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의 사랑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500일과 511일
1.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500일 상주~구미 자전거 순례 70km
5월이 되었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500일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공에서 내려온 소현숙은 어떤지 혼자 남은 박정혜는 어떤지.
2025년 5월 20일 화요일, 새벽 한 시에 눈을 떴다. 주말에 누적된 피로에 전날 전주 전북지방환경청 새만금 상시 해수유통 및 신공항건설 반대 생태계 복원 기원 월요 미사와 저녁 피케팅으로 지쳐 쓰러진 밤잠 이후였다. 새벽에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자전거 앞에 달 가방은 그냥 들기에도 무거웠다. 새벽 여섯 시 반쯤 집을 나섰다. 한 시간여 후 대전 주차장 도착. 자전거를 꺼내 1.5km 타고 대전역으로 이동.
여덟 시 육분 김천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 뉴스에서 오늘 낮 기온 대구 30도가 넘어간다고 했다. 이날 목적지 구미는 대구와 가깝다. 김천에서 상주행 기차로 환승. 열 시 직전에 도착한 상주역은 아담했다. 나무 깔린 레일을 건너 출구로 나와 망설이지 않고 자전거를 접어 택시에 올랐다. 시골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도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30분간 15.5km를 달려 기사님도 모르시던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상주 상풍교~상주보 11km
10시 35분 상주 상풍교에서 출발. 낙동강 따라 내리막길이라 순탄할 줄 알았는데, 경천대 부근에 깔딱 고개가 있었다. 성능 낮은 자전거에 무거운 짐까지 실었기에 경천대에 올라가 전망을 볼 여유가 없었다. 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전조등을 장착하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도남서원(道南書院) 앞에선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서원에서 조선 시대 학자들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그들이 이끌어갔을 그 시대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상주보~낙단보 17km
11시 40분 상주보 도착. 그간 말랐던 논에는 물이 차올라 있었고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모를 심고 있었다. 지난 세월호 참사 11주기 추모 자전거 순례 르포를 읽고 보내온 곡성 공룡의 문자가 떠올랐다.
'이제 모가 쑥쑥 자라나겠지요
모는 새소리 개구리 소리를 듣고 논으로 나갈 시간을 아는 듯합니다.'
낙단보~구미보 19+4=23km
오후 한 시 반쯤 공사 중인 낙단보 도착. 길은 비포장도로로 이어졌다. 자전거 도로인데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오른쪽으로 추월해 앞에 가 좌회전해 서더니 후진해서 다시 나를 지나쳤다. 운전석은 보이지 않았으나 창 내린 조수석에 앉은 눈이 노란 남자 얼굴을 보았다. 지난 희망 뚜벅이 때부터 입은 '한국옵티칼 고용승계 국회가 나서라' 몸자보를 보고 궁금해서 좇아온 게 분명했다. 앞면에는 '박정혜·소현숙 이겨서 땅을 딛도록!'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 자에는 옵티칼 배지를 달았다.
소현숙 조직부장은 지난 4월 26일 희망버스 다음 날인 고공농성 476일째 극심한 치통과 체력 저하로 내려왔다. 혼자 남아있는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이 제일 걱정이지만 피치 못하게 내려온 소현숙 동지도 걱정된다. 더할 나위 없이 최선을 다하고도 미안해하며 내려와야 했던 그이의 심정이 어떠할까. 생을 걸고 투쟁한 그이와 먹튀기업 니토덴코를 싸잡아 '사죄'라고 명명한 표어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햇볕이 따가웠다. 그래도 열심히 페달을 밟아 달렸다. 낙단교 부근에 오른쪽으로 식당들이 보였으나 굶을 생각에 지나쳤다. 그런데 옆으로 다리를 두 개나 더 지나며 2km 직진하니 막다른 길이었다. 땡볕에 되돌아가며 왕복 30분을 허비하고는 하는 수 없이 식당 2층에 올라갔다. 길을 물어본 주인의 친절한 응대가 고마워 비빔밥을 한 그릇 시켰다. 육회 비빔밥에서 육회는 빼고.
