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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3 - 홀로 또는 함께 걷다. 역사 위에서

posted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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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3 - 홀로 또는 함께 걷다. 역사 위에서

 

 

# 지난 이야기 

2021년 4월, 진도를 종단하며 18번 국도 40km를 걸었다. 

6월, 해남에서부터 다시 18번 국도를 걷기 시작했다.  

강진, 장흥, 보성까지 걷고는 박경리 선생님과 <토지>를 기리기 위해 순천, 광양, 하동까지 2번국도와 하동부터 구례 화엄사까지 19번 국도를 걸었다. 

2주간 240km를 혼자 걸었다. 

7월, 곡성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18번 국도 보성~구례 구간 83km를 잇기로 했다. 

 

 

길뜬별 / 남도 순례길 3 - 홀로 또는 함께 걷다. 역사 위에서  

 

 

☆ 2021년 7월 14일 수 연화가든~목사동우체국 1.8×2=3.6km

7월에는 쉼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월초에는 강빛마을을 중심으로 남북 마음 내키는대로 산책을 했다. 

산책과 순례의 차이는 정한 노선과 진지한 목적의 유무 정도일까?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제6판]을 찾아보았다. 

 

산책(散策)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하여 멀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거닒. 

                  흩뜨리다, 풀어놓다 散(산)에 채찍질, 지팡이 策(책)

순례(巡禮)  종교상의 성지·영장 등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참배함. 

                  돌다, 어루만지다 巡(순)에 예절 禮(례)

 

종교 목적은 아니지만 매주 월요일은 순례. 경주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원회 상여시위와 연대하기 위하여 ‘월성 2,3,4호기 조기폐쇄’ 조끼를 입고 걷기 때문이다. 

두 번의 월요일에 연화사까지 2km를 걸어갔다 왔다. 

그리고 수요일, 드디어 18번 국도 보성~구례 도보순례 구간을 이어보기로 했다.  

먼저 강빛마을에서 북쪽보다 훨씬 긴 남쪽을 택했다. 몸자보를 단 얇은 배낭을 메고 보성강을 거슬러 대황강로를 따라 가다 다리를 건너 죽곡로 목사동으로 갔다. 친환경 농산물 유기농 재배단지 논과 밭이 청정하고 단아했다. 보도용 나무데크를 원래 있던 나무가 다치지 않도록 깔아놓은 친환경마을이었다. 데크에는 ‘끝까지, 곁에서’ 세월호 7주기 현수막과 ‘일본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약속 없이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DSC05075목사동풍경_resize3.jpg

목사동 풍경 

 

 

227년 된 왕버드나무를 지나자 목사동우체국이 있었다. 

시골우체국처럼 발길을 사로잡는 게 또 있을까? 나는 잠시 멈춰서서 우체국을 사진 찍었다. 그런데 우체국에서 막 나온 한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운동하냐, 어디 사냐 등등. 나는 걷는 중이고 곡성에서 한 달간 산다고 했다. 여자는 자기 집에 한번 놀러오라며 연락처를 알려주더니 노란 자두 두 알을 내 얇은 배낭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에게서 귀농 느낌이 났다. 다 찌그러진 스포츠 범용차량(SUV)을 타고 황황히 가는 모습이 황야에 내놓아도 손색없었다. 관제엽서를 사러 들어가 이날 처음 만난 목사동우체국장은 이날 이후 곡성에서 여러 인연을 이어주셨다. (자세한 내용은 <곡성 강빛마을 정원일기 1-목사동우체국의 7월>에) 

 

 

DSC05032목사동우체국_resize.jpg

목사동우체국

 

 

☆ 2021년 7월 15일 목 목사동우체국~곡재마을 2.7×2=5.4km

18번 국도를 잇는 둘째날, 돌아오는 길에 고물을 잔뜩 실은 1톤 트럭 한 대가 저만치 섰다. 나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석곡에 산다는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내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했다. 옆자리는 고물로 꽉 차서 태워줄 수가 없었고 점심밥을 사주고 싶어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별 수없이 명함을 주면서 줄 게 이거밖에 없다며 먹다 남은 분홍색 목캔디를 주었다. 어쩜 곡성 사람들은 스쳐도 따뜻할까. 

 

☆ 2021년 7월 17일 토 곡재마을~신전마을 1.6×2=3.2km

곡재에서 신전으로, 걸은지 얼마 안 됐는데 강빛마을 이장님 전화가 왔다. 집을 보러 왔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예고 없던 소식에 한달음에 되돌아갔다. 내일 일을 모른다더니 날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겨난다. 

