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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a6de88

편지

posted Apr 1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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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jpg

 

 

안녕? 잘 지내는지요. 보고 싶다는 말을 하면 더 보고 싶을까 봐 미뤄왔던 인사를 이제야 합니다. 미안해요.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다는 약속이나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은 못 지키고 있지만요. 잔소리를 멈춘 당신 탓입니다. 그래도 나름 성실히 지내고 있어요.

 

지난 겨울의 일을 기억하나요? 나 혼자 기차를 타고 당신을 만나러 갔었죠.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오로지 나를 위해서였습니다. 코로나로, 대학 입시로 1년이나 못 만났더니 너무 속상하고 힘들었거든요. 입시 내내 수시에 꼭 붙어서 혼자 당신을 독차지하러 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입시도 성공해서 의기양양하게 내려갔었죠. 다시 생각해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입니다. 동시에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손을 잡고 같이 시장 구경을 하고, 둘이서만 찹쌀도나쓰를 사서 한 입씩 나눠 먹고, 차를 타고 여수의 섬들을 구경하고…. 망가지기 직전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도 들고 가서 열심히 사진을 남겼던 것도 기억납니다.

 

어렸을 때도 생각나지요. 어쩐지 선선한 여름 바람을 닮은 구석이 있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 친구네와 함께 정자 같은 곳에 앉아서 바다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즐겨 입으시던 푸른 치마가 잘 어울려서 그렇게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요. 어쨌든 그날도 생생한 날 중 하나입니다. 친구한테 당신을 자랑할 수 있어서 즐거웠거든요. 얼마나 신났었던지….

 

내 기억에는 없지만 당신 기억에는 있을 일도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내가 아주 아기 때의 일 같은 거요. 또 당신께 한글을 배웠던 일 같은 거요. 근데 정말 하루 만에 깨친 거 맞나요? 이미 여러 번 물어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서요. 나는 잠이 제법 많았다고 했는데 잠투정을 부리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그런지 사실은 그리워질 틈이 없었어요. 보고 싶으려면 보지 못해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얼굴이 떠오르지 않은 날이 없었거든요.

 

좋았던 일들만 먼저 썼지만 사실 미안했던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납니다. 우선은 아무래도 편지를 잘 하지 않은 일이지요. 몇 장 쓰지도 않았던 편지들이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제대로 된 편지를 해야지, 더 많은 이야기와 말들을 전해야지 했으면서도 생각한 대로 실행하지 못했어요.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외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전화 한 번 하는 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를 못했네요. 벌을 받는 건지 얼굴은 선명한데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내 잘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더 잘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어요. 당신이 영원히 건강하고 씩씩할 줄만 알았거든요. 헤어짐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날부터 나는 당신 눈도 못 마주치고 잘 웃지도 못했어요.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렇게 아파하는 당신을 보는 것도, 우리가 헤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속상한 티를 내서 미안했습니다.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강하고 선한 당신은 이미 다 용서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나는 내가 용서가 안 됩니다. 내가 나를 덜 미워하는 날이 언젠가 오겠죠? 지켜봐 주세요.

 

아닙니다. 지켜보지 말아 주세요. 여기에서의 모든 일을 잊고 지내주세요. 내 꿈에도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신다고요. 나는 그 말이 별로 믿기지는 않으나 믿기로 했으니, 가장 사랑하시는 분의 품속에서 평안만 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볼 그날까지, 다시는 보지 말아요. 또 편지하겠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께

똥깡아지가

 

연하린-프로필이미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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