오후 두 시 반쯤 낙단교 건너 구미시 진입. 금계국이 양옆으로 가득한 자전거 길과 오른쪽 아래로 펼쳐진 습지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경관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태양은 뜨거웠고 나는 금세 지쳐버렸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타는 내가 이렇게 더운데 옥상의 박정혜 동지는 얼마나 더울까. 5월에 더위가 와 버렸으니 앞으로 여름을 어떻게 날까. 작년엔 얼린 생수병을 껴안고 버텼는데 그 여름을 다시 맞아야 하는가. 더위 걱정이 폭염 공포로 바뀌는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했다.
구미보~자전거휴게소~한국옵티칼하이테크=12.5+5.6=18.1km
오후 세 시 오십 분 구미보 도착. 편의점이나 가게 하나 없는 낙동강 길은 뜨겁고 길었다. 구미보 자전거 인증센터의 달궈진 의자에 뻗어버렸다. 잠시 후 역시 나처럼 지친 남자분이 땀을 뚝뚝 흘리며 뜨거운 의자 대신 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저어, 제 휴대폰에 지도가 보이지 않아서 그러는데 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어디 가시는데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요."
"22km 남았는데요."
"아흑. 아직도 멀었네요. 낙동강 길 처음 오는데 어떻게 편의점 하나가 없어요?"
"예, 이 길 쉽지 않아요. 10km쯤 가면 휴게소가 하나 있어요. 신식건물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았어요. 그리고 장거리 갈 땐 짐을 가볍게 하셔야 해요."
"고맙습니다."
먼저 온 내가 앞서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자전거 도로 옆에 충전소와 주유소들이 모여 있었다. 주유소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 지친 행색에 들고 있는 물병을 본 주인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가라고 했다. 정신이 없어 온수를 받으려고 하니 주인이 냉수를 받으라고 하셨다. 물통에 물을 잔뜩 채우고 염치 불고하고 커피가 있느냐고 물었다. 체력이 고갈되고 있는 몸에 카페인이 필요했다. 옆 충전소에 가서 물어도 없다고 했다.
비척비척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도 강렬한 햇살 아래 피어나는 오월의 강변 풍경을 놓치지 못하고 군데군데 서서 가는 둥 마는 둥 빌빌대는 사이, 구미보 인증센터에서 뵌 아저씨가 추월해 가셨다. 씽씽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보며 내 자전거가 얼마나 무거운지 게다가 앞에 매단 가방도 얼마나 무거운지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잘 게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 뚱뚱한 가방을 달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날이면 500일 되는 고공농성. 옥상 박정혜 동지 혼자 외롭게 두지 않으려고 침낭과 베개, 갈아입을 옷까지 터질 듯 넣은 가방은 여름을 방불케 하는 5월 한낮의 자전거 주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짐을 줄여 무게를 가볍게, 비움실천의 가장 큰 적은 자급자족하려는 자세와 개인용품을 포기하지 못하는 위생개념에 있었다. 하지만 그 무게에는 소현숙 동지에게 줄 선물도 들어있었으므로 나는 고행 끝에 선사할 내 진심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길이었다.
오후 다섯 시 십 분,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냉장고에서 카페라테와 평소에 마시지 않는 콜라와 이온 음료, 세 캔을 꺼냈다. 카페라테와 콜라까지 마시고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9km는 더 가야 하는데 5.6km 사잇길이 표시되었다.
금오공과대학교를 끼고 동산을 넘어 도로로 나왔다. 저 멀리 아파트가 보였지만 길을 건널 줄 몰라 반대 방향으로 가다가 카센터에 들어가 길을 물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해요?"
"니토요?"
주인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본사가 일본 회사인 니토덴코임을 알고 있었다. 알려준 길은 간단했다. 역주행 방향으로 찻길 따라가면 되었다. 사람 사는 동네로 나오니 교차로에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저만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출발부터 사진으로 소식을 전한 이지영 사무장에게 전화했다.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다고.
벌써 오후 여섯 시가 넘었는데 금방일 줄 알았던 산업단지는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에서 건너 트럭 운전사께 공장 위치를 물었다. 순간 왼쪽 종아리 근육이 수축하며 경련이 일었다. 땡볕에 영양보충제 하나 없이 달려온 70km. 탈진 직전이었다.
