순간 슬며시 분리된다. 그렇게 당신과 내가 섞였다가 분리되었다가 하다가, 약간 조마조마하고, 약간 찜찜하고,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끝난다.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고, 나름 옷차림에 신경 쓰고, 어렴풋한 장난기가 어린 눈을 가진 당신은, 안타깝게도 언니와 가까워지지 못한다. 언니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니, 사람의 마음이 신기하기만 하다. 나의 결점이 다른 사람에겐 질투가 날 만큼 부러운 특성이기도 하구나. 당신과 달리 언니는 통념 속에서만 살아가려는 사람, 거북과 달팽이의 고요한 껍데기 집을 원하는 사람, 가족에게 터놓을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사람, 친동생을 불편해하는 사람, 삼십 킬로그램의 몸이 되어 살려달라고 아빠에게 매달린 사람. 그런 언니에게 당신은 다가갈 수 없다. 당신이 못돼서가 아니라, 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당신은 앞일을 모른다. 당신의 발을 의사에게 보여주고, 생살이 나오고,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고, 회복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 당신이 옛날 기분을 살려 자전거를 탄다. 달린다. 바람을 거슬리며 내달린다. 어느 순간 당신은 갈대밭 가장자리로 처박힌다. 이곳저곳 통증을 느끼며 일어나지 않는다. 누운 채 당신은 입속으로 기도를 중얼거린다. 회복되지 않게 해 달라고, 차가운 흙에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 달라고.
이 소설의 제목은 '회복하는 인간'이다. 무엇을 회복하는가? '회복하지 않는 인간'의 역설인가? 당신은 발의 상처를 회복하지만, 자전거 사고로 다른 상처를 만들고, 그 상처와 함께 누워있다. 언니와의 관계는 회복하지 못했다. 당신은 언니의 선물을 거부했었고, 언니는 당신의 선물을 거부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신은 무엇을 회복하는가? 기억을? 아린 기억이 끈덕지게 되살아날 뿐이다.
에우로파
'에우로파'는 친구 인아가 대학 시절 동아리 밴드에서 자작곡으로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다.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글 속의 나는 정체가 희미하다.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별 볼 일 없는 한 직장에 줄곧 다니고 있다. 서른이 되도록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보았다. 성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
나는 전역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복학생 시절에 인아를 처음 만났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인아를 만나면 오래된 애인처럼 덤덤하게 말한다. 나는 인아의 친구지만, 인아에게 애인이 있는지 잘 모른다. 인아가 남편과 육 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는 것은 안다. 나는 인아와 애인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인아의 집으로 간다. 누가 그러자고 말하지 않아도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카페에서 나는 인아의 입술을 바라보았고, 흰 티셔츠의 동그란 어깨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상체를 껴안은 다음, 두 손바닥으로 단단한 날개뼈들을 느끼고 싶어 했다.
인아의 집에서 나는 인아와 함께 화장을 하고, 다리털을 검은 팬티스타킹으로 감추고, 진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스튜어디스처럼 미색 스카프를 두른다. 가발을 쓰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인아에게 고백했다.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더 견딜 수 없는 건, 이렇게 내 삶이 지나가고 있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너는 모를 거야.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인아는 나와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자, 이제부터 우린 진짜 친구가 되는 거야. 아니, 자매도 괜찮아. 네 생일이 빠르니까, 이제부터 네가 언니야)
인아와 나는 공원은 산책하고, 쇼윈도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구두와 치마와 머리핀과 브로치들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타인의 시선을 견딘다. 경멸과 공포의 시선들, 때로 노골적이고 더러 은근한 시선들을 감지하며 걷는다. 지나치게 강렬함 감정이 담긴 시선을 만날 때는, 인아가 말을 걸고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다. 영화 속에서 살해당한 레즈비언의 죽은 모습을 떠올린다.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하고 아침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은 나는, 거울 속에서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본다. 인아가 꾸는 악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는 인아와의 내밀하고 외설스러운 관계에 대한 꿈을 꾼다. 고통에 가까운 애착을 느끼며 따뜻한 살을 비볐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나는 인아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 집을 나온다. 나는 저 불분명한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에우로파/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훈자
죽은 들고양이를 피하려고 무리하게 차선을 바꿨지만, 그 부드러운 육체가 그 여자의 차바퀴에 으깨어지던 감각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는 야근과 밤샘을 반복하고, 남편의 상황이 나빠졌고, 어린 아들은 혼자서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중 어떤 것도 그 여자가 지금 느끼는 고통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서른두 살의 그 여자가 깊이 생각하는 것은 훈자다.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러나 그 여자는 훈자를 컴퓨터로 검색하고 마음에 담아 사모할 뿐, 두 발로 직접 찾아가지는 못한다.
