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인문학 국내투어
수맥탐지 시즌 3
강릉편 여행기
'술과 페미니즘' 이 자극적인 유혹에 호다닥 넘어가서 얼른 수맥탐지 강릉편에 신청을 했다. 이번에는 시댁 가족까지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최고의 맥주 인문학에 동참하라고 꼬드겼다. 허난설헌과 폰보라와 크리스틴 셀리스… 과거의 그녀들을 강릉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또 시즌 1, 2 나주와 부산을 거치면서 맥주에 누구보다 진심인 현재의 사람들과 겹쳐질 시간들을 두근거림으로 기다렸다.
그리고, 짧은 1박 2일의 시간 속에 시대가 목을 죄고, 여자라는 이유로 가두었던 세상의 가치들에 정면으로 맞섰던 용감했던 그녀들을 만나고 세상 용감했던 시간 뒤에 조용히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 그녀들의 술의 역사를 아련하게 만났다.
수맥탐지 첫 번째 집결지는 허난설헌 기념공원이었다. 이번 웹포스터에 강렬한 유혹이 된 허난설헌의 『감우感遇』 세 번째 작품에서 허난설헌은 봉래산에 올라 내려다본 경포대와 동해를 술잔에 비유하고 달빛이 황금 술그릇을 비추고 있다는 엄청난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살았던 강릉의 풍경과 조선 시대 여성으로 살았던 절망이 오롯이 배인 공간을 돌아보며 딸에게도 똑같이 공부할 기회를 주었던 그 시절 페미니스트였던 아버지 허엽의 객사와 의지가 되었던 오빠 허봉의 귀양과 사망, 그리고 두 자녀의 죽음과 유산, 가진 것이라곤 아내에 대한 열등감뿐이었던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로 27세에 육신의 삶이 그대로 쇠하여 세상과 인연을 놓게 된 허난설헌을 만났다. 좁은 조선 땅에 가두기 힘든 그녀의 사상은 시를 통해 남긴 말과 같이 "향기는 끝내 죽지 않는" 난초처럼 지금도 살아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경포호 초입에 허난설헌의 시화인 "우리나라 그림 가운데 처음으로 여자아이가 등장한 그림"으로 알려진 미인아동도가 표지판으로 서 있었다. 그저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한국 회화사에서 특별하게 여겨지는 깜깜했던 시절을 살아낸 허난설헌 그녀를 기억하고 황금빛깔 술잔으로 애절했던 시대를 함께 위로하기 위해 다음 장소인 "버드나무 브루어리"로 향했다.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강릉의 대표적 수제 맥주 브루어리이면서 펍으로 오래된 양조장을 새롭게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이다. 오래된 양조장 특유의 벽돌과 목재 구조는 살리면서도 내부에 양조 설비가 보이고, 빈티지하면서도 감성을 제대로 자극하는 곳인데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 강릉의 재료를 맥주에 담아내는 "강릉에 대한 자긍심"을 갈아 넣어서 운영되는 점이었다. 솔잎, 창포, 국화, 오죽, 커피, 사천쌀 등 강릉을 상징하는 재료를 활용해 '강릉 맥주'라는 개성을 만들고 있었다. 더블 드라이 홉을 통해 묵직함과 부드움이 조화로웠던 경포 더블 IPA, 강릉 사천면 미노리의 쌀을 넣은 담백한 미노리 세션, 국화와 산초향이 특징인 벨기에식 밀맥주이고,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의 이름을 딴 '즈므블랑', 특별한 오크통 숙성으로 커피보다 진한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풍미에 집중한 12도의 묵직한 배럴 에이지드 임페리얼 스타우트까지 시음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만날 때마다 강의의 스킬이 업그레이드되는 고상균 목사님은 연기 스킬 아이템까지 장착하고 페미니즘과 맥주의 세계로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다. 여성 신학자이자 홉 맥주의 어머니 힐데가르트 폰 빙엔, 봉쇄 수도원 탈출을 감행하고 당당하게 마르틴 루터에게 청혼한 후에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양조장 사업을 흥행시킨 폰 보라 수녀가 등장한다. 양조장 사업이 남편 루터의 사망 후 결국 재산 상속권이 박탈당하고, 남은 재산을 털어 전쟁 난민을 구호하다가 전쟁으로 피난 중 마차에서 떨어져 중상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 폰 보라 수녀의 인생사는 또 시대적 분노와 함께 맥주를 부른다. 그리고 호가든 맥주를 탄생시킨 우유 배달 소년 피에르 셀리스의 맥주에 대한 고집과 대기업의 적대적 기업 합병으로 무너진 경영권의 상실의 역사, 그 가운데 양조사가 된 딸 크리스틴 셀리스와 같이 미국으로 넘어가서 셀리스를 설립했으나 다시 사브밀러에게 또 합병, 그러나 용감한 그녀 셀리스는 전통적 레시피의 전승자 지위인정 소송을 거쳐 '셀리스'를 찾아왔다. 지금도 모계 계승을 통해 셀리스는 남초적 성향이 강한 미국 크래프트 비어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며 나아가고 있다. (셀리스 화이트는 꼭 기억했다가 마셔봐야겠다.)
그리고 강릉브루어리 바이현에서 맥주로 가득 찬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다. 바이현은 소규모 수제 맥주 양조장으로 직접 배양한 효모로 맥주와 막걸리를 만드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가게 내부의 막걸리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막걸리 제조 과정을 상세히 그린 벽화와 함께 수제 맥주와 화이트 와인 같은 느낌의 세련된 막걸리를 함께 접할 수 있는 양조장 겸 펍으로 꽤 독특했다. 맥주와 막걸리로 나누어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즐거운 여행을 마무리하기 딱 좋은 곳이다. 더불어 여기서만 살 수 있는 기념품과 기념잔을 득템하여 깨지지 않게 아주 조심조심 집으로 모셔왔다.
시민사회단체에 근무하는 나의 눈에 이번 강릉편이 특별했던 이유는 강릉이라는 도시가 지역 기업, 지역 관광을 만들어가는 세련된 연결의 시너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점이었다.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지역 서점과 함께 책을 소개하는 '책맥' 프로그램으로 책을 구입하면 맥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하고, 강릉 지역에서 묵묵히 활동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해 그들을 위한 헌정 맥주를 만들고 이야기를 소개하는 '우리 동네 히어로' 헌정 맥주 프로젝트를 운영한다. 또 공간 일부를 지역 모임, 전시, 북토크, 공연 등에 무료로 빌려주는 '무료 대관 프로그램', 저렴하게 강릉 소재 단체에 무제한 맥주와 피자를 제공하는 '강릉 모꼬지' 행사 등을 운영하는 등 강릉의 공동체와 문화를 연결하는 허브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에 화답하듯 강릉의 행정은 편의점에서 기차역 특산물 판매장에도 버드나무 수제 맥주, 강릉 수제 맥주를 판매하는 포스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횟집의 주문 태블릿에도 카*, 테* 맥주보다 먼저 미노리 세션 맥주가 있었다. 관광이 아닌 이야기가 있는 여행을 지원하는 도시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수맥탐지 강릉편이 끝나고 나니 벌써부터 10월로 예정한다는 맥주 인문학 국내기행 '수맥탐지' 시즌 4 '다시 나주편'이 기다려진다. 나주의 맥주는 어떻게 지역 색깔과 청년의 용감한 도전을 담아내고 영글어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