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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10 - 정읍 동학농민혁명 길을 걷다

posted Mar 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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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일곱째별
발행호수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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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10 – 정읍 동학농민혁명 길을 걷다 

 

 

# 지난 이야기 

2022년 1월, 열흘간 하동에서 부산까지 200여km를 걸었다.

그리고 정읍시 고부면 만영재로 왔다. 

 

☆ 동학혁명모의탑과 은행나무 

2022년 2월 3일 목 만영재~동학혁명모의탑 왕복 7.6km

 

오후 4시 20분, 이미 겨울해가 기우는데 길을 나섰다. 

월요일도 아닌 목요일이었다. 서울에서 다년간 그 시간대면 집을 나와 동네 산언저리를 산책했었다. 몸에 익은 그 감각이 되살아났을까? 

목적지가 있었다. 차로 지나가다 안내표지판을 본 ‘동학혁명모의탑’이었다. ‘모의’라니 정말 신나지 않는가. 꿈을 이루기 위한 모의, 동학혁명의 시발점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만영재에서 29번 영원로로 나갔다. 지도를 보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서쪽 너른 논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지만, 동지(冬至)가 지난 지 한참이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고대 사람들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축제를 열었다. 그날로부터 밤이 짧아지고 낮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이다. 어둡게 전에 돌아올 것이다. 

 

새 모자를 쓰고 몸자보를 부착한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은 나는 다른 지역에서 보던 도보 순례자의 모습이다. 정읍에선 처음이다. 두 번이나 와서 살았으면서 공부와 일 아니면 좀처럼 집 밖 출입을 하지 않았었다. 

걸으면서 알았다. 걸어야 그 고장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두 해나 지나 세 번째 온 이제야 정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나는 참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적응도 그렇고 마음을 여는 것도 그렇고 이해하는 것도 그렇다. 무슨 말을 들어도 저의가 뭔지 한참 지나야 안다. 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표현은 너무 많은 생각으로 인해 엉뚱한 말이나 행동이 나갈 때가 많다. 그래서 종종 오해를 받는다. 남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잘 모른다. 하도 솔직해서 앞뒤가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이 대부분이긴 하다. 가끔 사람들이 내게 일관성이 없다고 말할 때 이해하기 어렵다. 내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일일이 설명할 순 없다. 다각도의 생각을 동시에 해서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할 때는 지니고 있는 기본자세가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좋게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해도 좋게 해석한다. 반대의 경우는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나쁘게 추측하고 단정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만수, 안영, 예천, 입석리를 지나 입석삼거리에서 고창, 소성 쪽으로 좌회전했다. 

지나가던 길에 본 ‘동학농민혁명모의탑 2.3km’, ‘무명농민군위령탑’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진선마을의 왕버들 보호수를 지나 구중마을로 가는 내내 안내판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바람만 차다. 그러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을 뵈었다. 

“안녕하세요? 이 길로 가면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나요?”

“날이 이렇게 추운데……. 이 길로 쭉 가면 길가에 서있어요. 날이 이렇게 추운데…….”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시골에서 만나는 할머니 대부분은 친절하시다. 할머니는 내게 그저 좋은 존재였다. 내가  호의로 대하니 그분들도 나를 적대시할 이유가 없었다. 대개의 경우라면. 

 

신중마을을 지나 회전교차로에서 갈림길이 나왔다. 안내표지판이 없다. 처음으로 지도 앱을 켰다. 이미 들어선 가운데 길로 300여m 앞에 있었다. 그 길로 쭉 가보니 주산마을에 정말 탑이 하나 서 있었다. 

5시 20분, 3.6km에 한 시간 걸렸다. 

 

향토문화유산 제7호 동학혁명모의탑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폭정이 극에 달해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외세의 침탈마저 노골화되어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원성이 하늘에 이르’던 조선 후기 ‘1893년 11월,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전봉준 등 20명이 모여 평등사회 건설과 우국충정의 불타는 마음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세상을 결의’했고, ‘그 결과 1894년 1월 10일 고부 봉기를 단행함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음을 기념하는 탑이었다. 1969년 4월에 건립하여 세월의 흔적은 별로 없지만, 옆면에 11월의 기록이 있었다. 