남편은 시간강사로 전전할 뿐 직장을 잡지 못하고, 친화력도 약하고, 아들을 보살피지도 않는다. 가계를 꾸리고 육아를 맡아야 할 사람은 그 여자뿐이다. 독박 살림 혼자만 하는 육아!
그 여자는 훈자를 오랫동안 생각했고, 훈자와 연결된 숱한 악몽에 시달린다.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다쳤다. 사고 직전에 아이는 멈추는 대신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세면 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 뭘로? 스피드 몬스터로.
그 여자는 이따금 자신이 은밀히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아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자문했다.
지치지만 견디는 것뿐이야
그렇게 거칠게 말하지 마. 나를 몰아세우지 마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
내가 안 죽였어
훈자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여자는 훈자를 검색하고 기사를 읽고 사진을 보면서, 훈자와 연결된다. 연결이 강해져서 결합이 된다. 관념의 결합인데 현실의 결합보다 약하지 않다. 그 여자는 생활고를 겪으며 남편과 아들과 함께 있다. 훈자도 고통 속의 그 여자와 함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실존에 붙박여 있는 고통.
파란 돌
은밀한 편지다. 편지 형식의 비망록일 수도 있겠다. 일기 같은 편지. 꿈같은 고백의 연서. 써보고 싶기도 하고 받아보고 싶기도 한 글. 아니, 받아보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겠다.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내주면 좋겠다. 읽고 또 읽으면서 하늘나라에서 행복한 비행을 할 것이다.
이 편지에 답신을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왠지 외설스러운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고, 악동뮤지션의 이수현이 미세먼지 없이 맑은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데, 남진이 코러스를 넣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방정떨지 말자.
서른일곱 살의 나는 열일곱 살에 만난 당신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쓴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라고 말했던 당신에게. 피가 응고되지 않는 당신은 길고 흰 손가락으로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며, 물길이 번지길 기다리는 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말은 붙이지 말고, 조용히 와서 그림만 보고 가면 괜찮다고, 당신은 내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걸 허락했다.
자살을 앞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일 년 전에 나는 사람들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네 시간이 넘게 오십여 통이나. 필사적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었던 건지, 좋은 추억들을 되살리고 싶었던 건지, 지우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상황과 기억을 희석하려던 건지.
파르스름하게 새벽이 밝아오던 때, 나는 노끈을 말아 쥔 채 산비탈에 서 있었다. 나는 잎사귀들의 색채를 명징하게 느꼈다. 순간 아이가 깨면 약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지 않으려고 현관 출입카드도 안 가지고 나갔지만. 경비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오자, 세 시간 전에 내 목을 조르다 말고 안방에 들어가 잠자던 그 남자가 거실에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가 깨지 않았다면, 나는 현관문을 열고 다시 나갔을 것이다.
나는 노끈을 보면 여전히 견디기 어렵다. 포장끈, 리본, 줄자 같은 건 보이는 대로 치워버린다. 더 견디기 힘든 기억이 있다. 내 목을 조이던 손. 잠든 지 십 분이 되기 전에 목줄기에 느껴지던 그 손의 감촉, 따뜻한 첫 열기와 악력의 기억.
그러나 당신의 기억은 달콤하다. 두 입술이 만난 기억, 서로의 부드러움이 떠날 것이 두려워 뛰는 심장들을 맞붙이고 있었던 기억. 그 후 나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그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다. 당신은 꿈 이야기를 했었다. 죽어서 홀가분해진 당신이 개울에서 파란빛이 도는 예쁜 조약돌을 보았다고. 그걸 주우려는 순간,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갑자기 알게 되었다고.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벽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보았다. 우주에 새로 태어난 별 같은 형상을. 그러니까, 당신의 얼굴을.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오래전 꿈속의 당신이 주우려 했던, 그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나는 당신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오늘을 산다. 파란 돌 당신과 함께 산다.
왼손
그는 오른손과 왼손을 가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왼손은 타인의 손같이 움직였다. 키보드를 칠 때, 전화를 받을 때, 그의 의지에 따르지 않았는데, 신 부장 앞에서 야단을 맞을 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왼손이 쭉 나가서 신 부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중요한 순간에 왼손은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오른손은 의식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왼손은 무의식적인 정서의 명령을 받는지, 자의적으로 움직인다.
버스를 타고 낯익은 사람의 가게를 지나갈 때, 기억을 더듬기도 전에 왼손이 하차 벨을 눌러버렸다. 선혜, 그가 스물한 살 이후 줄곧 마음으로만 품었던 여자.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오른손으로 작별의 악수를 했지만, 갑자기 왼손이 뻗어나가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을 때, 주인공 못지않게 독자인 나도 당혹스러웠다. 판타지인가? 한강이 판타지 소설을 쓸 리가 없는데.
