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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9 - 2022년 시작을 도보순례로 2

posted Mar 0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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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일곱째별
발행호수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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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9 – 2022년 시작을 도보순례로 2

 

 

# 지난 이야기 

 

2021년 2~3월, 울진 망양정~포항 화진해수욕장 7번 국도 102.6km 

4월, 팽목항~진도대교 세월호 7주기 추모 도보순례 18번 국도 40km  

6월, 해남~보성 18번 국도, 보성~하동 2번 국도, 하동~구례 19번 국도 241.1km

7월, 보성~구례 18번 국도 104.5km

8~9월과 10월 첫 주, 해남~진도, 18번 국도 36.7km

10월 둘째 주~12월, 땅끝천년숲옛길, 땅끝길, 달마고도 등 148.04km를 도보순례했다. 

 

2022년 1월 1~5일 하동~진교~곤양~사천~진주~함안 95km를 걸었다. 

 

 

☆ 홀로 걷다 

2022년 1월 6일 목 함안역~창원시 마산회원구 북성로 365 + 국립3.15민주묘지 : 23km 

 

정확하게 하려면 지난 종착지인 군북역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군북역에서 마산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28km, 혼자 하루에 걷기에는 무리였다. 

금요일에 진해를 걸으려면 어딘가를 건너뛰어야 했다. 왜냐하면 토요일에 가덕도 신공항 부지 답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 치 길을 포기해야 했다. 

고심 끝에 같은 함안군인 군북에서 함안까지 11.4km를 건너뛰기로 했다. 마산 땅은 걸어서 밟아야 하니까. 

 

아직 어두운 아침 7시 10분, 호텔 3층 멀티샵에 갔더니 한 남자분이 조리를 하고 있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잠시 후 쟁반에 전날 신청한 볶음밥이 나왔다. 조식이었다. 하루 숙박비 4만 원에 따끈한 새벽밥이라니. 밥을 먹고 나서 하루 더 묵겠다고 연장했다. 

든든히 아침밥을 먹고 무료제공되는 카페라떼까지 마시니 한나절은 거뜬할 듯했다. 

여유있게 마산역으로 걸어가서 07:51 마산~08:05 함안 무궁화호를 탔다. 

 

함안역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혼자라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어야 했다. 

함안은 아라가야 역사순례길이 있는 고장이었다. 

신개마을에서 동쪽 산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걷는데 혼자 걸어도 좋았다. 아니 혼자 걸어서 좋았다. 그렇게 겁 많던 내가 어느덧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길을 헤맬까 봐 길가 카페 주인에게 길을 물었다. 동쪽으로 가라고 했다. 

 

괴항마을에 들어서자 고풍스럽고 신비로운 풍광이 나타났다. 기묘한 고목과 정한 연못과 그 위에 정자, 그리고 야트막한 산기슭의 고택들. 유형문화재 제158호 무진정이었다. 도보순례 초입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둘러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끌려 발길을 지체했다가는 그날 순례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좋은 사람이랑 다시 와야지 하며 아쉬움에 발길을 겨우 돌렸다. 그래도 대사마을에서는 돌아가서 석조삼존상을 보고 나왔다. 그것까지 안 보고 가면 무척 서운할 것 같았다. 

 

 

DSC09836-아라가야-역사순례길_resize.jpg

아라가야 역사순례길

 

 

한절골에서 동쪽으로 갔다. 아침 햇살을 향해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호젓하니 매우 좋았다. 그런데 어쩐지 참 좋다 싶더니 산으로 들어간 길은 협로가 되고 있었다. 이상해서 다시 돌아 나왔다. 마침 인가에 마을 분이 계셔서 여쭤봤더니 한참을 잘못 온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또 시작이구나. 

 

다시 한절골에서 새로 닦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오르막으로 갔다. 

동지산마을이 나왔다. 정자가 있어서 쉬기 딱 좋았다. 둘러본 마을도 양지바르고 좋았다. 

그런데 곧이어 사각 철창에 갇힌 개 두 마리를 보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길 따라가니 저수지가 나왔다. 입곡을 지나니 드디어 마산·창원 이정표가 나왔다. 

대천마을에 들어서니 산자락 따라 야트막하니 태양광 패널들이 늘어서 있었다. 

수동마을에서 애전을 지나자 함안군과 창원시의 경계가 나왔다. 

제일고등학교에서 다리가 아팠다. 

수곡마을로 접어들며 헤매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마산대학교가 나왔다. 

 

오후 한 시 반쯤 간신히 중리역까지 왔는데 더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와 발이 아팠다. 마산역까지 가는 기차는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는 수없이 계속 걸었다. 

두척마을 지나 서광교회 앞에서 전화가 왔다. 다음 날 만나기로 했던 탁이 하루 전인데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청명이 하는 것처럼 지인 찬스를 써 본 것이다. 마산에서 제일 가까운 지역에 사는 사람을 찾았다. 평소에는 연락도 없다가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도보 순례를 하니 끝 지점에서 차를 태워 출발지점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이었다. 청명과 못 먹은 아구찜을 탁과 함께 마산 아구찜 거리에서 먹었다. 서울 종로구 북촌에서 먹던 맛과 비슷하게 맛있었다. 밥을 먹고는 2008년에 개통되어 통행료가 2000원이나 한다는 마창대교가 보이는 카페에 갔다. 이름도 생소한 고급 카페라테를 마시자 모처럼 도시녀로 돌아간 듯 세상이 한가로웠다. 게다가 그날은 숙소도 정해져 있고 한번 묵었던 곳이니 마음이 얼마나 편했겠나. 혼자 하는 도보 순례 첫날치고는 아주 쾌적했다.

 

그러나 꼭 가 볼 곳이 있었다. 국립 3.15 민주묘지였다.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3.15의거의 영령들께 참배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 계신 분 중 찾아야 할 분이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묘역에서 나는 비석을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맨 위 층부터 맨 아래 층까지. 마침내 맨 아래 제1 묘역 우측에서 세 번째, 그분이 계셨다. 김주열 열사. 어둠이 완전히 내린 그분 묘지 앞에 무릎 꿇고 인사를 올렸다. 

