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5: 고흐의 꿈과 닮은 맥주
트라피스트 맥주 준데르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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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앙코르와트를 방문했을 때였다. 정말 정말 가보고 싶었던 그곳에서 나는 살짝 이성을 잃고 있었다. 힌두교 창세 설화와 왕조의 서사를 담고 있는 회랑 부조를 따라가며 그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기 시작했고, 가면 갈수록 부족해지는 시간에 조바심은 극에 달했다.
나중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기마 궁사같이, 다리는 앞을 향해 잰걸음으로 분주히 움직이면서 상체는 회랑을 향해 돌린 자세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돌아 나오는 길에 유적 옆 돌무더기를 기댄 서양인(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책으로 얼굴을 덮은 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부러웠다. 지금 졸더라도 내일 다시 올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의 시간이 부러웠고, 조급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그의 여유로운 마음이 또한 몹시도 부러웠다.
내가 이렇게 종종걸음친 건 내 문제가 아니야. OECD 국가 중 가장 많은 노동 시간을 기록하는 대한민국의 구조적 문제지.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백인들이 여유로운 건 다 식민 통치의 결과잖아! 흥!
그렇게 애써 생각해 보려 했지만, 여행을 가서도 여유 없는 것의 근본은 어디서나 그리 종종걸음치고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움이 더욱 컸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후 여행에 들어서는 마음에 조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득 차게 세웠던 계획을 절반 정도로 줄이는 것, 그 절반은 가급적 현장에서 채워 나가려 해 보는 것,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 관광지도 좋지만, 거기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곳을 찾아보는 것 등으로 말이다. 지난 여행에서 준데르트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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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덕들에게 준데르트는 같은 이름의 트라피스트 맥주로 익숙한 이름이다. 동시에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빈센트 빌럼 반 고흐의 고향으로 알려진 지명이기도 할 것이다. 조금 규모가 있는 면 소재지 정도 될까? 준데르트를 생산하는 마리아 도프루푸트 수도원을 향해 찾아갔던 준데르트는 전형적인 서유럽 시골 마을이었다.
마리아 도프루푸트 수도원은 세계적 명성을 지닌 맥주 생산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하고 작았다. 이곳은 또 하나의 기막힌 트라피스트 맥주 '라 트라페'를 생산하는 코닝스호벤 수도원에 그 연원을 둔다. 애초 프랑스 북부에 있었던 코닝스호벤은 프랑스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구세력의 뒷배였던 당시 교회들에 대한 민중의 공격 가운데 도매급으로 넘어가 잿더미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이 같은 어려움을 피해 네덜란드 남부 숲속으로 이주했고, 오늘과 같은 지역주민 친화적인 수도원을 만들어나갔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딛고 수도원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 좀 더 소규모로, 좀 더 수행에 집중할 수 있는 수도 공간을 원했던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수도원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벨기에의 한적한 시골 마을 준데르트는 이 같은 꿈을 실현하기에 적격인 동네였다.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 수도원 앞에 도착했다. 승용차 네 대 정도 세울 법한 주차 공간 바로 앞에 보이는 소박한 단층 건물 출입문에는 방문자 센터 운영 시간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후 2시 15분에 열고 4시 45분에 닫는다.
아니, 하루에 세 시간도 열지 않는다니, 장사를 하겠다는 건 말겠다는 건가? 게다가 15분, 45분은 또 뭐란 말인가? 아무리 코를 박고 센터 안을 들여다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으니 2시 15분까진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센터 왼쪽으로 이어진 숲길이 보였다. 수도원 영지에 속한 숲은 센터 뒤편으로 한동안 이어졌는데,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숲, 신비한 일이 가득한 요정의 세계와 인간계를 이어주던 숲속 길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너 또 분주하구나. 2시면 어떻고 세시면 어떠냐? 지금은 좀 천천히 걸어 보는 게 어때?'라고 속삭이는 느낌 속에 천천히 걸어간 숲길은 수도원의 핵심 시설인 예배실로 이어져 있었다.