마침내 양포교가 보이자 우회전했다. 지난 2월 7일, 북풍한설에 길을 나섰던 희망 뚜벅이가 떠올랐다. 다시 좌회전해 인도로 접어들자 눈시울이 왈칵 뜨듯해졌다. 그 길 위에서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부채로 얼굴 가리고 걷던 박문진과 김진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하 10도 엄동설한이 영상 30도를 웃도는 초여름으로 변한 석 달 만에 그 길을 거슬러 가는데 고공의 박정혜는 아직도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오후 여섯 시 이십칠 분, 마침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도착. 불탄 공장 텅 빈 주차장을 자전거로 돌았다.
"박정혜 동지, 박정혜 동지."
불러도 옥상에 사람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종일 달궈진 텐트에 기진맥진 누워있을 테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노조 사무실 쪽으로 갔다. 사무실 앞에 최현환 노조위원장과 여성분이 서 있었다. 오른손을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멋지게 구호를 외쳤어야 했는데 당시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반갑기만 했다. 자전거에서 하차해 두 팔 벌려 최현환 지회장에게 갔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어디선가 신유아 문화연대활동가가 나타났다. 그이는 불탄 공장에 인형들 텐트를 만들고 있었다. 고공 위 박정혜가 외롭지 않게 인형들이 함께 있었다.
지회장이 가져다준 냉수를 마신 후 땀에 전 얼굴과 쉰내 나는 몸을 씻어야 하는데 노조 사무실 화장실 세면대엔 본사 측 단수 조치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변기 물도 폐수라 변기 안이 불그죽죽 변색하여 있었다. 생수를 조금씩 따라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와 노조 사무실에 들어가 의기양양 이야기했다. 오는 길에 승용차 한 대와 트럭 한 대가 내 몸자보를 보고 따라왔다가 다시 돌아갔다고. 말하면서도 느꼈다. 땡볕에 70km를 달려온 결과치곤 참으로 조촐하다고. 결국 나는 갖가지 원료를 섞어 향신료 한 방울을 짜내듯 노력 대비 극소량의 소산이 나오는 순례를 한 것인가. 하지만 하늘은 내 정성을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그런 게 치성이고 기도다. 내 작고 소박한 자전거 순례에 그날 위로가 한 마디 있었으니, 순례 시작과 중간과 끝에 사진을 보낸 보인, 청명, 니키, 지영, 완두, 리현 중 완두의 메시지,
'예수님은 그대 맘을 아실 것이요!'
그 밤 배현석 동지가 가져다준 스프레이 파스를 관절마다 뿌리고 노조 사무실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서 갖고 간 침낭과 베개를 펴고 잠이 들었다. 고공농성 499일째였다.
다음 날 깨고 보니 호텔이 따로 없었다. 전주 전북지방환경청 앞 새만금 신공항 환경영향평가 부동의 촉구 농성 천막에서 들리던 차량의 굉음과 도시 소음 하나 없이 아늑하고 고요함에 새삼 놀랐다.
고공농성 500일 차, 날은 밝고 기온은 급격히 높아질 듯했다. 새벽 6시 반부터 화장실 청소와 현관 신발과 우산 정리를 하고 창틀의 먼지를 닦았다. 노조원과 연대자의 호흡기 건강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전날부터 주방에 갇혀 탈출을 위해 유리창에 박치기하고 있던 어여쁜 작은 새도 바깥으로 나가게 해 주었다.
저만치 이른 아침에 변기용 물탱크를 채워주는 남자분이 있었다. 나야 고공농성 500일이 되도록 하루 와서 부산을 떨지만, 그런 분들의 노고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가 지금까지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전 아홉 시, 대구 KBS에서 고공농성 500일을 취재하러 나왔다. 반갑고 고마웠다.
지난 5월 19일에 고공농성 기사를 실어 준 한겨레 신문도 감사했다.
나는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간 <굴뚝새와 떠나는 정원 일기>를 소현숙 동지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지난 4월 26일 '고용승계로 가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희망버스'에서 쓴 편지대로.
