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던 가나안 성도, 향린에 닻을 내리다
가나안 성도가 만난 정체성의 혼란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교회가 답답하고 고루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했고,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 '묻지마 신앙'을 당연히 여기는 교회들의 분위기에 대한 회의감이 더해졌다. 하지만 살면서 닥치게 되는 고난 앞에서는 다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끌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표류하듯 살았다. 내 주먹을 믿고 사는 독불장군 스타일의 간 큰 인간이 못 되는 내게는 하나님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회에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인류의 지혜 속에 안착해 보고 싶은 마음에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문제는 교회를 피해 달아났는데, 무엇을 읽어도 어디엘 가도 내 사고의 전개는 기-승-전-성서임을 확인하며 당혹스러웠다. 이쯤 되면 병?이 꽤 깊었다. 신앙을 가진 친구들은 시험에 들었다며 걱정을 했고 책보기를 그만두라고 권했다. 무등록 교인으로 구석에서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도망치듯 집으로 오거나 가나안 성도로 사는 그 기간 동안, 아무 데도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성서가 자꾸만 나를 쫓아오는 기분이 들었고,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중년에 겪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모든 종교는 인류에게 좋은 말씀, 가르침을 주는 거니까 다 비슷하다"라는 듣기 좋은 친구의 위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렇게 퉁 쳐버리면 그런 신앙으로는 삶을 바꾸는 지혜를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됐다. 그렇게 가나안 성도로 표류하던 나는 향린에 정박하게 됐다.
그리스도교 신앙 다시 세우기

향린에 온 첫 가을, 한문덕 목사님의 <그리스도교 신앙 다시 세우기> 강좌를 듣게 되었다. 목사님의 강좌는 믿음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믿음이란, 앎에 기반해 모름의 영역에까지 의연하게 대처하는 힘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무엇을 아는지, 제대로 아는지가 중요하고 앎이 늘어날수록 모름의 영역은 더 커질 수밖에 없으며, 이 모름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이었다. 감정적 흥분을 신앙의 열정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사람의 언어로 쓰인 성서와 하나님 뜻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성서 비평과 해석의 방법들은 그 간극을 좁혀주고 하나님을 만난 고백으로서의 성서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성서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 그리고 실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이해해야 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타자를 위해 희생하신 민중 사건의 중심이셨다.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 아래에서 수탈당하던 갈릴리 유대민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금 우리의 그리스도교 탄생 시작이었다.
그리고 초월적이며 내재적이고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언어의 범주 밖에 계시는데, 인간은 그런 하나님께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선별적으로 믿어 왔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공속적 관계 속에 민주적 하나님의 그림자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수님은 교주가 되는가?'라는 목사님 말씀에 순간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구원이란 각종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귀양살이에서의 귀환, 위험에서 구출, 눈 멂에서 눈 뜸. 죽음에서 생명, 병약함에서 건강함으로, 두려움에서 확신으로, 불의에서 정의로, 폭력에서 평화로 가는 일상의 모든 화해와 변혁 경험들이 구원의 과정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죽음과 종말은 시간에 대한 관념 차이를 기반으로 한다. 하루를 삶으로 하루를 죽어가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세계와 역사에 대한 태도와 신앙관의 정립. 개인과 교회 안에서의 의미와 목적. 자기를 내어주는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는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는 불의한 세계 안에서 어떤 스탠스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무거운 질문이 남은 강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사는 다문화적 다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7강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에 대해 살짝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종교 간의 대화와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인류가 공통으로 처한 어려움에 대한 해결을 추구하며 서로 돕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근대 자연과학이 발달한 이후, 자연과학적 사실 지식과 신앙적 의미의 해석 차이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구체적 실생활 속에서의 종교 생활이 인류에게 숙제로 남겨졌다. 포이어바흐, 프로이트, 니체, 맑스, 도킨스까지 다양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이론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강의는 지금 우리 여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제자로서의 삶은 심각한 무게로 다가왔다. 성령 충만한 수행하는 제자로서의 삶, 세계와 타자 그리고 타생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 명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합일되는 길. 특히 김재준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삼으셨던 십계명의 내용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은 도망갈 곳이 없다고 생각됐다.
향린에서 배우는 닻의 무게
진리를 설파한 고전들 사이를 떠돌다 정박한 향린에서 나는 뜻밖의 터닝포인트를 만난 기분이었다. 하나님은 왜 비슷비슷해 보일 수 있는 진리를 설파한 다양한 종교와 철학들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셨나 했던 의문에 대해 조금의 희망이 생겼다. 더불어 어쩌면 내가 부딪혔던 질문과 당혹감은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번쯤 만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슬람 사원 신축공사장 앞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는 뉴스, 거리 두기가 삼엄했던 코로나 시국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태극기 부대, 지하철 안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외치시던 어르신, 잊을 만하면 뉴스에 나오던 불교 문화재의 빨간 락커 훼손 사건, 남의 나라야 전쟁을 하거나 말거나,.... 기-승-전-성서로 나를 괴롭게 했던 생각들은 그렇게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했던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중년이 되어서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무심한 나와 세상 사이의 간극은 꽤 크고 넓었다. 이제라도 마주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시위 참가 한 번 안 해보고 학교를 졸업한 나는, 향린에 등록한 후 6개월 동안, 평생 다녀 본 집회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집회에 참석했다. 성소수자 친구들이 있어도 퀴어퍼레이드에 가 볼 생각은 한 번도 못 했었고, 어쩌다 지나는 길에 가끔 마주했던 고공농성의 현장은 그저 남의 일이었다. 정권 퇴진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의 촛불에 직접 참가하기보다는 주로 TV 뉴스로 구경했었다. 내 삶에만 온통 초점이 맞춰져 주변을 둘러볼 줄 몰랐던 탓이다. 서른셋 젊은 나이에 거대한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세상의 불합리를 개혁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지셨던 청년 예수님의 패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그저 한없이 도망가기에 바빴다. 성서의 가르침은 너무도 멀고 무겁게만 느껴졌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가슴과 생활 속에서 예수님은 소외되었고, 그저 어떻게 하면 더 안락하게 살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당당하게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보다는, 대충 타협하고 적당히 한쪽 눈은 감고 살기를 원했었다. 표류 끝에 정박한 향린에서 나는 이제 묵직하게 내려진 삶의 닻이 주는 무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새로이 떠나야 할 여정
나는 여전히 무력하고 두렵다. 태어나자마자 운명적으로 만난 하나님과의 인연은 아마 앞으로도 평생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임을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으며, 숨을 곳이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제자로서의 삶의 무게를 기쁘게 받아들이기에도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과감하게 외면하지도 못할 찌질스런 인간이다. 예수님과 성경 속 인물들의 인생 여정을 들여다보면,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걸 그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용기도 내게는 아직 없다.
강의 내용에 따르면 믿음은 앎에서 시작된다. 다르게 살고자 한다면 바뀌어야 할 나의 신념 체계와 그 신념을 떠받치고 있는 앎에 변화가 필요하다. 막연하고 흐릿하게 알고 있던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일생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야 할 이유다. 더하여 타인, 타종교, 타생명에 대해 더 공부하고 더 이해하고 더 대화해야 함을 이제 겨우 알기 시작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성가신 일이 생길까 봐 귀찮아서 숨어버렸던 나는, 이곳 향린에 와서 그전에는 가 본 적 없던 길, 살아 본 적 없는 방식에 맞닥뜨렸다. 조금쯤 두렵지만, 일상의 모든 화해와 변혁이 구원의 과정이라는 말씀에 희망을 걸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