  ‘12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4.19혁명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12년 전부터 마산이 궁금했었다. 마산 사람들의 긍지이자 자부심인 3.15의거의 불꽃 김주열 열사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이제야 왔습니다. 그때 그 미완의 다큐멘터리를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김주열 열사님 감사합니다.’

국립 3.15 민주묘역에서 내려다본 불빛 화려하게 검은 마산시는 이미 12년 전에 창원시로 바뀌어 있었다. 민주주의 역사고 뭐고 경제지표로 좌지우지되는 행정체제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DSC09900-국립3.15민주묘지에서-본-마산_resize.jpg

국립 3.15 민주묘지에서 본 마산

 

 

☆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

2022년 1월 7일 금 진해 마온게스트하우스~주기철목사기념관~웅천읍성+진해보타닉뮤지엄 : 12km

 

창원에서 진해로 가는 길은 터널뿐이다. 

진해는 산을 넘지 않는 이상 걸어서 들어갈 수 없는 도시다. 

깔끔하게 단념하고 차로 갔다. 마온 게스트하우스 옆 공용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나왔다. 

 

진해구청 쪽으로 걷는데 가로수 아래 나무가 눈에 익어 보니 동백나무였다. 보통 사철나무 등으로 담장을 치는 도로변에 동백나무가 직사각형으로 전정돼 있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동백나무에는 벌써 빨간 꽃들이 피어있었다. 진해의 인상은 동백 꽃나무로 부요했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지도 앱에서 가리키는 대로 갔더니 대로를 탔는데, 지난여름 줄기차게 걷던 2번 국도였다. 덤프트럭이 시속 70km로 달리는 차도 옆을 걷는데, 가끔 배롱나무 가지가 삐죽 나와 있었다. 긴장해서 온몸이 굳었다. 그 길을 한참 걷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아무리 직진이 빨라도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샛길로 빠져나왔다. 그랬더니 주기철목사기념관 이정표가 보였다. 그 길로 따라가 보았다. 

 

주기철 목사의 일생과 오정모 사모의 위업을 보았다. 가부장 조강지처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에서, 사별 이후이긴 하지만 그 시대에 둘째 부인을 ‘믿음의 영웅’으로 기리다니 뜻밖이라 반가웠다. 

주기철 목사가 일본 경찰로부터 당하셨던 고문 상황을 자세히 읽어보니 오래전 교회 청년부 시절이 기억났다. 철없이 순수하게 부르짖던 신을 향한 사랑. 왜 그리 울며불며 몸부림쳐야 했는지. 신을 향한 내 한풀이는 아니었는지. 그런 상념들로 스산하던 마음에 한 단어가 꽂혔다. 

 

‘일사각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 11:16)

 

죽을 만큼의 각오를 하게 하는 그 무엇이 지금 내게 있는가 질문했다. 

탈핵? 30년 전처럼 주를 위해서? 윤심덕과 실패한 다자이 오사무의 동반 자살처럼 사랑? 

오랜 세월 죽고 싶었고 종종 죽을 만큼 힘들거나 그 죽을 만큼의 열정으로 무언가를 했었다. 지금도 기쁘면 너무 기쁘고 슬프면 너무 슬퍼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목표치를 걷기 위해 근육통과 갈증과 고독을 감내하는 동안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건강함으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적어도 방 안에 틀어박혀 답도 없는 질문을 계속해대며 머리를 쥐어뜯을 시간에 움직여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살아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길을 보면서 살만함을 느꼈다. 

 

일사각오? 그런 비장함 없이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세상이 정한 기준은 나와 별 상관없다. 

명색이 작가라면서 단행본 한 권도 못 낸 주제에 전국을 떠도는 내 신세를 생각하면 어디 가서 작가라고 소개하기도 민망하다. 조금만 가까워졌다 싶으면 다들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렇게 사는데 경제적인 건 어떻게 해결해요?” 

원고료도 없고 인세는 더더욱 없다. 어쩌다 하는 강의는 두세 달해도 한 달 치 최저생계비 정도다. 그런데 도보 순례는 하루하루가 돈이다. 먹고 자야 하기 때문이다. 일사각오? 그런 거 없다. 조식을 주면 점저를 먹고, 아점을 먹으면 저녁을 먹고 그렇게 하루 두 끼 먹으며 제일 싼 데서 자면서 걷는 거다. 탈핵 몸자보 앞뒤로 달았다고 무슨 거룩한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방랑자일 뿐이다. 방구석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뛰쳐나온 사람이다. 기획에 따라 계약금 받고 사진작가랑 다니며 계획성 있게 글 쓰는 사람이 아니다. 거처를 나오면 걷고, 갈 데가 생기면 잠시 정착한다. 일사각오? 그런 거 없다. 그런데 기념관 전시 글 중 한 구절에 눈길이 머문다.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쓸어버려지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서 핍박받는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죽고 싶기만 하던 2017년 생일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운명을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다. 신 내린 보살이 아닌 별자리를 보는 분에게. 그때 그분이 말했었다. 

 

“당신의 원래 이름은 Young & Ease, 영원히 젊고 편안함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온 이유는 Devotion, 헌신이에요. 당신은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살 거예요.” 

 

전시문에 있던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은 별자리 선생님이 말한 내 소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들은 그달에 등단 소식을 들었다. 기원하던 세월호 참사 3주기 직전이었다. 

그 후 만 5년이 흘렀다. 내가 필요하다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갔다. 미친 듯이 걸었다. 매달 쉬지 않고 지금까지 수천 매를 썼다. 일사각오?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 전업 활동가에 비할 순 없지만 여기서 더 어떻게? 자신도 없고 할 말도 없었다. 정말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좀 쉬고 싶었다. 그렇게 주기철목사기념관에서 나왔다. 

 

그 앞에 성곽이 하나 보였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에 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와 인접한 제초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연해읍성이다. 읍성은 지나칠 수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은 우체국이 보였다. 무작정 들어가 떠오르는 사람 둘 중 더 편한 사람에게 관제엽서를 써서 부쳤다. 