이희은 동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사양해서 대신 정나영 동지가 내 자전거를 타보았다. 잠시 자유를 느꼈다. 박정혜 동지도 어서 내려와서 자유롭기를.
오전 열 시에 밤비, 코상, 민석, 말벌 동지 셋이 왔다. 십 분 후 오후 세 시에 예정된 평택 한국니토옵티칼 앞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지회장 차에 자전거를 싣고 20여 분 걸리는 구미역으로 갔다. 차 안에서 여전히 묵묵부답인 니토덴코에 대해 들었다.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외국인 투자기업의 횡포와 한국인 노동자들의 피해는 계속될 것이다. 2025년 6월 3일 대선 후면 달라질까. 아니 달라져야 한다.
고공농성 500일째인 박정혜 동지
2. 군산 하제마을 제53회 팽팽문화제
5월 24일 토요일 오후 세 시부터 한 전라북도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하제마을 팽팽문화제. 일 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 있는 캠핑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지부 지도위원과 장영식 사진가와 차해도 한진중공업 퇴사자와 고공농성 500일에 구미에서 만났던 말벌 동지 셋이 참석했다. 문화제 시작 즈음에 김진숙 동지에게 발언 시간이 주어졌다.
"(상략) 수라의 마지막 장면에 절망인 듯 희망인 듯 작은 구멍 속으로 숨어들던 너, 흰발농게. 바닷물이 막힌 게 13년이라 했다. 쩍쩍 갈라져 허옇게 말라버린 갯벌에서 넌 어떻게 견뎌온 걸까?
내가 풀 한 포기 없는 크레인에서 309일을 간절히 기다린 게 있었듯 박정혜가 불탄 공장 옥상에서 503일을 애타게 기다리는 게 있듯 어쩌면 생명은 기다림만으로도 쉬이 소멸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주먹보다 작은 너를 보면서 했다.
이제 곧 장마다. 인간들은 모든 걸 다 망쳐놓고 봄이면 산불이 두렵고, 여름이면 폭우와 혹서가 두렵고, 겨울이면 폭설과 혹한이 두렵다. 산불 피해자들은 가난한 농부들이었고 몇 년 전 장마에 장애인 언니와 어린 딸과 함께 반지하 셋방에서 빗물에 잠겨 숨진 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조합원이었다.
말벌 동지들, 민주당 후보조차 새만금 신공항 건설과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공약이고 그게 진보인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문정현 신부님이 지키고자 하는 생명을 70년을 건너온 말벌 동지들이 함께 지켜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여름은 점점 더워지고 겨울을 점점 추워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눈부신 문명의 발전이 만들어낸 재앙. 내일모레 생일을 맞는 밤비 동지가 내 나이쯤이 될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광장의 목소리들이 흰발농게의 평화에도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투쟁은 끝나지 않듯 흰발농게가 포기하지 않는 수라는 흰발농게의 것입니다. 큰부리도요의 것이고 칠면초의 것입니다. 이 싸움도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고맙습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문정현 신부님이 이어서 마이크를 잡으셨다.
"1991년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여고 야고 보수고 진보고 싸그리 나쁜 놈들. 안 할 짓을 하면 나쁜 놈들 아녀? 어쩌자는 거여?
저 부안에서 군산까지 33.9km. 방조제 쌓아서 뭐한 거여? 막아놓으니까 거기다 농지를 만든다고? 이 멍청한 놈들아. 소금밭에다 농사가 되겠냐? 안 되지. 갯벌은 다 썩어가고. 뭇 생명 다 죽어가고. 어쩌자는 거야?
할 수 없이 하루 두 번 해수유통을 한다. 멍청한 놈들아. 그걸로 되냐? 안 되지? 거기다가 무슨 국제 골프장을 만든다, 국제 카지노를 만든다, 태양광 단지를 만든다. 야 이 미친놈들아. 멀쩡한 갯벌을. 그렇게 엉뚱한 짓을 한다는 거, 해서 된 일 있냐? 아이고 작년에 세계 잼버리 대회를 한다고? 그 창피를 누가 몰라?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에라이 정말 창피나 떨고 그런 짓을 계속하고 있어?
우매한 전라북도민들, 거기서 무슨 돈벼락 맞는 줄 알고 그거 안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전두환 노태우한테 속아서 지금까지…… 용납할 수가 없어.