 

☆ 2021년 7월 18일 일 신전마을~순천농협 오산지점 3.3×2=6.6km

복 중에는 오전 도보순례가 어렵다. 날이 금방 뜨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후 네 시가 넘으면 채비를 차리고 다섯 시쯤 되면 산책 삼아 걷기 시작했다. 카메라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차에 실었다. 전날 갑자기 살고 있는 집을 보러 사람들이 왔고 이후로 언제 누가 집을 보러 올지 모르니 문을 열어놓고 다녀야 했다. 강빛마을에는 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도 도난사건이 없었단다. 

차를 타고 목사동을 지나 전날 걸어갔던 지점에 세워두고 곡성군에서 순천시로 넘어갔다 왔다. 매일 왕복을 걸으니 이동 거리의 두 배씩 걷는다. 갈 때는 새로운 길이라 설레고 돌아올 때는 아는 길이라 빠르게 온다. 약 7km에 1시간 40분쯤 걸렸다. 

 

차에 막 오르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와이퍼를 작동시키지 않고 서행했다. 지열로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떨어진 비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구름에서부터 땅까지의 거리를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그렇게 멀리서부터 내려와 땅에 떨어지자마자 기화되어 곧장 다시 올라가다니 소나기의 순환은 짧아서 아쉬운가. 그렇게 멀리까지 걸어갔다 걸어오는 나의 순환은 대체 빗물만큼이라도 어디에 도움이 되는가. 나는 왜 길을 걷는가. 왜 걷는지는 모르겠지만 걸으면서는 많은 것들이 정리된다. 

 

하루 사이, 나는 다시 소유에 대해 사유한다. 

탈핵도보순례를 하며 사유재산을 축적하지 않기로 한 결심. 남의 빈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는 생활. 한달살이하고 있는 강빛마을 집 주인이 바뀌는 것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동요하는가? 착한 부자가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선행을 못하게 돼서? 공유경제로 인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현행 부동산법 원리원칙의 한계와 형평성 때문에? 

만약 내게 집값만큼의 돈이 있다면 탐나는 그 집을 홀랑 사버리겠지. 그리곤 꾸미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오라고 부르겠지. 집들이가 끝나면 붙박혀 살겠지. 그럼 또 다른 세상을 궁금해 하겠지. 그리곤 집에 싫증을 내겠지. 더 다녀야 할 세상이 많고 다녀본 후에 정착해도 늦지 않다. 아직 소유욕이 이리 팽팽히 살아있으니 풍족하지 않길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산책 혹은 도보순례가 정리해 준 마음이었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와 잠갔다. 이제부터는 훌렁 벗고 춤을 춰도 되는 나만의 공간이다. 사유재산은 필요하지 않지만 사생활은 지켜야 한다. 사생활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 중 자유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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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물에서 건져 온 도라지꽃

 

 

☆ 2021년 7월 19일 일 순천농협 오산지점~오성가든 2+2.7=4.7km

세 번째 월요일 아침, 월성 조끼를 입고 순천시 주암면 문길마을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18번 국도 옆 논길로 가는데 논물길에 할머니 한 분이 들어가 들깨 옆 잡초를 매셨다. 고 작은 도로에도 밭을 일궈 김을 매시는 할머니. 여든이 다 되신 할머니는 거머리 걱정을 하는 내게 다 늙어서 뜯어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아니 왜 혼자 다녀? 둘이 다녀야 재밌지.”

   ‘그걸 누가 모르나요. 함께 다녀 줄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해요. 할머니.’

얼마큼 가다 기온이 급속히 올라갈 예상이 되어 금세 되돌아왔다. 왔던 그 길로 다시 가는데 그 때까지 그 할머니가 물 속에 계셨다. 나를 보고 길로 올라오신 할머니는 낫으로 옥수수를 툭툭 끊어서 하나하나 다듬어 주셨다. 

   “물 자박자박 넣고 소금이랑 설탕 넣어서 끓이면 아주 맛있어. 남으면 냉동실에 넣었다가 다시 쪄먹어도 진짜 맛있고.”

   ‘냉동실이 없는데요. 할머니.’

얼굴도 귀여운 할머니는 인심이 더 예쁘셨다. 남자 얼굴도 모르고 시집와서 입때까지 살았다는  할머니는 옥수수를 아홉 개나 주셨다. 얇은 배낭에 옥수수를 넣으면서 나도 뭐 드릴 게 없나 뒤져보았지만 사탕 한 알이 없었다. 

   “저도 뭘 드리고 싶은데 아무 것도 없어서 어쩌죠?”