 

우체국에서 나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낙안읍성처럼 성벽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그 길이는 매우 짧았다. 방전된 프로펠러처럼 순례를 이어나갈 동력이 떨어졌다. 주기철목사기념관에서부터 정체된 기운이 웅천읍성에서는 뚝 떨어져 더 걸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다시 2번 국도를 올라타고 싶지는 않았고 웅동까지 가는 길은 어찌 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가덕도까지 가기엔 턱도 없이 긴 거리가 남아있었다. 어디쯤에서 그쳐도 어차피 별 차이 없는 거리였다. 목표 지점이 어느 정도 가까워야 악착같이 걷는데 멀어도 너무 멀었다. 목표가 없는 거리는 걸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미적대다 특별한 랜드마크도 없는 지점에서 그날의 순례를 멈췄다. 정체전선 같은 날이었다. 

 

차라리 남파랑길 창원 8코스 7.6km를 걸었더라면 도보순례로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주기철목사기념관과 웅천읍성은 발걸음을 잡아당겼고, 나는 잠시 의욕을 상실했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들이 올라오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 그날은 그랬다. 

 

평소의 반만 걷고, 진해보타닉뮤지엄에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은 바다인 천혜 요소 진해의 지형을 바라보고 숙소로 돌아갔다. 

진해는 두 번째였다. 몇 년 전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에서 만난 숲해설가 바람의 초대로 벚꽃 피는 계절에 와서 숲의 정취를 느끼고 갔었다. 그때 광목 침구가 인상 깊었던 게스트하우스는 폐업했고, 대신 옆집을 소개받아 갔다. 

가정집 1층 안방을 쓰게 된 나는 주인의 환대를 받았다. 주인아저씨는 새똥이 떨어진 내 차를 물과 걸레로 닦아주셨고, 조식이 되냐는 질문에 주인아주머니는 준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조식과 늦은 점심밥 이후 저녁밥은 거른 채 씻고 일찌감치 잠들었다. 

 

 

DSC09947웅천읍성_resize.jpg

웅천읍성

 

 

☆ 아름다운 가덕도를 지켜주세요

2022년 1월 8일 토 가덕도 신공항 반대 현장답사 : 12km

 

다음 날 아침, 행장을 거의 꾸리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자, 떡과 군고구마와 바나나와 사과와 두유가 담긴 소반이 들어왔다. 융숭한 조반이었다. 식사를 다 하고 나자 주인 내외분은 원두커피도 내려주시고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를 위한 사진도 함께 찍어주셨다. 든든한 아침이었다. 

 

집결시각은 11시라고 했다. 나는 9시에 가덕도에 도착했다. 

전날 웅천까지 걸었으니, 웅동이나 부산 신항 어디쯤까지 좀 걷다가 가덕도에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운전해서 미리 가 본 도로는 잠깐 걷기에는 삭막하고 길었다. 버스 노선도 모르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걷고 다시 돌아갈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책이 없어서 빙빙 돌다가 가덕도로 가버렸다. 

 

가덕도에 처음 가 본 나는 눌차교가 어딘지 몰라 눌차마을을 차로 들어가고 말았다. 차가 다니기에는 매우 좁은 도로였다. 아담한 마을을 관통하니 방조제가 나왔다. 거기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갈맷길 코스 안내판이 곳곳에 보였다. 

동선방조제를 지나자 ‘가덕도 신공항 타운하우스 착공’ 부지가 나왔다. 가덕도 공항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편취급국을 지나 동선마을 안내문을 보니 가덕도는 1919년 3.1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4월 11일에 일어났었다. 이 작은 섬에서도 일제 침략에 격렬히 항거했다니, 과연 덕이 더해진 섬, 加德島(가덕도)였다. 그런 섬을 잘 보존해야 하는데 싶었다. 

 

천가초등학교를 지났다. 갈맷길 가덕도 5-2구간 이정표가 나왔다. 거기서 돌아갔어야 했는데 길이 발걸음을 잡아당겨서 덕문중학교 쪽으로 가고 말았다. ‘먼저 사람이 되자’는 표지석 너머 눌원관 앞에 ‘네가 해 준 좋은 말이 좋은 옷보다 더 따뜻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따뜻한 말이 듣고 싶고 따뜻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아무 때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고맙다는 말은 아무리 자주 해도 괜찮은데 사랑한다는 말은 오래 망설여야 할 수 있다. 

천가초등학교와 덕문중학교 담장의 일부는 조선 중종 39년(1544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된 가덕진성이었다. 옛것은 언제나 마음을 잡아끈다. 아마 그 성곽이 나를 이끌었나 보다. 

길은 산 쪽으로 올라가며 좁아졌다. 연대봉 가는 갈림길 즈음에서 주최 측 전화를 받았다. 서둘러야 했다. 정취에 빠져 단체행동을 잊고 있었다. 

 

11시, 눌차도에서부터 답사가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30여 명 중 모래시계 깃발이 있었다. 참가자의 반수 정도인 ‘멸종반란 한국’ 회원이었다. 

‘가덕도에 넘쳐 솟은 섬이 누워있는 모양의 섬으로 눌어붙어 있다’는 눌차마을에는 거대한 팽나무와 돌담이 있었다. 바닷가엔 조개껍질 더미가, 산자락엔 새로 지은 집들이 즐비했다. 땅 사이 바다에는 양식장이 가득했다. 신공항이 건설되면 어업은 마비되고 어민들은 생업을 잃게 될 것이다. 

곧 점심시간이었고 채식 도시락이 나누어졌다. 차에 있는 돗자리를 펼치고 함께 앉은 이들은 사드마을이 돼 버린 성주 소성리 사람들이었다. 가덕도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온 것이었다. 

 

 

DSC00062내눌마을_resize.jpg

내눌마을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에서 나눠준 <가덕도 신공항 정말 필요한가?> 자료에 따르면, 가덕도가 신공항이 대두된 건 2002년 김해 국제공항에서 중국국제항공(Air China)CCA-129편이 돗대산 기슭에 추락한 사고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당시 김해공항의 안정성 논란과 신공항 건설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2006년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 건설’ 타당성 공식 검토를 지시했다. 하지만 2011년 이명박 정부에서 입지 평가 결과, 밀양·가덕도 모두 사업 최소 여건 미달로 동남권 신공항 건설계획이 전면 백지화되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김해 신공항 건설계획을 재추진하며 결국 확정되었다. 2016년 파리공항엔지니어링(ADPi)의 사전타당성 조사 점수는 김해 신공항〉밀양〉가덕도 순이었다. 