내 동생 문규현 신부, 성직자라는 사람이 해창 갯벌에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를 해. 그래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아. 오체투지 그거 정말 사람 할 짓이 아닙니다. 그래도 새만금사업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거야. 거기다 돈을 얼마나 쏟아붓는 거야. 아이고. 그런 미친 짓 왜 하느냔 얘기야. 보다보다 볼 수가 없어.
시민활동가들이 세종시 국토부 환경부 앞에 천막을 쳐놓고 전주 전북지방환경청으로 옮겼어요.……그래서 내가 지난 3월 31일에 (그 앞에) 천막을 쳐놓고 지내요. 어찌나 더운지 올해 여름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 돼요.……(그래도) 내가 끝까지 할 거요. 저자들이 그거 무시하고 할망정, 할 소리는 해야겠다는 마음인데.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거기서 지내고, 팽팽문화제는 토요일이거든요. 팽팽문화제는 빠질 수가 없거든요. 오늘이 쉰세 번째인데 한 번도 안 빠졌거든요. 앞으로도 빠지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팽나무처럼 버텨봐야겠다. 600년 팽나무, 고려 때부터 견디신 팽나무처럼. 새만금 해수유통 하라. 하네 마네 하는 그런 땅을 또 메꿔서 미군기지 확장을 한다. 활주로 더 만들어서 연결해서 만든다. 여러분 화 안 나요? (나요)
야금야금 여기까지 먹어오더니 갯벌 메워서 활주로 확장한다? 새만금 국제공항이야? 1846년도에 김대건 신부님이 쪽배를 타고 상해에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한 분이야. 그런 데야. 거기서 미군기지 확장하면 중국이 가만있겠다. 중국민항이 뜰 수 있어요? 중국이 받아줄까요? 거짓말하지 마. 미군기지 확장이야. 미군기지 확장은 하면 안 돼. 더는 줄 수 없어. 이게 우리 마음이에요. 진짜 분해서 못 살겠어요.
저는 미군기지 근처만 오면 이 등골에서 설사가 올라와. 꼼짝을 못 해요. 화가 그렇게 나요. 한 달에 한 번씩 그런 다짐을 해야겠습니다. 600년을 견뎌온 팽나무 앞에서 우리도 팽나무처럼 꿋꿋하게 서서 자주(自主)하고 외세의 간섭 받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다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문정현 신부님
신부님의 공분을 달래듯 군산시립교향악단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 두 분의 감미롭고도 유쾌한 연주가 있었다. 일순 팽나무 앞에서 흥겨운 춤바람이 불었다. 격렬한 춤바람은 잔잔한 넬켄라인 댄스로 변하여 팽나무를 한 바퀴 돌았다. 모처럼 즐거운 에너지 소모 후 든든한 한 끼의 빠에야와 공룡 영길 샘의 연잎밥과 미역 국수와 들깨 수제비와 두부조림과 공룡 설해의 참외 샐러드 등으로 풍성한 식사를 했다.
팽나무 앞에 삼삼오오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국내 최장기 고공농성이 김재주 택시 노동자의 510일인데, 6월 1일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 동지 511일째예요. 그럼 국내 최장기 고공농성이 되는 거예요. 그날 저는 뭐라도 할 거예요."
내 말에 맞은 편의 김진숙 동지도 무얼 할까 고민하셨다. 곧이어 날은 어두워지고 해남의 나무가 팽나무 아래에서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며 노래로 공연했다. 그믐달이 가까워 적요하지만 따스한 밤이었다.
이어 공룡 설해가 준비한 팔레스타인 영화를 감상하기 직전이었다. 김진숙 동지의 야윈 어깨가 추위 속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움츠러들어 있었다. 나는 차 안에 있던 캠핑 의자를 조립해서 가져와 김진숙 동지에게 앉으라고 내드렸다. 일 년에 하나씩 사 모은 캠핑 의자 둘 중 올 초에 산, 기약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고 싶던 그 의자를 야외에 펼쳐 누군가를 앉힌 건 처음이었다.
