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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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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바라지

posted Sep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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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바라지라는 따스한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앞장서는 이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뒷바라지를 해야 합니다. 앞장서는 이의 외로움과 뒷바라지하는 이의 고단함을 서로 소중하게 여겨야 일은 성사되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겠지요.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동조합 세종호텔 고진수 지부장이 일터의 비상계엄을 끝내기 위해 '정리해고 철회' '해고자 복직'을 외치며 고공에 올라간 지 반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눈썹도 까딱하지 않던 세종대학교 재단은 정부가 바뀌고, 노동부 장관이 현장을 방문하는 등 달라진 분위기에 변화의 움직임을 보인다고 합니다. 길목인 9월호가 읽힐 즈음에는 이미 고진수 지부장이 땅으로 내려오고 복직이 되어서 이 글이 구닥다리 이야기가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고진수 지부장의 고공농성으로 인한 본인의 어려움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에서 뒷바라지를 맡은 동지들의 수고 또한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됩니다. 고공농성을 시작할 때 그분들이 가장 염려한 것은 '밥'이었다고 합니다.

 

길목에서도 '도시락 사 들고', '도시락 싸 들고' 세종호텔 현장에 연대해왔습니다. 그리고 길목 조합원들이 속한 교회나 모임에서도 나름의 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새민족교회에서 매주 금요일 도시락연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5~6명이 번갈아 가며 당번을 정해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는데, 저 같은 전업주부보다는 직장에 다니느라 바쁜 청년 여성들 여러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은 평소에는 하지 못하다가 휴가 기간에 하루를 맡아 도시락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고진수 지부장에게 올릴 아침 도시락을 마련하는 일, 시작할 때 고민은 그가 호텔요리사라는 점이었습니다. 요리사의 숟가락 운동을 즐겁게 하는 비법은? 바로 집밥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식당에서 살 수 없는 엄마표 음식을 준비합니다. 봄에는 남편에게도 잘 안 끓여주는 쑥 조개탕을, 추운 날에는 배추된장국, 소고기뭇국, 여름에는 시원한 나박 물김치를 보온 도시락에 담았습니다. 단백질 음식은 물론, 채소를 많이 먹게 하려고 오이 당근 풋고추, 두릅 같은 계절 나물, 입맛이 없을 것을 염려해 자신이 가장 맛나게 먹었던 옛날 '사라다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합니다. 소화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새우 야채죽을 준비하고. 지난 복날에는 아침에 닭죽을 올렸는데 저녁에 다른 이가 또 닭죽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웃었습니다. 고공에 올라간 고진수 지부장의 상태와 밑에서 뒷바라지하는 그들을 생각하며 '내 밥'을 먹고 이 투쟁이 승리하기를, 이 도시락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며 음식을 준비합니다.

 

호텔 앞에서 아침 8시부터 시작한 선전전이 끝나고 복잡한 도로를 가로질러 고진수 지부장이 농성하고 있는 교통시설물 아래로 가면 그가 활짝 웃으며 힘차게 인사합니다. 쇼핑백에 끈을 달아 도시락을 올리고 나면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재빨리 발길을 돌려 현장에 계시는 분들과 아침 식사를 합니다. 때로는 함께 먹을 도시락을 푸짐하게 준비하기도 하고, 김밥이나 근처 식당에서 아침 한 끼를 나누며 이런저런 소식을 듣습니다. 여러 사람, 여러 분야에서 세종호텔 고공농성 현장과 연대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그만 정성으로 그 현장을 뒷바라지하고 연대합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어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 들고 명동, 많은 내외국인이 바쁘게 오가는 그곳으로 향할까요? 출근하기도 바쁜 아침에 정성을 다하는 청년들 몇 분의 마음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주영: 평소 도시락연대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출근 때문에 못 하다가 휴가기간에 짬을 내어 함께 했어요. 한끼라도 참여하니 동참했다는 뿌듯한 마음도 들고 늘 그런 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들의 수고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 덜었어요.

 

혜민: 요리를 잘 하지 못해도, 연대의 끄트머리에서라도 뭔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세종호텔 현장 예배 때 "모든 이의 입에 공평하게 쌀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평화다"라는 말을 듣고 고공농성 투쟁과 도시락연대가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고진수 동지에게 한 끼만큼의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다혜: 날이 좋은 5월부터 '한 끼 만드는 건 어렵지는 않아'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여름이 되면서 세종호텔에서 고공 농성장까지 잠깐 걸어가는 동안 너무 더워서 참혹하고 슬퍼졌어요. 나는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고진수 동지를 잊고, 아스팔트 위를 아주 잠깐 걸을 때만 고진수 동지 생각이 나서, 도시락연대를 하는 저 자신이 얄팍하게 느껴져 괴로웠어요. 그러면 굳이 나는 왜 이 도시락연대를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슬플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연대! '뭐라도 해야 마음이 덜 불편하니까' 이런 이기적인 이유로 하는 것 같아요. 고진수 동지나 현장의 동지들이 도시락에 너무 감사해하시는데 좀 당당하게, 당연하게 받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사실은 우리가 고진수 동지한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김진희-프로필이미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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