 

기념탑 네 면을 돌아가며 살펴보다가, 오른쪽 뒤에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모양이 묘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그루가 두 줄기로 나뉜 나무였다. 지면에서 30cm 즈음에서 한 번 갈라지고, 두 줄기가 60cm쯤 더 올라가다 또 각각 둘과 셋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갈라진 지점에서 둘이 딱 맞게 겹쳐 있었다. 금실 좋은 부부처럼 꼭 달라붙어 있는 게 좋아 보였다. 어느 한쪽 기울지 않고 나란히 위로 쭉 자라고 있었다. 

 

건전한 사랑이란 그렇다.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나란히 성장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사랑은 평등해야 한다. 함께 걷고 함께 주어진 일을 하고 함께 밥을 해 먹고 함께 자고, 같은 꿈을 꾸며 한 방향을 향해 속도 맞춰 나아가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다면 세상에 못 할 일이 무어란 말인가. 

 

탑과 나무 뒤로 너르고 풍성한 논이 펼쳐져 있었다. 저 넓은 땅에서 어마어마한 쌀을 수확했을 때 정작 농사지은 농민들 입에는 이팝이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얼마나 극심한 수탈이 있었을까?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평등사회를 이룰 꿈을 꾸었을 전봉준 등 20명. 두 명만 있어도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20명이라면 혁명을 도모하기에 충분하다. 그 모의의 결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지평을 연 민족사의 대사건으로 평가되’는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 

 

돌아오는 길, 서쪽으로 지는 해가 내 그림자를 앞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나는 그림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 때, 이른 아침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로 인해 서쪽으로 걸어가는 내게 긴 그림자가 생겼었다. 피터팬의 그림자처럼 내 발에 붙어있는 그림자가 나와 함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해가 있는 동안은 덜 외로웠다. 

곧 해가 지고, 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버스 노선이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느니 걷는 게 나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고부면 만영재로 돌아왔다. 

6시 20분. 모과나무 우뚝 서있는 검푸른 서쪽 하늘에 막 돋아난 상현달이 눈썹 같았다. 

 

 

DSC00403동학혁명모의탑과-은행나무_resize.jpg

동학농민혁명 모의탑과 은행나무

 

 

☆ 무명과 쇠귀  

2022년 2월 7일 월 황토현전적지~만석보~전봉준 장군 고택~ 전봉준 장군 단소~창동마을/덕천사거리~황토현전적지 왕복 18.6km

 

지난봄 못 가본 황토현전적지에 비로소 가보았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개장 전이었고, 넓디넓은 주차장에는 달랑 내 차 한 대뿐이었다. 황토현전적지가 그렇게 넓은 데 한 번, 하얀 눈 때문에 더 짙게 흙이 붉은 데 두 번 놀랐다.

 

자료를 받을까 해서 기념관으로 가보았다. 휴관일이라 해설사 대신 안내원이 있었다. 

샘솟길을 물어보자 모르셨는데 나무 지도 안내판 사진을 보여드리자 길을 안내해 주셨다. 

나가려다 말고 <1894년 그들_그림되어 돌아오다 歸還>전시가 있기에 들어가 보았다. 조명도 없어 어두운 기획전시실에 전봉준 장군 얼굴 네 점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힘찬 붓 터치가 강렬했다. 예술이란 무방비 상태의 마음에 훅 들어와 감동을 주는구나. 

 

 

DSC00449황토현_resize.jpg

황토현의 적토 

 

 

사적 제295호 황토현 전적지는 세 군데로 구획돼 있었다. 

제세문(濟世門) 지나 보국문(輔國門)을 지나 제민당(濟民堂)에 들어갔다. 

전시품 중 <각읍집강처전봉준통문(各邑執綱處全琫準通文)>이 눈에 들어왔다. 과장이나 허세 없는 단아하고 간명한 글씨체가 옆 전봉준 장군 영전을 다시 쳐다보게 했다. 군사전략가로 혁혁한 기세가 드높을 줄 알았던 그의 필체는 의외로 청렴한 마을 훈장이나 청빈한 문필가 선비의 것과 같았다. 단정하고 세심할 것 같은 마음씨가 느껴지는 필체였다. 

