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관주의자는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주의자는 낙하산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세상에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모두 필요하다는 의미이겠는데, 저는 제가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확실해지는 건 제가 비관주의자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요즘 AI에 대한 이런저런 논쟁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6년에 이세돌이 알파고라는 컴퓨터한테 바둑을 졌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긴 했었지만, 인공지능이 일반인인 저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최근 2, 3년의 일입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서 진짜 사람하고 통화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언제부터인지 접었습니다. 간단히 무얼 확인하고 싶을 때도 요새는 네이버 검색창이 아니라 챗지피티를 켜고, 챗지피티에게 설명해달라고 말합니다.
제게 오는 내담자들도 챗지피티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계약서를 쓰거나 업무를 할 때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속상함도 챗지피티에게 토로한다고 들었습니다. 꽤나 괜찮다구요. 물론 들으나 마나 한 뻔한 답을 받을 때도 있지만, 아쉬운 대로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위안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럴 때면, 약간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AI가 읽거나 듣고 '이해'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생각해 봅니다.
AI는 사람처럼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내적으로 무엇을 경험하거나 생각하기를 통해서 '이해'에 도달합니다. 반면 AI는 어떤 단어가 나오면 그 다음에 나올 가능성이 큰 단어들을 '통계적으로 예측'하는 방식으로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AI는 '사과'를 만져본 적도, 먹어본 적도, 맛을 느껴본 적도 없지만, '사과' 다음에 어떤 단어가 오는지 확률적으로 가장 정확한 대답을 내놓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기에는 '이해한 것처럼 보이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챗지피티에게 물어보고 알았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아날로그 꼰대인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AI가 '학습을 하고' '지적'(intelligent)이라는 것이 접수가 안 된달까요. '이해'하고 '말하는' 목소리 너머로, 자신의 경험과 감정, 맥락, 언어를 종합하는 '주체'가 없는 무엇이 '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 아무리 해도 직관적으로 납득이 안 됩니다.
그러나 저의 '납득'과는 상관없이 AI의 발전 속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그것이 우리 생활에 미칠 영향도 가늠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들립니다.
일단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직접적일 것이라는 사실에 전문가들 간에 이견은 없습니다. 몇 년 내에 인간이 하는 일의 80%를 AI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물론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곧바로 현실화되지는 않겠지만 변화의 방향이 그러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일할 필요가 없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일이 없는 세상이 곧 올 거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비관론자인 저는 '일'을 잃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어떻게 발견하며, 남는 잉여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합니다. AI가 상당 부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많은 사람이 일할 곳이 없어지는 시기가 오면, AI로 벌어들인 부를 사회구성원들에게 분배하는 '기본 소득'이 보편화될 거라는 전망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올 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사회를 재편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과 혼란을 겪을지, 노동이 가치가 없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인간다움을 정의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낙관론자들은 AI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껏 불가능했던 세상을 이제 만들 수 있는데, 그 세상은 생계 걱정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정을 좇아 모든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창의성을 확장하여 현재의 한계와 가능성을 뛰어넘게 되면, 지금껏 상위 10%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AI의 활용은 놀라운 면들이 많습니다. 최근 캐나다에서 성인 남녀 약 300명을 두고 실험을 했답니다. 목소리만 들려주고 당뇨병 여부를 판별하도록 했는데, 상당히 높은 정확도(85% 이상)로 당뇨병 여부를 알아낸다고 합니다. 당뇨병이 목소리의 떨림이나 음색으로 드러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걸 알아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암 정복이 멀지 않았다는 선언도 갑자기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관주의자의 촉을 발동시켰습니다. '아니, 목소리만으로 당뇨병을 판별할 수 있다면... 다른 것도 판별할 기술을 개발하지 않겠어? 그런데 그건 다 괜찮을까?'
제가 떠올린 것은 약 20년 전에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왔던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였습니다.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근미래의 그 사회에는 범죄 예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자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 특수경찰이 개입하여 그를 체포합니다. 범죄가 없는 안전한 사회에서 살게 되어 좋은 일일지, 아니면 (저지르려고 하긴 했으나)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사람들이 체포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빅브라더의 통제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제 AI는 부정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입니다. AI를 잘 다루고 이해하는 사람이 더욱 유리해지는 세상이 될 테니, AI를 많이 다루어보고 공부하라는 말은 너무 뻔하면서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겁이 좀 납니다.
인류는 지금껏 수백만 년을 진화하는 동안, 자기보다 힘이 세거나 강력하고 빠른 존재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오히려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그러면서 함께 협력하는 능력으로 변화에 적응하며, 가장 번영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데 있어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그 존재는 쉬거나 자지도 않고, 무한대의 복제, 증식도 가능합니다.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문명사적인 대전환의 시기를 우리가 직면한 것은 분명한 일 같습니다. 우리가 '인간다움'을 규정할 때, 아마 자랑스럽게 가장 앞줄에 놓았을 법한 능력들이 더 이상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이제는 우리가 '인간다움'을 새롭게 규정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