그러나 2019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울·경 3개 지자체와 국토교통부가 김해 신공항 건설계획에 관한 총리실 재검증을 추진하여 ‘근본적 검토 필요’의견이 나온 이후,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 등 15인과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 등 138인은 2020년 11월 20일과 26일에 각각 특별법을 제출하였으며, 2021년 3월 16일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공표되었다. 

 

가덕도 신공항은 추진 과정에서 비민주적이었다. 

법안 수립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같은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수렴을 무시했고, 여당은 법안 통과를 위해 본회의 통과를 2월 26일로 못 박아 법안을 심의했다. 

특별법 제7조에 따르면 “기획재정부 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대놓고 졸속행정을 하겠다는 선포와 다름없다.

또한 특별법 16조, 17조를 보면 국토부 장관은 신공항 건설사업에 대하여 민간자본을 유치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민간자본 유치사업을 시행하는 민간개발자에게 각종 사항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토건세력의 이권개입 위험을 키우는 조항이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주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핵발전소도 신공항도 모든 건설의 배후에는 토건세력이 있다. 

 

국제적으로 보면, 기후위기 시대에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경제 선진국과 함께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나라에서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항공 산업을 부추김은 무엇이며, 전 지구적으로 보면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같은 인수공통 감염병의 가장 큰 원인은 산림 파괴라고 하는데 가덕도 신공항을 건설하면 파괴될 국수봉(269m), 남산(188m), 성토봉(179m)은 지형 보전 1등급,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 해양생태도 1등급 지역, 생태자연도 1등급지에 해당하는 동백군락, 사스레피 군락지를 비롯한 산림유전자원 보호 구역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가덕도에는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 2등급인 삵, 솔개, 수달, 매, 구렁이, 표범장지뱀, 맹꽁이 등이 서식한다. 인근에는 천연기념물 179호로 지정된 낙동강 하류 철새도래지와 습지보호지역이 있다. 

물론 돈 계산만 하는 분들은 이런 생태계 파괴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도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오미크론은 무섭지 않으시려나. 

 

신석기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역사가 다양하게 남아있는 가덕도는 2016년 파리공항엔지니어링(ADPi)의 영남권 신공항 사전타당성 조사 연구결과 문화유산 평가부문 0등급으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역사·문화적인 가치가 높다. 

 

우리는 대항전망대를 거쳐, 20세기 초 일본군 군사기지의 원형이 남아있는 외양포에서 조개무지까지 산기슭을 넘어갔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한반도 상륙에 대비한 포진지와 관측소들이 인공동굴로 남아있는 새바지에서 헤어졌다. 

바닷물에 씻긴 고목이 누워있는 해변은 어쩐지 태고와 20세기가 섞인 듯한 분위기였다. 다만 대형 카페와 그 안의 손님들과 해변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사람들만이 풍광과 어울리지 않게 이질적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어디까지 파괴하고 나서야 개발의 삽질을 멈출까? 그게 제 무덤 파는 일이란 건 죽고 나서야 깨달을까? 

누런 개 ‘탈핵’이는 조약돌에 코를 대고 뭔가를 찾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발견해야 할 진리나 가치를 쉽게 찾지 못하듯 탈핵이도 끝내 먹을 것을 발견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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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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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포 조개무지 

 

DSC00122-가덕도-새바지(우)_resize.jpg

새바지 

 

 

가덕도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잘 담아내지 못한 점이 진정 아쉽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섬의 두 산이 폭파되어 비행기 활주로로 뭉개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제주도 성산읍의 그 푸른 숲을 벌목하겠다고 했던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작년에 간신히 보류시켜놓으니 또 시작이구나. 선거철만 되면 건설경기로 표심을 흔드는 건 여전하구나. 

 

아름다웠다. 온종일 본 가덕도도 아름다웠지만, 2, 30대 젊은이들이 멸종반란을 위해 전국에서 모인 것도, 사드로 망가진 소성리에서 가덕도를 살리겠다고 온 것도 모두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을 지켜야지. 가덕도에서 느낀 명백한 한 줄이었다. 

 

멸종반란 한국 젊은이 둘과 가덕도 답사 해설을 담당해 주신 녹나무를 태우고 부산역으로 왔다. 부산역 옆에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부산의 교통난과 주차난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녁 6시쯤 도착한 호텔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호텔 측은 예약 취소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차라리 진해로 되돌아갈까 한참을 고민하다 다음 날 순례 때문에 바로 옆 공영주차장에 유료로 주차를 했다. 

그렇게 일본에 본사가 있는 저렴하고 깔끔한 호텔에 회원가입까지 하고 투숙했다. 성경과 불경과 창업주의 책이 나란히 꽂힌 건 웃음이 났지만, 비행기 화장실 같은 욕실엔 욕조까지 있어 몇 년 만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제일 좋았던 건 잠옷 대여였다. 

내가 박애주의자 코스프레는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영화 <매기스 플랜 Maggie’s Plan>의 매기가 입었던 잠옷처럼 단추가 길게 주루룩 달린 잠옷이었다. 존이 아래에서부터 단추를 풀던 그 잠옷보다는 캐주얼했지만, 이기적인 남편을 전처에게 돌려보내는 통쾌함이 5년 전 기억으로 설핏 전해졌다. 하지만 프리사이즈 잠옷은 좀 컸고, 그런 고층 빌딩은 무척 오랜만이었으며, 심야까지 복도에서 나는 사람들로 인한 소음으로 신경은 예민해졌다. 어서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각박한 도시와 바다, 해파랑길 1과 2코스

2022년 1월 9일 일 부산 오륙도~광안리~해운대~미포~송정해수욕장 : 27km

 

다음 날 아침, 조식을 간단히 하고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신 것까지는 좋았다. 

8시에 맞춰 짐을 챙겨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방에 모자를 두고 온 걸 알았다. 두 층 아래에서 내렸다 다시 올라가서 방에 가서 모자를 챙겨 내려오는데, 조식 시간에 걸린 만원 엘리베이터는 18층부터 층마다 섰다. 때문에 공용주차장에 10분 늦었더니 주차비 천 원을 더 내라고 했다. 

“아유~ 너무하시네요.”

