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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한강 읽기'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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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부서지고 끊어지는 삶 속에서...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posted May 14, 2025

쉽게 부서지고 끊어지는 삶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별하지 않는다.jpg

 

 

한강은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고 지독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이미 죽어 묻힌 뼈들을 살리려고 몸부림쳤으나 밀려오는 밀물을 감당하지 못해 '공포인가, 불안인가, 전율인가'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무려 4년의 시간을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의 몸으로 보냈다. 살고 싶어 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 나오는 몸.

 

이렇게는 살 수 없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런데 글쟁이의 운명, 문장 한 줄, 단어 하나를 허투루 쓰지 못하는 그 운명이 그를 살게 한다.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가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날아온 문자 하나! 존재를 생성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원초적 그 단어, 이름! "경하야."

 

짧지만 강력한, 한 마디이지만 너무 간절하여 애타게 부르는 이름!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당연히 "지금 와줄 수 있어?" 사진을 전공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다가, 이제는 목수가 되어버린 인선이가 병원에 누워 있다. 베트남 밀림 속을 헤매며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들의 찢긴 삶을 인터뷰하고, 1940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했으나 지금은 치매 노인에 불과한 할머니의 일상을 다루더니, 서투른 목수가 되어 전기 그라인더에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30센티미터 가깝게 베이고, 무너지는 통나무 더미를 막으려다 왼손 집게손가락 인대가 끊겼었는데, 이제는 두 개의 손가락 마디가 잘려 나갔다. 베이고 끊기고 잘려 나간 이들의 삶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그런데 잘린 것을 이어 살리려면 계속 피를 내고 고통을 주어야 한다. 삼분에 한 번씩 바늘로, 간신히 이어놓은 바로 그 손가락 부위를 찔러야 한다. 손이 잘려 나간 순간 정신을 잃었고, 그를 발견한 이웃의 트럭에 실려 갈 때 잠깐 정신이 든 사이, 인선은 경하의 책에 나오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 나간 사람들!' 아마도 인선은 손가락에 바늘이 닿을 때마다 경하 책의 주인공, 어머니의 아픈 추억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며 다닌 어린 시절 여자아이'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너무나도 가벼워 존재의 무게마저 느끼지 못하고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죽을 수 있는 앵무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하를 부른 것이다.

 

너무나 가볍고, 부드러우면서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갑작스레 제주로 발걸음을 옮긴 경하가 맞닥뜨린 것은 누군가의 어깨에 앉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눈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럽고 이렇게 가볍고 어쩌면 너무나 따스한 그 눈이 한번 휘몰아치면 자비란 없다. 눈과 함께 휘몰아치는 바람은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말끝을 끊어버리고, 살갗을 얼어붙게 하고, 동상으로 발가락을 잃게 만든다.

 

짙은 어둠이 몰려오는 저녁,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발을 헛디뎌 건천 어디론가 굴러 떨어진 경하의 얼굴 위로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그런데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로. 살갗이 얼어붙은 건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이 덮이고 있는 건지 알 듯 모를 듯한데, 살며시 눈을 덮어주는 그 얇은 눈꺼풀에 내린 눈송이들은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몸은 차갑게 식어가는데, 가장 여린 눈꺼풀이 따뜻하다.

 

문득 경하는 생각한다. 만주벌판까지 내몰렸지만 끝내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은 눈 속이 더 포근했다고 했다는 그 말을. 동상으로 발가락 네 개가 떨어져 나갔는데,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았다는 고백을. 그리고 경하는 떠올린다. 인선이가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이고,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이 바로 지금 자기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경하는 인선의 새를 살리려 왔으나, 그는 새를 묻어야 한다. 그가 새를 살리려 급하게 서두른 덕에 마지막 비행기 편으로 섬으로 왔고, 다행히 인선의 마을로 데려다줄 마지막 지선버스에 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운을 타고 경하는 위험 속으로 떨어졌고, 새는 결국 마지막을 견디지 못했다. 새를 묻고 보게 된 인선이의 남은 다큐멘터리 인터뷰 필름들!

 

제주 4.3 사건의 현장을 겪었던 체험의 언어는 열이 오르게 하고, 몸을 떨게 하고 살에 닿는 모든 것을 차갑게 만든다. 꿈인지 생시인지, 경하는 인선과 함께 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인선이 경하에게 묻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경하가 대답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인선이가 되뇐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는 왜 이 소설이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빌었을까? 사랑은 무엇이며, 그가 끝내 작별하지 않고 싶었던 것, 아니 작별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내내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를 막무가내로 오가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경계 소실의 장면들을 그려낸다. 낮인지 밤인지, 자욱한 눈보라 속에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보이는 것인지 못 보는 것인지 헷갈린다. 경계가 무너져 모든 것이 불확실한 그 공간에서는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이 엇비슷해 보이고, 혼(魂)도 죽을 먹고, 아무리 아파도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는 새처럼 모순이 역설로 뭉쳐진다. 그래서 인선이 경하에게 묻는다.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 전설의 바위 이야기를 한 여인이 뒤돌아보았기에 돌이 되었지만 죽은 건 아니라고 말한다. 돌로 된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것이라고. 그렇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지 모른다. 그래서 군이 데려간 사람들, p읍에 있던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현재는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모두 총살된 사람들. 빨갱이라는 이유로 젖먹이 아기도 절멸당해야 했던 그 죽음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랐던 작가는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연으로 내려간다.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한문덕 프로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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