이런 분이셨구나. 전봉준 장군이 밤새 고심해서 쓰고 보내셨을 통문이 단순한 급진 혁명 세력의 파도같은 위력이 아닌 소슬한 달빛에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농민의 피를 담보로 하는 전쟁, 목숨 걸고 하는 싸움. 반체제 변혁의 꿈에 일개 자신뿐만이 아닌 수많은 목숨을 이끌고 계란으로 바위 치러 나아가야 하는 ‘정녕 죽으리라’ 결사 항전의 고뇌가 느껴졌다.

 

제민당 위에는 구민사(救民祠)가 있었다. 

맨 위에 ‘무명 동학농민 혁명군 제위’라고 쓰인 제일 큰 위패가 있었다. 여느 장군의 이름보다 위대한 무명 농민 혁명군께 두 손을 모으고 참배했다. 

 

안내원이 알려준 쪽으로 가보니 마을로 가는 길이 있었다. 가다 보니 우물이 하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남자들이 죽창을 들고 나가 싸웠다면 여자들은 그 우물 물로 밥을 해서 먹였다. 안내문을 읽다가 우물 화강암 받침에 제작년도로 추정되는 글씨가 있다 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우물 뒤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 귀한 글씨가 시멘트에 절반이나 묻혀 있었다. 동학혁명의 전승지라는 역사적 자랑스러움은 알면서 유적의 가치는 모르는 마을이 안타까웠다. 

 

 

DSC00475_resize.jpg

갑자년 2월

 

 

다시 길로 나와 안내판을 가만 보니 어딘지 이상했다. 아무리 방향치이지만 이 길이 영 아닌 것 같았다. 지도 앱을 켜 보았다. 반대 방향이었다. 이번에는 물어본 게 잘못이었다. 

700여m를 되돌아갔다. 마침 여럿이 산책하는 분에게 이평 쪽임을 확인했다. 

농로로 들어섰는데 옆에서 1톤 트럭이 섰다. 아까 그 여럿 중 한 분이셨나 보다. 

“이평마을 가요?”

“만석보 가요.”

“이평에서 쭉 가면 있어요. 태워줄게요.”

“아니에요. 걸어갈게요. 고맙습니다.”

노중년 여성이 1톤 트럭을 몰고 가시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시골에선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6, 70대 정도는 청춘이다. 나도 시골에 정착하면 트럭을 몰고 다닐까, 잠시 상상해 본다. 그보다는 (전기) 자전거가 필요할 것 같다. 

 

마을 쪽으로 가지 않고 계속 농로로 걸었다. 아무도 없는 길이 좋았다. 개천에 백로 한 마리가 저만치 서 있다가 내가 다가가면 날아가고 다가가면 날아가고를 했다. 새들은 청각이 예민해서 멀리서도 인간이 가까이 오면 더 멀리 달아난다. 새 한 마리 인간 한 명. 다른 두 종(種)이 거리를 유지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농로는 중간에 변화가 있었다. 진흙이 길을 덮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옆 개천에서 퍼 올린 시커먼 흙이었다. 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길가 잡초를 밟으며 가다가 살짝 언 흙 위를 밟기도 했다. 발이 푹 빠지지 않을 정도로 흙도 얼었고 나도 가벼웠다. 

저만치 굴삭기가 계속 흙을 퍼내고 있었다. 길은 더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진흙이 가득 찼다. 논으로 내려가 논두렁을 걸었다. 그 긴 농로를 따라 진흙을 퍼 올리는 반복 동작이 언제 끝날까. 저렇게 한 삽 한 삽 뜨면 곧 다 하겠지. 굴삭기는 한 삽 한 삽,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느린 동작 둘이 논 위와 아래에서 각자의 행보를 하고 있었다. 

 

 

DSC00490굴삭기와-나_resize.jpg

굴삭기와 나 

 

 

농로 가운데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다. 지난봄 만석보에서 본 나무인 줄 알고 반가웠다. 그러나 만석보까지는 4km 남짓 남아 있었다. 나무 앞은 철새들이 쉴 수 있는 강과 고운 흙과 억새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잠시 후 ‘조류독감 발병으로 출입통제 구역’이라는 푯말이 나왔다. 무서워서 길로 올라왔다. 서둘러 길을 빠져나와 부지런히 걸었다. 