“뭐가 너무해요? 아침부터 그러지 말고 빨리 내고 가세요. 경우가 그렇지 않아요? ”

나야말로 아침부터 참 여러 생각을 했다. 그동안 얼마나 경우를 따지던 나였던가. 그런데 주차비 때문에 예약한 호텔엔 주차가 안 되고, 주차비 내고 주차한 바로 옆 주차장에선 아침부터 경우 없는 사람이 되었다. 천 원에 왔다 갔다 하는 ‘경우’. 그런 도시의 경우, 전기요금과 목숨이 걸린 위험의 경중을 가늠하지 못한다. 실은 전기요금의 할인율 축소는 탈핵 때문이 아니라 가스나 석탄발전소 때문인 것도 잘 모른 채. 

만약 고리 핵발전소나 월성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반경 30km에 있는 국내 최대 산업도시인 부산과 울산과 경주는 ‘부울경 메가시티(Mega City)’는커녕 메가디재스터(Mega Disaster 재난)로 무사하지 못하다.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산업 자체가 마비될 것이다. 영화 <판도라>를 기억해보라. 

 

그런 거대도시 부산에서 하단역부터 부산역까지 걸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날 녹나무가 오륙도부터 해파랑길을 걸으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또 그렇게 걸었다. 현지인 말을 듣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출차해서 광안리로 갔다. 

두 번째 지인 찬스.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같은 입주작가였던 소설가의 집에 주차하기 위해서였다. 퇴소하시면서 “부산에 오면 하루 재워줄게요.”라고 하신 인사말 그대로 연락한 거였다. 

“언제 한번 밥 먹어요.”가 ‘정말 밥 먹을 약속을 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기회 닿으면 한번 보자’는 한국식 인사라고 한국어 수업 시간에는 외국인에게 가르치지만, 한국어 교사 출신인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는 편이다. 만약 주차문제만 아니었어도 신세 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도시의 교통·주차난은 정말 심각하다. 그렇게 지인 아파트 단지 내에 주차하고 걸어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오륙도로 갔다. 

 

오륙도는 해파랑길 1~50코스의 출발지점이다. 

친절한 안내원의 안내를 받고 지도를 보니, 2020년부터 18~50구간을 7번 국도 탈핵도보순례로 걸었다. 안전여행을 위한 가이드라인 하나가 ‘안전을 고려하여 두 사람 이상 함께 갑니다’였고, 둘이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합니다’였다. 

하나는 못 지키지만 둘은 지킬 수 있었다. 사흘 치 3코스를 이틀에 걸어야 고리 핵발전소까지 걸을 수 있었지만,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이름 붙은 길이나 안내 표시도 없는 하동부터 진해까지 걸어오지 않았나. 해파랑길은 북쪽으로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갈맷길2-2구간 이기대해안산책로이자 해파랑길 1코스의 경관 좋은 동해안을 걷기 시작하자, 부산역전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어디 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함께 걷는 트래킹족들도 매너가 좋았다. 어느 분이 곁길을 알려주셔서 더 흥미롭게 걸을 수 있었다. 해안 바위 위에 배낭을 놓고 옆에 앉았더니 배낭이 내 친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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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은 내 친구

 

 

광안리를 지나 해운대에서 잠시 카페에 들어갔다. 

카메라와 휴대전화기 충전이 필요했고, 모처럼 돈 내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사고 싶었다. 온종일 바닷바람 맡으며 걸은 나는 일부러 실내에 앉았다. 옆 테이블에 어여쁜 모녀 두 쌍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토탈 코디네이션이 완벽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 주민인 그들을 보며, 저렇게 귀엽고 소중한 저들의 아이를 위해 소비문화의 한복판 같은 해운대에서 지구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핵발전소 방사능 위험은 의식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가 모티브가 된 2009년 영화 <해운대>가 기억나는 그곳에서 고리 핵발전소까지는 최단 거리 25.2km였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쓰나미에 의한 것이었고, 2016년 9월 경주에서는 5.8, 2017년 11월에는 포항에서 5.4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핵발전소의 부실공사와 안전성 위험은 차치하고라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그 어떤 건물도 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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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미포에 가자 내게 곁길을 알려주신 분이 “앗, 혼자 걸어가던 분이다.”라며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셨다. 나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분들은 혼성으로 어디 술집을 찾아가시는 듯했다. 산행이나 트래킹 후에는 역시 술인가? 나는 그런 단체 술자리보다는 얼른 씻고 한적한 곳에서 두셋이 담소를 나누는 게 훨씬 좋다. 

미포는 1코스의 종착지다. 나는 2코스의 송정까지 걸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날 고리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km 넘게 걸었지만, 미포부터 송정까지는 레일바이크 아래 나무 갑판길을 따라 4.8km를 가면 된다. 정말 쾌적한 길이다. 

 

송정해수욕장에서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있었다. 송정 폐역을 지나 지름 31cm인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해물칼국수를 다 먹고 어두워져서 광안리 행 버스를 탔다. 

혼자 있는 마지막 시간일 듯해서 탈핵 벗들 넷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마 혼자 걸어도 늘 함께였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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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 해운대, 송정

 

 

☆ 열흘째 마지막 날, 부산 해파랑길 2와 3코스

2022년 1월 10일 월 송정역~해동용궁사~대변항~일광~임랑~고리 핵발전소 : 27km

 

소설가의 집에서 새벽 6시 반에 나왔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본사 앞까지 가야 했다. 김진숙 복직투쟁 릴레이 단식 중이었다. 

그날 61일차 참가자로 등록한 나는 아침 출근 피케팅을 함께하고 도보순례를 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 출근 버스들이 줄지어 정차하고 그 버스에서 직원들이 줄이어 들어왔다. 

시위하는 분의 건강하고 밝은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1981년 10월 1일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전 한진중공업)에 용접공으로 입사한 김진숙이 1986년 2월 18일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된 이틀 후, 노동조합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제2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선전물 150여 부를 동료 노동자와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5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모두 3차례 부산직할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고초당한 것도 억울한데,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을 이유로” 7월 14일에 해고 당한 지 37년이었다. 

 

김진숙 해고 당시 대한조선공사였던 회사는 1989년 한진중공업으로, 2021년 동부건설 컨소시엄으로 인수되어 HJ중공업이 되었다. 

그 사이 2003년 10월 17일에는 김주익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같은 달 30일에는 곽재규 조합원이 자결했다.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한진중공업에서의 노조민주화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부당해고 인정 통지서를 발급받았다. 

