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은 나와 세계 사이에 놓인 칼에 대한 이야기다. 칼은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을 가로막는 직•간접적 요인들을 가리킨다.
무엇에 대해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의 출발이고 잘 알아가면서 재구성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은 통로일 수도 있고 깊은 사유의 결과일 수 있다.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그들이 가진 중요한 인식의 통로가 닫혔거나 닫히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자'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비상한 능력을 보여준다. 자모로 분절되지 않은 문자로 한글이 읽혔고 자모를 구분하면서부터는 자음이 모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깨닫는다.(16)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까 '여자'에게 언어는 분열되지 않은 입말과 글말을 통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을 잃고 나서는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75)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그녀에게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로 통하는 문이고 얽히고설킨 인식의 뭉치를 풀어낼 실마리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다중언어를 구사하며 책을 보아야 하는 고전문헌 학자다. 그는 책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 문이 닫히는 중이다. 시력을 잃고 있지만 결국 문자를 잃는 것이고 자신의 몸 안에 갇혀버리는 상황을 맞고 있다. '잘 보이지 않으면 먼저 소리가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43) 고백은 처음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알게 된 말(청력)을 잃은 사람과 눈을 잃은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침묵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침묵의 질감과 시간의 질감은 몸을 통해서만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요인으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인간 간의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이,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 대해 깊은 이해에 다다른 것 같지 않다. '…듣고 있나요?'를 거듭 말하고, 심장과 심장을 맞대었어도,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그들 사이엔 칼이 가로놓여 있다. 서로에게 핵심적인 인식의 통로를 잃은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서 서슬 퍼런 모습으로 떨고 있는 칼을 극복하지 못한다.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한강에게 '말을 잃은 여자'의 침묵은 말을 함부로 대하고 사용하는 시대에 대한 항변일지 모르며,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사유를 학살하는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에 대한 상징일지 모른다. 죽은 언어인 고대 희랍어를 통해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칼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에 경고를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뱀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모습에는 보르헤스의 삶이 '복붙 Ctrl+C, Ctrl+V'되어 있다.
한강은 '보르헤스 앓이'를 했는지 모르겠다.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한강, 음각의 미학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다 혹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명제는 예술의 사회적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예술의 영역 중 이 명제에 가장 부합하는 대상은 글로 쓰이는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의 문학일 것이다. 글만으로 전달되는 명확한 사상과 정신이 있고 이를 통해 형성되는 시대정신은 문학만이 역사에 기여해온 영역이다.
한강의 작품은 초기의 단편에서부터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들은 별의 탄생과 소멸처럼 끝없이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뭉쳐지고 다시 폭발하며 다른 시간과 배경 속에서 태어나고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작품들을 통해 보이는 방식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음각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을 세상과 종종 단절시키는데 그 단절한 회피나 소거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내부를 깊게 파내는 작업처럼 보인다. 바깥으로 향한 돌출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드는 심지어 자기를 소거하는 음각의 흔적을 갖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폭력적인 세계와 관계를 끊으며 몸을 비워 내고, 결국 스스로를 식물로 변모시킨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소극적인 행위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파내어 드러내는 행위이다. <소년이 온다> 같은 작품에서도 광주의 집단적 트라우마 속에서 인물들이 말을 잃고 침묵으로 살아가는데 이 침묵 또한 부각된 음각 같이 기능한다. 한강의 인물들은 상처를 봉합하기보다는 그 자리에 파여 있는 흔적을 남기고 독자들은 그 음각의 형태를 따라가면서 말하지 못한 고통과 소외를 역으로 감각하게 된다. 음각화는 한강의 문학 속 인물이 상처나 결핍, 침묵을 통해 자신을 절개해 내며 그 공백이 오히려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역설적 형상화이다. 이는 침묵이 곧 언어가 되는 방식으로 희랍어 시간에서도 나타난다.
양각이 돌출된 부분이 색을 받아 드러나는 방식이라면 음각은 파여 있는 자리를 통해 형태를 새기고 형상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즉 자신을 지워 냄으로써 배경이 전면화되고 그 배경 속에서 존재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스스로를 지워내지만, 그 자리를 통해 가부장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폭력적 규범을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에서 희생자들이 침묵하고 부재로 남지만 바로 그 공백이 국가폭력과 집단적 기억이라는 배경을 더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러한 특성은 한강 문학적 메시지의 판화적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상처가 판화처럼 찍혀 인간 보편의 질문으로 번져나간다. 즉 한강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음각화 할 때 그것은 작은 개인의 흔적에 그치지 않고 억압과 폭력에 대한 사회적 확산에서부터 고통에 공감하고 타자의 상처를 읽는 윤리적 감각,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이며 상처는 어떻게 존재를 드러내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확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학이 시대와 역사 앞에 증언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한강 작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방식"으로 응답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주체가 무조건적인 책임을 진다고 했다. 말하지 않는 타자들은 독자에게 윤리적 응답을 요구한다. 부재와 침묵을 통해서 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윤리적 장치인 셈이다.
역사의 질곡을 겪은 한국문학에서 증언은 항상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20세기의 많은 리얼리즘 문학은 목격자의 목소리와 영웅적 주체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현했다. 하지만 21세기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방식은 더 이상 동일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역사의 상흔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역사에 대해 냉소하고 우경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건의 직접적 재현은 종종 과거의 고정된 이미지를 반복하거나 역사적 진실을 단순화할 교조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한강의 문학은 그런 측면에서 부재를 통한 증언이자 살아있는 윤리적 감각이다. 세월호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아픔을 통해 한국문학이 도달한 영역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