 

만석보는 지난봄과 다름없었다. 다만 배들평야와 강변이 초록이 아닌 흙빛이었고, 봄에 보았던 나무는 아까 본 나무에 비해 왜소했다. 지방 기념물 제33호 만석보는 1892년(고종 29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동원해 축조한 댐이다. 이후 조병갑이 수세와 토지세를 강제 징수해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개선을 요구하다 수용되지 않자 혁명을 일으켜 1894년에 혁파했다. 

만석보에서 어떻게 돌아가나 하다가 내친 김에 전봉준 장군 고택과 단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루에 ‘대동의 샘솟길’ 2km와 ‘농민의 샘솟길’ 8km에 ‘전봉준 장군의 샘솟길’ 7km까지 다 걸을 셈인가? 총 4코스인 샘솟길 중 세 코스를 하루에 다 돌면 남은 건 ‘정의의 샘솟길’ 하나. 그럼 나머지 2월엔 어디를 걸으려고? 그런데 걸어서 돌아가는 방법뿐이었다. 

 

만석보 혁파 선정비를 지나는 길의 이름은 ‘혁파길’이었다. 뭐든 이름 따라 간다는데 세도 너무 셌다. 

예동과 연화와 하송 지나 이평마을의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에 자리 잡은 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 봉기 당시 고부 관아로 진출하기 전, 수천 명의 배들평 농민과 동학 교인들의 집결지’인 말목장터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전봉준 장군이 고부 군수의 학정과 수탈에 봉기할 것을 역설한 자리라고 한다. 지금 이평면사무소 맞은 편에 있는 감나무는 새로 심은 것이고, 2003년에 고사한 원래 감나무는 동학혁명기념관 안에 방부 처리해서 보존하고 있다. 

 

조소마을로 가는 길에 거대한 트럭이 좁은 길을 달려왔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물 고인 데서 3m 정도 떨어져 멈춰서 있었다. 그런데 나만한 트럭 바퀴가 고인 물을 밟자마자 그 물이 앞으로 튀겼다.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세한 황토 방울방울이 도트무늬를 찍었다. 도반의 생일선물인 새 모자에 흙탕물이 튀겨 속이 엄청 상했다. 그때부터 한기가 들어 춥기 시작했다.  

 

전봉준 장군 고택과 단소는 모두 몇 번씩 가본 곳이었다. 그런데 고택에 들러 단소에서 나오는 길에 새로운 걸 보았다. 정류장 옆에 드높게 서 있는 ‘전봉준장군단소’ 옆에 ‘쇠귀 씀’이라고 쓰여있었다. 신영복 선생님 글씨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그동안 그 필체를 못 알아본 게 죄송했다. 다시 갔다 나오지 않았다면, 걷지 않았으면 못 보았을 글씨였다. 

 

 

DSC00550전봉준-장군-고택_resize.jpg

전봉준 장군 고택

 

 

5km 남은 창동마을에서 버스를 탔다. 사무적인 기사는 이곳이 시(市)임을 기억나게 했다. 곡성군이나 해남군과는 달랐다.   

덕천사거리에서 내려서 황토현사거리까지 1.6km를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사소한 데 원리원칙을 내세워 남을 기분 나쁘게 했을까. 

날은 춥고, 다리는 10km 넘으면서부터 아팠고, 그때까지 먹은 거라곤 아침 8시에 먹은 식빵 한 조각과 고택에서 먹은 엄지손가락만한 영양바 뿐인데, 그래도 집에 가면 뭐라도 따뜻한 걸 끓여 먹을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가 갑자기 기운이 쫙 빠지며 힘이 들었다. 

그냥 5km 더 걸을 걸 그랬다는 후회와 뭘 그런 걸 가지고 스트레스 받냐는 자책이 마음 속에서 오고 갔다. 불친절한 건 기사인데 왜 화살을 내게로 향할까? 세상에 돈 안 들이고 남에게 좋은 일 할 수 있는 것으로 친절한 말이 최고가 아닐까? 나도 정말 못하지만 말이다. 