   “아이고, 맛있게 먹어주면 고맙지. 주긴 뭘 줘.”

아~ 세상의 할머니들은 어찌 이리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지요.     

 

문길마을을 사이에 두고, 오산마을과 순천농협 오산지점이 있다.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는 오산마을은 ‘마을이 자라처럼 생겼다고 하여 鰲山(오산)이라 이름 붙은 유서 깊은 동네였지만, 1948년 여순 10·19(항쟁)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순천농협 오산지점에 ‘여순 사건 특별법 제정 환영-유가족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현수막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지난 6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국무회의 의결과 문재인 대통령 재가를 거쳐 7월 20일 관보에 게재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공포 이후 6개월 뒤인 내년 1월에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 1948년 10월 22일자 자유신문 헤드라인을 보면 ‘국군제14연대내서 반란 여수순천점령코 북상’이라고 나와 있다. 여수와 순천, 그래서 여순사건이다. 당시 진압 과정에서 전남 여수·순천·구례·광양·보성·고흥 등지에서 군과 경찰 및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는 여수에 1200여 명, 순천 1134명이다. 이 피해가 정확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순천 광장신문 [역사별곡-3]에 나와있다. 

 

같은 신문에서 알게 된, 73년 전 극악했던 학살의 현장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35년 4월 12일과 7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오양독창회(吳孃獨唱會)’ 기사가 실릴 정도로 주목받던 소프라노 오경심은 당시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였다. 그이는 여순사건 당시 부역하여 구법원 앞에서 사형 집행을 하려고 할 때 ‘봉선화’를 불렀다고 한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오경심이 죽음 앞에서 불러 군중들의 가슴에 박혔던 노래 ‘봉선화’는 나 어릴 때 할머니가 맨 처음 가르쳐 주신 노래다. 한글도 배우기 전인 서너 살 때 식구들이 노래를 시키면 나는 늘 그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는 어쩌자고 고 어린 내게 그리도 처량맞은 노래를 가르쳐 주셨을까. ‘고향의 봄’보다 ‘봉선화’를 즐겨불렀던 그때부터 내 애수(哀愁)가 시작되었을까. 그 노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살벌하고 황량한 처형장을 휘돌았을 오경심의 애절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사실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당시 오경심은 사형되지 않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사형 직전 ‘봉선화’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평소 오경심이 즐겨 불렀던 ‘봉선화’와 당시 무고한 많은 이들이 즉결처분으로 사형당한 이야기의 조합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는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상황의 반영이니만큼 그 참상은 기억해야만 한다. 무고한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이 학살당했던 그 사건이 73년 만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된다니, 한많은 세월을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이제라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고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여순사건 특별법이 공포된 지금 내가 왜 그 땅 순천에 있는가. 

 

내 나이 열 살 때,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는 서울 우이동에 살았다. 나는 가족들과 놀러가 사진을 찍던 4·19탑이 들리는대로 ‘복숭아꽃 살구꽃’의 ‘살구탑’인 줄 알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4·19의거’는 ‘4·19혁명’이 되었고 ‘5·18 광주사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되었다. ‘제주4·3사건’은 ‘제주4·3항쟁’이 되었고 ‘여순반란사건’은 ‘여순사건’이 되었고 혹자는 벌써 ‘여순민중항쟁’이라고 명명한다. 사실과 진실과 거짓 속에서 역사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쓰여지는가. 그리고 그 역사의 흐름 속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점을 찍고 있는가.

나는 이번 보성~구례 18번 국도의 종착지를 구례현충공원 여순사건희생자위령탑으로 정했다. 그리고 약속을 하나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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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마을 당산나무

 

 

☆ 걷지 못한 날 

이틀간 몸상태가 좋지 않아 집밖에 못 나갔다. 걷지 못하면 뇌도 멈추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강빛마을 집주인 인터뷰 기사에서 ‘뇌는 운동을 위한 기관’이라고 읽은 기억이 난다. 

 

‘인간의 발달된 뇌는 기억된 수많은 운동 조합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발생학적으로 보면 운동을 위하여 뇌가 생겨났고 원래 운동이 없으면 뇌도 없게 돼요.’ (출처 : 길목인 인터뷰 <시골 정형외과 의사 - 고한석>, 2018. 4. 30.

 

칸트는 매일 오후 5시에 산책을 했고 니체 역시 산책을 했으며 브람스가 매일 아침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페 플로리안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나온 길 역시 산책이다. 