왼손은 그를 달콤한 연애의 세계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그가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치기도 한다. 선혜에게 작업용 커터 칼로 왼쪽 어깨를 찔릴 만큼.
칠 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는 어느 날 그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그는 왼손이 사고 치는 걸 막기 위해 결사적으로 아내 곁을 피한다. 왼손을 처단하려던 시도는 빗나가고, 왼손과 오른손이 두 마리 짐승 같이 뒤엉켜 싸우다가, 겁결에 칼이 가슴에 꽂혔다. 그는 피와 땀에 젖은 채 쓰러졌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상대를 이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왼손이 승리한 셈이다. 왼손의 승리는 그 자신의 패배다. 죽음이다. 그는 의지로 무의식적 움직임을 통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의지가 무의식의 힘에 무너지면서, 그 자신도 무너지고 말았다.
노랑무늬영원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면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하는 그의 말에 배어 있는 무관심, 의무, 조용한 위선을 나는 듣는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잘 다녀와. 독자인 나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주인공 나의 위선을 본다. 위선들이 충돌하면서 복잡하게 꼬이는 소설일까? 독자인 나는 엉성하게 짐작하지만, 이 소설에서 위선은 없다. 솔직함이 가득하다.
이 년 전에 나는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 차로 뛰어든 검정 개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되었고, 왼손이 으스러졌고, 척추에 금이 갔다. 그 후로 삶이 달라졌다. 불운이 불운을 불러왔다. 몸이 더 망가졌고, 일일이 남편을 불러서 가사를 해결해야 했다.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예전에 그림을 그릴 때는 내가 삶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튀어나와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매 순간 삶과 자신 사이에 생긴 거리를 느낀다. 이젠 두 손 다 틀렸어. 철저히 혼자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나는 친구 소진을 통해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사진관에서 옛날 사진을 찾아내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 4월에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던 기억, 발을 삐어서 그 남자의 등에 업혀 하산한 기억, 그 남자의 목덜미에 내 입술을 대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를 되살린다.
소진의 아들 진욱은 도마뱀을 키운다. 도마뱀 앞발을 보여준다. 앞발이 잘려 나갔다가 다시 돋아나는 작고 투명한 흰빛의 발을 본다. 진욱이 알려 준 도마뱀 이름은 영원이다. 노랑무늬영원. 나는 이 도마뱀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노랑무늬영원, 을 중얼거린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그 남자는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이 년 전에 강도의 총에 맞아서 죽었단다. 연민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울려온다.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린다. Q의 도록에서 영감을 받아서, 강하게 빛나는 불순물 없는 노란색을 만들어내고, 두 손바닥을 물감에 적신 후, 한지에 찍는다. 왼쪽이 이지러진 비대칭의 손바닥이다.
나는 낯선 꿈을 되짚어본다. 두 손목에서 돋아난 투명하고 작은 새 손. 열 개의 투명한 손가락들. 나는 팔뚝에 새겨진 선명한 노랑무늬를 들어서 햇빛에 비춰본다. 손가락뼈와 관절 들 사이로 플라타너스 잎들이 몸을 뒤집는 것을 본다. 저것은 빛인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왜 제목을 노랑무늬영원이라 했을까? 도마뱀처럼 새 손가락이 나와서 이전 생활을 회복하고 싶었나? 작가는 한두 개의 단어로 제목을 잡는다. 작품을 대표할 상징을 만든다. 독자는 작품을 다 읽기 전에는 제목의 의미를 모른다.
한강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정서는 고통이다. 악몽도 고통의 일부다. 관계에 금이 가는 것도, 삶의 운명을 바꿔놓는 것도 고통이다. 고통 때문에 운명이 바뀌는 것일 수도 있다. 한강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뿌리가 고통이라고 본 것 같다. 평론가 조강석은 연민을 선택했다가 그것이 오독이었음을 고백했다.
한강은 「빛과 실」에서 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알렸다. 소설이 출간된 후, 그녀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보자.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외딴집이 정전됐을 때 촛불이 얼마나 밝은지 보려고 보일러 센서 등을 가리고 냉장고 코드를 뽑지 않아도 된다. 거인 같은 그림자가 천정에 일렁이는 걸 보려고 초를 들고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
살갗에서 눈이 녹는 감각을 기억하려고 손이 빳빳해질 때까지 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마다 가장 가까운 산을 향해 택시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울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 바람 부는 자정에 천변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산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