아침 9시 시작점으로 오후 4시에 도착했다. 7시간에 약 19km. 추워서 중간에 물도 제대로 못 마셨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초반에 돌아본 시간이 길었다. 

 

집에 돌아와 신발에 소독약을 뿌리고 입었던 모든 옷과 모자를 빨고 샤워를 했다. 인수공통 바이러스인 조류 인플루엔자(AI) 공포 때문이었다. 마스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가 가능하다. 이 시대에는 한동안 서로의 이가 드러난 웃음을 보기 어려울 듯하다. 

 

 

DSC00495만석보-가는-길_resize.jpg

만석보 가는 길

 

 

☆ 캔커피의 추억  

2022년 2월 14일 월 덕천사거리~황토현전적지~갑오동학농민혁명탑~도학초등학교~고부관아터~입석리~만수리 14.6km

 

날이 좀 풀려 도반으로부터 생일선물 받은 집업 트랙수트를 새로 입고 나갔다. 정류장에 버스가 오면 타고 안 오면 반대로 걸어가려고 했다. 황토현전적지에서 입석리까지 샘솟길 마지막 코스였다. 

 

만수동에서 버스를 탔다. 갈아탈 때가 되어 하차할 때 (환승을 위해) 카드를 또 찍는 건가 물어봤는데 기사가 돌아다니지 말고 앉으라고 불친절하게 대답했다. 지난주에는 기사가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기분이 나쁜가 보다 했는데, 두 번째 그러니 정읍 버스 안에 노인 교통사고가 많았나 보다 나름 추측해 보았다. 

그 자리에선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서서 상대방 입장을 상상으로 헤아리는 일은 몹시 피곤하다. 갈등이 싫으니 무대응으로 일관하는데 원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사건건 따지기 좋아하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입을 다무니 조용하긴 한데 그게 진짜 평화는 아니다.  

 

정읍역 근처에 내려 전기상회에 들어가 전기 스탠드 용 전구를 하나 샀다. 판매원이 친절했다. 기사의 불친절에 무반응하던 나는 판매원의 친절에 “친절하셔서 기분이 좋다.”고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판매원은 가게 앞까지 나와 내가 갈아탈 버스정류장을 알려주었다. 성격파탄이 아닌 이상 친절은 친절을 낳는다.  

 

덕천사거리에 내렸다. 동네가게 앞에 아저씨 두 분이 캔커피를 마시고 계셨다. 내가 즐겨 마시는 캔커피였다. 도보 순례 초반에 커피를 마시면 화장실 문제가 발생하지만 들어갔다. 안에서 느즈막히 나오신 주인에게 가게가 깔끔하다고 하자, 주인이 (손님이) 예전같지 않다고 하셨다.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정감있다고 느꼈는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나와서 가게 간판을 사진 찍자, 앞의 아저씨들이 물어보셨다. 

“왜 찍어?” (왜 반말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예뻐서요.” (가게도 주인도.)

“핵 발전소 꺼야지.” (네? 뭐라고요?)

나는 핵 발전소의 ‘핵’자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고 있었다. 내가 왜 걷는지, 내 행동이 어떤지, 내 옷이나 가방에 달린 헝겊에 뭐라고 써있는지 읽고 있었다. 

(한참 지난 지금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전기를 많이 쓰지 않는 소도시 사람들은 내가 무슨 좋은 일하는 사람인 줄 알고 고생한다고 잘해주었지만, 전기를 많이 쓰는 대도시 사람들은 내 행색만으로도 거부감을 느꼈을 수 있었겠다.) 

 

뚜껑을 비틀어 열고 커피를 마셨다. 미지근하고 달달하니 일희일비하던 마음이 여유롭게 풀렸다. 그 커피를 마실 때마다 5년 전 추운 겨울 서울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박근혜 탄핵’을 외치던 인파 속 기억이 떠오른다. 길담서원에서 만난 ‘금요영원’ 동무들. 우리는 그때 함께 있었고 어디론가 갔다 온 새벽님의 손에 까만 비닐 봉투가 들려있었고 그 안에 그 캔커피가 있었다. 