팽나무 앞 해남 나무 공연
다음날 새벽 팽나무 앞에서 해남의 나무와 구미에 가기로 약속을 한 후 5월 26일 월요일 오전 아홉 시를 기다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이지영 사무장에게 전화했다. 고공농성 511일, 국내 최장기가 되는 6월 1일에 해남의 나무와 공장으로 가겠다고. 그런데 잠시 후 사무장이 전화했다.
"페이스북 안 하시죠? 방금 김진숙 지도위원님이 6월 1일에 구미역부터 공장까지 희망 뚜벅이 하신다고 올리셨어요."
"역시!"
3. 구미역에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까지 희망 뚜벅이 12km
2025년 6월 1일 일요일 새벽 여섯 시 반에 집을 나서 오전 아홉 시 반에 구미역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깃발을 들고 공주 옷을 입은 희망 뚜벅이들이 도착했다. 김진숙 동지도 오셨다.
구미역 출발
10시에 간단한 체조를 하고 출발했다. 약 서른 명의 희망 뚜벅이 선두엔 코상과 민석이 섰다. 장영식 사진가와 차해도 동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모 기자와 나 그리고 말벌 동지들.
지난겨울 걸었던 길을 거슬러 걸었다. 그 사이 말벌 동지들은 구미역에서 공장까지 다시 걸어갔었다. 그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공장에 방문해왔다. 그래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희망 뚜벅이로 얼굴을 익힌 말벌 동지 중 숲달이 말을 걸어왔다. 제주 제2공항에 관해서였다. 반갑고 고마워 2019년과 2020년에 작업한 르포를 알려줬다.
4km 걸어 도착한 양지공원에는 민주노총에서 준비한 수박과 떡이 있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처럼 공원에서 치솟는 분수도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남은 8km를 걷던 중 김진숙 동지 옆에서 잠시 걸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들었다. 직장(直腸)을 많이 잘라내서 하루 여섯 시간을 화장실에서 씨름해야 하는, 그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어 기차만 타야 하는. 그래서 옵티칼 노조 사무실에서 잘 수 없는 그이의 사연을.
국가 폭력에 의해 사라진 그이의 청춘은 추억거리의 유무나 이질(異質)을 떠나 병마의 씨앗을 받았던 시간이었다. 피해자가 엄연히 있는데 가해자는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무엇으로 40여 년의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는가.
이어 하나둘 사연을 듣게 된 말벌 동지들도 비정규직으로 억울하게 당한 일과 불확실한 미래를 토로했다. 나 역시 억울함이 가슴 가득한 채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희망 뚜벅이들의 밝은 걸음은 억울함을 알기에 연대하는 공감의 승화가 아닐까. 주유소 뒤편 그늘에 주저앉아서 아이스바 하나씩 입에 무는 것으로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는.
오후 한 시 반쯤 공장에 도착했다. 옥상에는 2024년 1월 8일에 올라가 511일째인 박정혜 동지가 보였다. 아래에는 내가 대전역에 도착했을 때 전주 전북지방환경청에서 출발한 해남의 나무가 도착해 있었다.
돌아가면서 박정혜 동지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말벌 동지들은 힘내시라고, 사랑한다고 했고 나는 평화바람 양말을 선물로 가져왔으니 내려와서 같이 신고 걷자고 했다. 김진숙 동지의 차례였다.
"제가 넷째 딸로 태어났는데, 엄마 아버지한테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제 생일을 몰랐습니다. 근데 엄마가 하지 감자가 나오는 철이면 이렇게 부엌으로 몰래 끌고 가서 감자를 딱 두 알 줬었어요. 그게 제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역국을 먹어 본 적이 없거든요. 그 하지 감자에 얽힌 사연을 듣고 나서는 저는 감자를 안 먹었다기보다는 못 먹었습니다. 제 삶을 관통하는 건 어떤 억울함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공장에 들어갔고….
얼마 전에 박정혜 동지가 인터뷰한 글을 처음 봤는데, 호텔경영학과를 나와 호텔에서 일하다가 생산 공장에 왔던 건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이 처음이었다. 여기서 십 년이 넘게 일하면서 여기서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는 말이 나는 무슨 말인지 알겠거든요.