수익금 전액을 지역과 추구하는 선교적 가치에 사용할 것을 규약으로 정하고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저마다 특색있게 지역과 소통한다. 이를 위해 마리아 도프루푸트는 사색과 기도를 위한 숲과 함께 예배실을 지역민을 위해 언제나 열어둔다. 그 길을 따라 도착한 예배실은 이콘이나 성상 하나 없이 단출했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기도 못 하는 목사 10인 안에 들 가능성이 농후한 나 같은 사람도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침묵하게 했다. 그 가운데 이어지는 여행과 일상에 두고 온 과업들로 분주해진 마음과 그에 따라 가빠진 호흡을 느끼고 하나(느)님께 평화를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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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 베풀어 준 공간에서 침묵을 만끽한 후 천천히 돌아와 보니 수사 한 분이 방문자 센터의 문을 열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맥주에 대해, 또 왜 시간이 그런지 등에 대해 묻자, 시크하고 간단명료하게 답해 주곤 계산대 뒤편 의자에 돌아앉아 성서를 읽기 시작하셨다.
그건... 기도 끝나고 나오는 시간, 그리고 마치고 들어가 다시 기도를 준비하는 시간에 따라 정한 겁니다.
생각해 보면 질문이 참 쓸데없었다. 트라피스트 협회의 중요한 규약 중 하나는 제품 생산에 있어 수도원의 수행 일정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돈벌이를 위해 공장을 계속 가동하거나 수사들의 여력 이상으로 사업을 확대하면 협회는 즉시 제명을 통보한다.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소박함, 엄격함....... 마리아 도프루푸트 수도원이 세상 속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가치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센터 진열장에 놓인 맥주를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세속에 찌든 한 명의 술쟁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오크 숙성 한정판 준데르트같이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을 눈앞에 두고,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한데 과연 어느 누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일행이 '이제 그만 가자'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4시 45분까지 침을 흘리며 서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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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도프루푸트 수도원은 펍을 운영하지 않는다. 다만, 수도원과 마을 사이, 아주 가까운 곳에 고정으로 납품하는 펍이 두어 군데 있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다.
물어물어 찾아간 펍은 매우 고색창연했고, 이미 한잔하고 계신 분들 역시 그 같은 펍의 느낌과 같았다. 그곳에는 생맥주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게스트 탭과 함께 준데르트 병맥주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른 것을 마실 필요는 없을 것이니! 병을 열었을 때 몰려나오는 초콜릿과 구운 땅콩 향은 마시지 않아도 이미 기분을 설레게 했다. 거품과 함께 한 모금 깊이 머금은 맥주는 8도라는 꽤 높은 도수를 망각할 만큼 부드럽고 깔끔했다. 거기에 목을 넘긴 이후에도 입안에 오래도록 감도는 과일향은 감탄사를 연발하기에 충분했다. 행복은 분주함에 있지 않았다.
그렇게 준데르트에 흠뻑 젖은 다음 날, 중심가에 있는 반고흐 박물관과 그 옆에 있는 교회 건물을 찾았다. 앞서 언급했듯 준데르트는 고흐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그곳의 개혁교회 담임목사였던 아버지는 아들 고흐가 자신을 이어 목회자가 되길 희망했고, 그 마음을 담아 지금도 그때 모습으로 남아있는 교회 예배실 강대상 앞 제대에서 아기 고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준데르트에 있는 반고흐 박물관은 당시 고흐 가족이 살았던 교회 목사관을 개축한 것이다.
아버지의 꿈은 고흐에게도 중요한 삶의 가치가 되었다. 더 나아가 신앙의 소중한 가치가 소박하고 작은 사람들의 삶에서 실현되기를 바랐던 고흐는 신학 수업을 마친 후 목회 현장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곳의 담임목사는 지금 대한민국 개신교의 모든 문제를 간직한 이였으니, 돈 많은 교인에게 아부하고, 힘없는 신자에게 매정했다. 이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고흐는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그의 목회 실습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교회에서 희망을 잃은 고흐는 그림을 통해 계속 꿈을 이어가길 바랐다. 일하는 사람들, 감자 먹는 농민, 들판 등 고흐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은 고흐가 평생 간직했던 가치, 즉 작고 소소한 이들의 소박한 삶 가운데 실현되는 하나(느)님 나라였던 것은 아닐까?
고흐가 평생을 다해 꿈꿨던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참으로 위대한 작품들과 몹시도 단출한 공간에서 피어오르는 준데르트 맥주의 풍미는 무척이나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