그날 이후, 그 캔커피를 보면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소리에 대성통곡하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해 주자, 만날 때마다 그 캔커피를 사주던 친구도 자동으로 생각난다. 그 캔커피는 추위를 달래 준 따뜻한 동무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내 추억을 소중히 하는 친구의 사려 깊음이었다. 

그런데 그 커피를 마시던 때 탄핵을 선고받은 대통령은 그 일로 집권한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사면되었다. 고작 이렇게 될 ‘촛불’ 그리고 ‘혁명’이었다니.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 겨울, 나는 24번의 촛불집회 중 22번을 참가했었다. 민중의 힘으로 뭔가 이룬다는 걸, 그리고 그 대열에 나도 함께했음을 직접 느낀 최초의 봉기였다. 그 촛불의 결과가 무엇인가. 인간적으로야 전 대통령을 긍휼히 여긴다. 하지만 동학 농민 ‘혁명’의 접전지 황토현으로 걸어가면서 다짐했다. 

  ‘다시는 차선을 선택하지 않으리.’

 

다시 황토현 전적지에 들러 무명용사들께 참배하고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동학혁명기념탑이 있었는데, 그 너머에 대나무로 만든 전봉준 장군 두상 그림과 배롱나무들과 수많은 깃발의 휘날림이 있었다. 작년 5월에 와보고 그 너머 황토현을 모르고 갔던 곳이었다. 

 

고개만 넘으면 고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몇 발짝만 더 가면 목표지점인 것을 모르고, 99% 노력해도 1% 부족해서 허사가 됨을 왜 몰랐던가. 

자책할 것 없다. 당연히 모른다. 미리 가본 사람이 알려주지 않는 한, 처음 해 보는 사람이 그 유레카의 순간을 어찌 알리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도록 아는 사람이 알려줘야 한다. 요령도 알려주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잘하나 못하나 지켜보는 건 그 사람이 성공하길 원치 않는 소극적 훼방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만약 정읍에서 동학혁명 깃발이 함성처럼 흩날리는 공터를 보게 된다면 그 계단을 올라가 보시라고 말씀드린다. 그 너머에는 혁명기념탑이 있고 그 아래에는 황토현전적지가 있다고 알려드린다. 가서 붉은 흙을 보고 그 기상을 가슴에 담아가시라고, 어디서든 용기를 잃지 말고 사시라고, 처절히 산화해도 반드시 부활할 거라고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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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함성

 

 

고부 관아터 가는 길에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 표지판이 있었다. 골목이 예뻐 들어가 보았다. 탐방로 수목 공사 중이었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데 고라니가 내 앞을 가로질러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대낮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서 고라니가 들어간 숲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돌아서 내려왔다. 마치 고라니가 ‘여기까지만이야.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고부 관아터는 1911년 고부 공립 보통학교로 흔적이 없었다. 고부 관아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탐관오리를 몰아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인 곳이었다. 그런데 ‘전통문화유산을 말살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던 일제’ 강점기의 만행으로 들어선 보통학교는 현재 고부 초등학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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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관아터 

 

 

전봉준, 김개만, 손화중 3인상 조형물이 있는 동학울림센터 앞 정자에 앉아서 쉬었다. 

오후 한 시가 넘어있어서, 헝겊필통에 담아 온 영양바를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필통은 커플인데 나는 혼자다. 혼자 있으면 뻘쭘해서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한다. 쑥스러워 작은 영양바를 얼른 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렇게 동학동민혁명 발원지 고부를 한 바퀴 돌았다. 

 

만영재로 돌아가는 길, 남영 정류장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동학혁명모의탑을 찾아갈 때도 깜짝 놀랐는데 이번에도 역시 놀랐다. 동작센서인지 단위 시간마다 나오는지 “CCTV 녹화 중입니다. 이곳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수 없으니 되가져가세요. 위반 시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가됩니다.”가 자주 반복됐다. 

대체 쓰레기를 얼마나 함부로 버리면 이렇게 시끄럽게 안내방송이 나올까? 일반 쓰레기 무단투기에 백만 원 이하면 핵 쓰레기 적재에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가. 