저도 공장에 여러 군데 다녔지만, 한진중공업만큼 내가 여기서 뿌리를 내려야 되겠다는 공장이 없었어요. 그냥 여기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렇게 쫓겨난 게 저는 너무 억울했어요. 그래서 저는 박정혜 동지의 마음이 새롭게 다시 와닿았어요. 그래서 저는 박정혜 동지를 꼭 땅에서 안아 보고 싶어요. 그런 마음들을 저는 알 것 같거든요.
오늘 511일이라는 날이 와버렸는데요.
박정혜 동지,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가장 대단한 사람이고,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고, 가장 의연한 사람이에요.
저는 사실 박정혜 동지와 저녁마다 카톡을 나누는데, 박정혜 동지가 힘들다고 얘기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름이니까 덥겠죠. 거기도 그런 사정이 있으니까.…'
목요일마다 고공문화제를 하는데 여기에서도 해야 하지 않겠냐 하면 박정혜 동지는 '여기는 머니까요. 구미까지 오는 건 힘드니까요.' 늘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 게 어떤 때는 속상하기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그래요.
박정혜 동지, 너무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걸었는데 정말 덥네요, 오늘."
85호 크레인에서의 309일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불탄 공장 위에서의 511일. 일확천금을 얻고 싶다는 게 아니라 단지 다니던 공장에 계속 다니게 해 달라는데 회사는, 국가는 왜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드는가. 자본가에게 생산라인의 주체인 노동자는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존재인가?
울컥한 마음으로 둘러보니 불탄 공장 시뻘건 철판 앞에 있던 인형들이 사라졌다. 깜짝 놀라서 배현석 동지에게 물어보니 비가 와서 인형이 젖어 본관 현관으로 옮겼다고 했다. 슬리퍼가 쌓여있는 현관 안에 인형이 근사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현석 동지가 사물함에 이름이 있다고 했다. 정면에 이름이 보였다.
'이지영'
아마 근무할 때 슬리퍼를 신고 내부에 들어갔나 보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폐허가 된 공장 사물함에 사라진 명찰들이 더 많았다. 한참을 찾아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찾아보았다. 그들을 기어코 찾아내고 싶었다.
'박정혜' 그리고 '소현숙'.
둘은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아래위에 있었다. 둘은 같은 조였고 박정혜가 조장이었다던 지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슬리퍼를 갈아 신고서 했던 일과 사업장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는 지극히 평범했던,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공장 내부의 풍경을.
신발장의 이름들을 뒤로하고 공장 앞으로 나왔다. 흰 천막 그늘에 해남 나무가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장 안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었지만, 옥상의 박정혜는 땡볕을 우산으로 가리고 서 있었다. 한두 곡 부르던 나무가 뙤약볕 아래 홀로 서 있는 박정혜를 보다 못해 순서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다 함께 나와서 '아침이슬'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해남의 나무 공연
노래를 부르는데 울음이 복받쳤다. 합창이 끝났는데 오리곰이 갑자기 내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뭘 하라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내세요'가 아닌, 나도 모르게 나온 말, "사랑합니다."
동지애도 사랑이다. 사랑에는 책임과 헌신이 동반된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받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박정혜 동지에게 마이크를 올렸다.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동지들한테 많은 힘을 받고 있고. 또 가고 나면 허전하겠죠. (웃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하루라도 동지들하고 대면하고 이야기하고 많은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눈물 닦고) 응원에 감사드리고 동지들이 있기 때문에 저희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고 서로서로 응원하면서 … 하루빨리 이겨서 밑에서 동지들을 안을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박정혜 동지도 눈물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를 위한 희망 뚜벅이 출판기념회를 했다. 부산에서 구미까지, 구미에서 서울까지 희망 뚜벅이 기록이었다.
그날도 노조 사무실에서 자고 가는 말벌 동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박정혜 동지 곁에 있어 준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은 것, 힘이 되어주고 싶은 것.
현재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 청문회 개최에 관한 청원이 접수 중이다.
5월 22일에 시작했으니 6월 21일까지 5만 명의 동의가 있어야 국회에 접수된다.
청원 참여는 이곳에서 바로 할 수 있다.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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