2011년 309일 간의 고공농성과 희망버스 운동을 통해 한진중공업 해고자 전원 복직이 결정되었다. 김진숙만 빼고. 

2020년 9월 25일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해고자 김진숙에 대한 복직 재권고가 있었고, 2020년 12월, 희망버스와 2020년 부산~서울 희망뚜벅이 도보행진이 있었다. 

 

암 투병 중인 김진숙은 2020년 12월에 정년도 지났다. 

1년 전 엄동설한에 청와대 앞에서 다섯 명이 최장 48일까지 단식하며 소원했던 그의 복직. 

그때 노숙하던 단식자들 앞에 밤새 경찰 차량을 공회전시켰던 정부, 그리고 인권변호사 시절엔 김진숙 복직을 지지했던 대통령이 촛불 혁명으로 탄핵 된 전 대통령을 임기 내 사면하는 시절에 왜 국가폭력으로 해고당한 김진숙 복직은 37년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까?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뀐 회사 앞에서 출근 선전전 하는 이의 밝고 건강한 아침 인사는 고가도로 아래 맞은편 건물에 걸린 김진숙 걸개그림 얼굴에 닿고 있었다. 매일매일 일상이라 아무 감각이 없는 것일까? 죽겠다 죽겠다 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인의 앓는 소리처럼 해고노동자의 복직시켜달라는 외침은 공장의 매연이나 소음처럼 자연스러운 소리인가? 대체 왜 아무도 들은 척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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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복직을 위한 아침

 

 

8시 반쯤 동해선 월내역에 주차하고 송정역으로 기차를 타고 왔다. 

9시쯤 송정역에서 걷기 시작해서 오시리아역을 거쳐 해동용궁사에서부터 해파랑길을 걸었다. 

9km쯤 걸은 11시쯤, 대변항에서 월성 핵발전소 이주대책위와 함께 상여시위를 하고 온 울산의 은정과 영상이 합류했다. 내 배낭을 영상이 대신 메었다. 

내가 그날 김진숙 복직 투쟁을 위한 릴레이 1인 단식이라고 하자, 둘도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울산에서 월성에 8시까지 가느라 아침밥도 못 먹었을 텐데, 내가 그냥 먹으라고 해도 둘은 마다했다. 

내 배낭은 평소에도 크기에 비해 무거운 편인데 기장군청에서 쉴 때 들어보니 돌덩이 같았다. 안을 보니 텀블러가 내 것 말고도 세 개나 더 들어 있었다. 영상이 두 누님의 짐을 혼자 짊어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리 건장해도 무거웠을 배낭을 멘 영상은 이미 꽤 걸어온 내가 지칠까 봐 선두에 서다 뒤로 가서 보폭을 유지해 주었다. 언제나 씩씩한 은정은 얇은 운동화를 신고도 잘 걸었다. 

 

오후 1시쯤 저 멀리 고리 핵발전소가 보였다. 그런데 그 지점부터 해변에 카페와 캠핑촌이 즐비했다. 대체 핵발전소가 관람 거리라도 된단 말인가. 방사능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걸 보면서 차를 마시고 캠핑하고 싶지는 않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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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 주변 캠핑장

 

 

일광해변 지나 임랑해변으로 가기 전, 마을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 할아버지 한 분이 소리를 치셨다. 

“아니 전기 안 쓰고 살아?” 

그 뒤에 두세 명이 뭔가 거들려고 들썩이셨다. 그런데 내 뒤에 있던 은정이 맞받아쳐 더 크게 소리를 쳤다. 

“방사능이랑 핵폐기물은 어쩔 건데요?” 

그 뒤에 영상까지 걸어오는 걸 보자, 마을 분들이 더는 소리치지 않으셨다. 맨 앞에 왜소한 나를 보고 만만해서 큰소리쳤는데 그 뒤로 듬직한 둘이 함께 오자 그만하신 거였다. 사람 심리란 그렇게 본능적으로 우열을 감지한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그래서 성경에 독처하지 말라고 나와 있나 보다. 아니 성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전여행을 위한 가이드 라인 첫 번째가 ‘안전을 고려하여 두 사람 이상 함께 갑니다’였으니까. 은정과 영상, 둘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2시 40분. 임랑해변이었다. 

2017년 늦여름과 가을, 혼자 무턱대고 찾아와 사진을 찍어 그해 포토청 단체사진전 <흰>에 전시했던 <원전백지화>. 그때의 흰 파도와 모래는 그대로였고 발전소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신고리 5.6호기는 공론화로 인해 건설이 확정되어, 작년인 2021년 10월 기준 종합공정률 72.12%였다. 

나는 회상과 만감에 한참이나 바다 앞에 서 있었다. 사진을 배우고 처음으로 몰두해서 무언가를 찍었던 그 기억이 생생했다. 

 

‘임랑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자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자유로움이 마음을 채웠다. 어휘를 선택하느라 긴장할 필요 없이 뷰파인더에 집중했다. 구도를 선택하고 초점과 조리개값을 맞추다가 문득 내가 혼자서도 외로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찍고 있는 내 사진이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2018년 1월 탈핵이야기 1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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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랑해변의 5년 전후

 

 

하지만 5년이 지났고, 그렇게 걸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은정과 영상은 하루 동안 아침엔 월성, 오후엔 고리 핵발전소를 보았다. 둘은 지척에 핵발전소가 두 군데나 있다는 현실을 통탄했다. 

3시 20분, 고리 핵발전소의 4개 돔이 다 보이는 마지막 지점까지 걸었다. 

27km. 마지막 날 최장 거리였다. 

영상이 내 배낭을 메주지 않았다면 완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약사인 영상의 오후 출근 시간이 이미 지났다. 월내역에서 내 차로 대변항까지 갔고, 거기서 주차한 차로 울산까지 가야 했다. 후다닥 떠나는 영상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은정과 탈핵신문 편집인 석록 집으로 갔다. 