 

올해 초, 월성원전 고준위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고인 맥스터 건설 대가로 한수원이 경주시에 상생협력지원금으로 합의한 돈은 750억 원. 중저준위 방폐장(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 핵폐기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시설) 유치할 때 3조 5천 억 정도였고, 현금으로 3천 억 원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고준위핵폐기물을 보관하는데 보상금이 터무니 없이 적다. 그 중 경주 시내에서 약 30km 떨어진 핵 발전소 인근 주민들에게는 얼마나 돌아갈까? 천만 금을 준다고 해도 사람의 안전과 건강과 바꿀 수 있을까? 중수로형 핵발전소에 중저준위 방폐장도 모자라 이제는 고준위 핵쓰레기까지 떠안고 살아야 하는 월성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은 2014년 8월 25일부터 7년 5개월인 2731일째 이주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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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리, 우리 마을을 떠나게 해주세요

 

 

☆ 저수지 건너에서 본 마을   

2022년 2월 21일 월 만수리 저수지 둘레길 5km

 

날이 몹시 추웠다. 꽁꽁 두르고 나간 길은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샘솟길을 다 걸었으니 슬슬 동네 산책 겸 저수지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서당마을까지 가서 길을 돌아야 했는데 요행을 바라며 조금이라도 질러서 갈까 하고 동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여기저기 가족묘들만 띄엄띄엄 보이더니 저수지가 나왔다. 뺑 돌아 다시 길로 나왔다. 

겨울 산이라 길이 아닌 길을 헤쳐 논을 가로질러 간신히 차 다니는 도로로 나왔다. 반도 남쪽엔 허옇게 흰 눈 맞은 나무들이 지난밤 눈보라의 자취를 보여주었다. 철새들은 내 발자국 소리에 푸드득 날아가고 흰 눈 위엔 들짐승 발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누군가가 따라 걷는데 생명체의 종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고라니든 멧돼지든 내 앞을 걸어간 동물을 선배로 삼고 걸었다. 적어도 사람 중엔 내가 그 흰 눈을 밟은 처음이었다. 

저수지 맞은 편에서 만영재를 찾아보았다. 두승산 아래 저수지에 비친 마을이 맑았다. 다음 주면 떠날 만영재에 정이 들었다. 

 

 

DSC00742두승산-아래-만수리_resize.jpg

두승산 아래 만수리 

 

 

☆ 두승산  

2022년 2월 28일 월 두승산 등산로 10km

 

만영재를 떠나기 전날, 월성핵발전소이주대책위 상여시위와 함께하는 월요 도보순례로 두승사까지 다녀왔다. 그리고는 집주인인 원조 정읍댁 부부와 통밀빵과 제주 친환경 채소 샐러드와 커피로 조반을 들고, 다시 정읍댁과 산행을 했다. 

목표는 두승산 끝봉 정자. 그동안 아래에서 올려다만 보던 산꼭대기였다. 정읍댁의 인도로 가파른 길로 올라가 완만한 길로 내려오기로 했다. 중간에 한 번 쉬고 끝봉에 오르자 아래 만수리와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그리 가깝다니 놀라웠다. 

 

우리는 끝봉에서 하산하지 않고 말봉까지 더 나아갔다. 원래 목표지점보다 더 가는 것도 좋았고, 나 때문에 일부러 갔던 길을 다시 가신 정읍댁이 새로운 길을 가보신 것도 좋았다. 함께 걸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생긴다. 그건 길과 걸음에 대한 연대감 비슷하다. 

 

 

두승사쪽으로 올라갔다가 관음사쪽으로 내려오는 길, 마을 굴다리 아래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이 통한다는 그곳에 혼자 앉아 있으면 심심하니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려고 의자 둘 갖다 놓은 마음이 단란했다.  

 

하산해서 전날부터 싸던 짐을 마저 싸고 침구와 의복을 세탁했다. 내 짐들은 자동차 탈핵브리드 안으로 하나둘씩 들어가고 만영재 사랑채는 내가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또 길을 떠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지 모르겠다. 쉴만한 나뭇가지를 찾아 날아다니는 작은 새같은 나. 그래도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고 내가 살 빈집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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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다리 아래 두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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