내 마지막 지인 찬스였다. 석록은 궁중요리를 차려놓고 있었다. 먼저 들어간 은정이 놀라자, 

“일곱째별이 오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아니 내가 뭐라고, 부엌에서 들리는 석록의 소리에 거실에 있던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하도 고급스러워서 소고기로 보이는 돼지고기 수육, 빨간 고추 대신 맨드라미를 잘게 썰어 올려놓은 호박전과 버섯전, 초록색 형형한 나물과 맑은 나박김치와 새빨간 김장김치에 달걀지단과 김 고명을 얹은 떡만둣국까지. 젓가락질하기가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석록은 신문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요리도 최고였다. 더욱이 감동한 건 요리사가 치통으로 씹지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져간 건 남원에서 청명이 준 지리산 운봉 생막걸리와 악양의 햇볕이 준 김치. 남원과 악양에서 받은 사랑을 울산에 전하면서 양쪽에서 얻어먹었다. 나는 걷기만 했을 뿐인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석록은 22탈핵대선연대 차 서울로 떠났다. 바삐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울산에 올 때마다 느꼈던 활기와 든든함이 떠올랐다. 뚝심 있고 진실한 은정, 영상, 석록 탈핵 3인방을 보면 우리나라가 이들 덕분에 안전해질 것 같다.

 

나는 남원으로 가 청명의 짐과 석록의 정성 담긴 반찬을 놓고 순례 전 덜어놓았던 내 짐을 실어야 했다. 청명의 당부로 빈집에서 밥 한 그릇에 배춧국을 부어 먹는데 고요한 햇살이 정지한 듯 거실에 내려앉았다. 마당의 강아지는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집 밖에 나와 엎드려 햇볕을 쐬고 있었다. 도시의 애완견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추위였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온 강아지는 바깥 공기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모진 겨울바람에도 아무렇지 않게 햇볕을 쏘이며 움직임 없이 평화로울 수 있겠지?’ 

 

*

 

열흘간의 도보 순례 후 서울에 오자마자 들은 말은 “김해공항 위험하다”와 “기후위기와 탄소 중립의 대안으로 핵발전소 만한 것이 있느냐”였다. 나름 가깝다는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듣자 실망을 넘어 눈물이 났다. 정말 소용이 없구나. 그렇게 기진하도록 걸어도 자랑스럽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는다. 힘들지 않냐, 고생했다는 말은커녕 잘 알고나 해라, 네가 하는 일이 정말 옳으냐는 식의 말을 들으면 땅으로 꺼질 것 같다. 

서울시 지하철에서 모르는 할아버지로부터 쌍욕을 듣고, 고리 핵발전소 근처에서 마을 할아버지로부터 고래고래 고함을 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사는지,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허망함에 내 존재감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더 속상한 건 “2002년 김해공항 사고는 북쪽 지형 문제뿐만 아니라 기상 악화, 항공 운항 규칙을 지키지 않는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고다. 김해공항은 그 사고 이후 유도 등 추가 설치 등 안전시설을 보강했다. 또 2016년 김해 신공항 건설계획 발표 때 기존 남북방향에 대각선 활주로를 계획했다. 하지만 가덕도 공항 건설계획 때문에 김해 신공항 건설계획은 백지화됐다. 

그렇게 위험하면 왜 국제선만 가덕도 신공항으로 옮기고 국내선과 군 공항은 계속 김해에 놔둔다고 모순된 주장을 하느냐, 그리고 가덕도 신공항은 안전한 줄 아느냐? 외해에 건설되기에 태풍 상륙 시 직접적인 피해를 볼 수밖에 없고, 근처에 기존 김해공항 이외에도 해군 비행장인 진해 비행장이 있어서 동시에 비행기가 이착륙하지 못하고, 사천공항과는 관제구역이 겹쳐 접근관제구역을 축소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철새도래지인 낙동강 하구가 근접해 조류충돌이라는 안정상의 문제가 있다.”고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서울까지 나를 찾아온 불청객은 부산광역시 동구청 교통행정과에서 도로교통법 제160조와 161조에 따라 부과한 주정차위반 과태료 32,000원 통지서였다. 만차로 차단막대 내려진 호텔 주차장 앞에서 호텔 측에 문의하는 동안 찍힌 증거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주차비에 과태료까지, 부산 첫날 하룻밤에 이틀 치 숙박비를 날렸다. 

사방이 CCTV에 뭔지도 모르고 지켜야 하는 수많은 법규, 이러니 각박한 도시에 살고 싶겠나? 주차장에 흩날리는 흰 눈처럼 짧은 위로는 격려가 되기엔 부족했고, 나는 풀지도 않은 짐을 다시 챙겨 길을 떠났다. 

 

☆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및 특별법안 철회 촉구 전국행동

2022년 1월 25일 화 여의도

 

다행히도 서울에서 일 없이 가진 않았다. 

2022년 1월 25일 화요일 14시, 여의도에서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및 특별법안 철회 촉구 전국행동>이 있었다. 부산, 울산, 경주와 호남권의 탈핵시민연대 및 공동행동과 종교계와 2022 탈핵대선연대에서 모였다. 청명, 니키, 석록, 김현욱, 황분희, 이상홍, 남태제 등등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우리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국민의당 등을 찾아갔다. 각 당사에서 핵발전소 조기 폐로 및 탈핵 법제화, 제대로 된 고준위핵폐기물 관리정책 마련, 핵발전 규제 강화, 지역 권한 확대·시민참여 제도화, 방사선 영향·피해 대책 마련,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해양방류 저지, 신울진-신가평 초고압송전탑 건설 중단 및 ‘송주법’ 개정 등 7대 정책과제 19개 요구를 담은 <5개 핵발전소 지역 대책위와 2022탈핵대선연대 대선후보 정책요구서>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과연 저 문서를 상부까지 잘 전달이나 할까 싶은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유일하게 정의당에서만 이헌석 생태에너지본부장이 지역주민들에게 핵폐기물 계속 떠안도록 하는 핵발전 정책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대변을 했다. 

 

지난 대선 때만 해도 너도나도 유행처럼 탈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신념이 아니라 표심에 좌우되는 정치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표심인 여론을 만들지 못하는 유권자인 우리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월성핵발전소 돔에서 연기가 펄펄 나와도 뉴스 한 꼭지 보도되지 않는 언론이 장악한 세상에서 진실은 기찻길 옆 참새만큼 가느다란 소리를 내고 있다. 

 

거리시위대는 각 당사를 거쳐 다시 더불어민주당사 앞으로 왔다. 

경주 월성핵발전소 인접지역 주민 황분희 이주대책위 부위원장이 마지막 발언을 했다. 

“핵폐기물 답이 없으면서 핵발전소는 계속 돌리고 있고, 핵발전소 있는 모든 지역은 영원히 핵폐기물을 안고 살아야 합니까? 그 지역주민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기는 이 서울에서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기를 쓰면서 이곳에선 누구 하나 책임질 사람들이 없네요. 

우리는 핵발전소로 인해서 하루하루 불안하게 삽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합니다. 아무리 핵발전소 관리 잘한다고 해도 자연재해 누가 막습니까? 만약에 우리나라에 지진이나 해일이 온다면 우리나라는 망합니다. 시골에 사는 이 할머니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정치하는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핵발전소 수명 연장하지 말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멈춰 가야 됩니다. 머리 좋은 국민이 얼마든지 대안 에너지 만들 수 있습니다. 

더는 우리에게 희생 요구하지 마세요. 거짓말에 속아서 핵발전소 받아들인 죄밖에 없어요. 내 아이들 미래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 물려주면 안 됩니다.”

월성핵발전소 1km 거리에 살면서, 9년째 이주시켜달라고 하는 70대 중반의 애타는 목소리였다.

 

 

DSC04667고준위핵폐기물-관리-기본계획-및-특별법안-철회촉구_resize.jpg

고준위핵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및 특별법안 철회 촉구

 

*

 

함께 걷기도 했고 혼자 걷기도 한 열흘의 2022 신년 도보 순례에서 의미 있었던 것을 꼽으라면 하동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투쟁과 가덕도 신공항 반대 투쟁 공항 부지 답사와 부산 영도 김진숙 복직 투쟁 현장에 함께 한 시간이었다. 걷는 길 위에서 함께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나. 

 

가장 걷기 좋았던 길을 꼽으라면 혼자 걸었던 첫날인 함안에서의 아침을 들 수 있겠다. 

제일 좋았던 숙소를 소개하라면 마산역 근처의 다이노스 호텔을 추천하겠다. 

무엇보다 이번 도보 순례의 특징이라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하동군 산림감시원과 군의원 부인과 햇볕과 지한, 곤양 기독교인, 사천시 두량리 이장님 부부와 은숙, 진주 한병기 자전거 라이더, 진해 마온 게스트하우스 주인 부부, 니키, 청명, 탁, 김현욱, 녹나무, 전미홍 소설가, 은정, 영상, 석록, 그리고 멀리서 용기와 사랑으로 함께 해 준 관지와 으낭. 이분들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었다. 

 

이후 계획으로는 4.3항쟁을 기한 제주 도보 순례가 있다. 

작년 4.16 세월호 참사 7주기 추모 진도 도보 순례처럼 이번에도 니키가 제안하셨다. 아직 노선도 인원도 숙소도 확정한 바는 없다. 

톰을 중심으로 여름과 겨울 방학에 걷던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가 어느덧 예측 불가 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월성 핵발전소 인접 지역 이주대책위 상여시위 연대는 반년 정도 이어져 정착하고 있다. 청명의 수고가 크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나는 여건이 되는대로 걷고 있다. 그때그때 시의성 있는 의미를 찾아가는 것도 좋고, 그냥 걸어도 우리에겐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라는 표어가 있다. 비단 핵발전소 반대라는 협소한 의미 외에도 ‘생명 평화 그리고 사랑’이라는 너른 의미가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 

 

몇 주 전, 33년 지기 친우가 간곡한 목소리로 이 일 안 하면 안 되겠냐고 내가 다른 즐거움이 없어서 이 일을 하는 거라고 해서, 지지와 응원을 요청해서 받은 적이 있다. 

며칠 전, 37년 지기지우는 내 글이 발행되어 링크돼 오면 가슴이 아파서 바로 읽지 못한다며 울었다. 

나를 사랑해서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내가 어떤 마음으로 걷는지 들려준다. 

 

땅의 기운을 발로 밟으며 온몸을 움직여 하늘 향해 뻗어 올리는 기도,

개미나 나무처럼 미세하게 움직이지만 온 우주와 소통하는 숨결,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내 걸음 하나하나에 선한 의미를 담게 하소서. 

평화롭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

 

☆ 김진숙 명예복직 및 퇴직

2022년 2월 25일 금 부산 HJ중공업

 

이렇게 마무리하고 며칠 지난 2월 23일, 김진숙 명예복직과 퇴직 소식을 들었다. 

나는 울었다. 기뻐서 울었다. 그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으나 함께 축배를 들 아무도 곁에 없었다. 

1년 전, 매주 정읍과 서울을 오가면서 김진숙 복직 투쟁기 <눈꽃>을 썼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오가던 내가 들은 말은 “공허하다”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였다. 1년 후 그 투쟁은 승리로 돌아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는 고작 1년을 함께했지만 36년을 굳세게 싸워온 동지들의 승리였다. 돌고 돌아 다시 정읍에서 들은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내 가슴이 이렇게 시리고 아픈데 김진숙 그분은 오죽하실까? 그 신산한 세월을 누가 보상해 주나. 

 

이틀 후, 김진숙 복직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에서 부산까지 갔다. 문정현 신부님이 예의 호통을 치셨고, 민중가수 임정득은 ‘소금꽃나무’를 노래 불렀고, 송경동 시인은 한진중공업 노조 투쟁사와 김진숙 인생사를 시로 낭송했고, 송경용 신부님이 김진숙 조합원에게 이제 연애도 하고 부부싸움도 하고 삐치기도 하라는 덕담을 하셨다. 

그날의 주인공 김진숙 조합원은 인사말 하는 내내 울었다. ‘조립파트’ 헬멧을 쓰고 낡고 푸른 작업복을 입고 37년 만에 복직하는 날 퇴직하는 그이는 말했다. 

“(상략)

단 한 명도 짜르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마십시오. 

하청 노동자들 차별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복직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어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영도 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울었던 그 눈물들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중략)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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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만에 복직과 퇴직하는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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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길고 지루한 제 글보다 에너지전환포럼에서 만든 동영상을 추천합니다. 

17분만 투자하셔서 궁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빨리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늘리면서 원전도 지으면 안 되나요?>

https://youtu.be/Iqo3xAZL0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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