 

서울에 살 때 나는 오후 네 시 즈음이면 집을 나와서 동네 산등성이를 산책했다. 일이 없을 때는 산책이 아니면 집밖에 나가질 않았다. 그런 내가 정면에 산이 보이는 집을 떠나, 산과 하늘 대신 다른 집들이 보이는 집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부(富)와 뷰(view)는 비례하므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이 내가 집을 떠난 이유 중 하나이다. 창과 풍경은 내게 생존 조건이었다. 적어도 집 안에 있는 동안은 창을 통해 우주의 빛과 초록 자연의 생명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강빛마을에 처음 왔을 때, 바로 얼마 전 갔던 지리산 둘레길 끝자락 카페 나마스테에 다시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서울에서 산을 보며 살던 8년도 가끔 기억났다. 나는 여름 한복판 7월에 푸르른 산의 정기를 마음껏 마시고 그 산 아래 강 따라 나있는 길을 실컷 걸었다. 뇌가 즐거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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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어린 창과 풍경

 

 

☆ 2021년 7월 22일 목 대황강로 출렁다리~압록 7.6km

중복이 지나고 대서를 맞아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북쪽으로. 

대황강로 출렁다리 앞에 차를 세우고 걸었다. 걸음은 걸을수록 탄력이 붙어서 1, 2km 가다 보면 3, 4km 가게 되고 돌아올 게 걱정이 되면서도 자꾸만 나아가게 된다. 이날 잠정적인 목적지는 8km 위 압록이었다. 그런데 목적지를 3~400m 남겨두고 버스 한 대가 왔다. 나는 두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워 탔다. 운전기사님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휴대전화에 꽂힌 교통카드 겸용인 신용카드를 댔는데 요금이 찍히질 않았다. 이걸 어쩌나. 산책 삼아 나온 길이라 지갑도 없었다. 기사님께 이체를 해 드리겠다고 했다가, 차 앞에 세워주시면 바로 갖다 드릴 수 있다고 했다. 마침 버스가 우회전하는 삼거리에 내 차가 있었다. 나는 잽싸게 차로 뛰어가서 톨게이트 요금용 병에 담긴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갖다 드렸다. 두 시간 걸어가서 10분 만에 돌아오니 세상에 이런 비경제적인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기분이 왜 이리 상쾌할까? 목적지까지 꽉 채우지 않고 목전에서 돌아온 것도 재미있었다. 융통성 없던 내가 조금 변했음을 알았다. 

  

들뜬 기분의 연장으로 일주일 전 목사동우체국 앞에서 전화번호를 적어준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 주면 마을을 떠나니 시간이 되면 만나자고 했다. 여자는 다음 날 맛있는 점심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대체 처음 본 내게 왜 밥을 사준단 말인가?  

 

다음 날 동네 맛집에서 여자를 만났다. 알고 보니 곡성군 농민회장이었다. 우체국장도 여성, 농민회장도 여성이라니, 곡성이 인심 좋은 마을에서 의식 있는 마을로 보이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 사회적 성역할에 대한 보수적 편견이 있었던 게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농민회장은 일주일 전 우리가 우체국 앞에서 대화하기 전에 걷고 있는 나를, 그리고 내 배낭에 달린 몸자보를 보았다고 했다. 역시 몸자보가 있는 나와 없는 나는 다르구나. 그때 물어본 ‘운동하냐’의 운동은 체력단련이 아니라 조직활동이었구나. 

식사 후에 삼태마을 농민회장 집으로 가서 차를 마셨다. 덕분에 한동네 부회장도 만났다. ‘쌀은 생명과 평화다’를 표방하는 곡성군농민회의 회장은 800평 밭을 멀칭비닐도 쓰지 않고 맨손으로 모종도 심지 않고 씨앗으로만 농사짓고, 부회장은 벼농사도 짓고 있었다. 농민회장은 씨앗을 아기처럼 다루었다. 그런데 이 방 저 방을 구경하다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빈 방에서 바싹 마른 채로 싹을 틔우고 있던 열매마.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의 비천상은 내려오고 열매마 줄기는 올라가니, 둘이 사람 눈길 손길 닿지 않는 어두운 빈 방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한 방울의 물기에라도 뿌리내릴듯한 악착같은 생명력에 질기디 질긴 목숨이었다. 그 마르디 마른 열매마를 본다면 죽음의 문턱을 오르락내리락 한다해도 함부로 희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농부 인심은 직접 키운 콩, 호박, 오이 등을 내게 잔뜩 안겨주었다. 넉넉히 주어도 축나지 않고 한아름 받아와도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로 손수 지은 농산물만한 게 있을까? 거기에 먹는 내내 키운 이의 노고가 생각나니 땅의 산물이 땀의 결실임을 알고 더욱 소중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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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마와 비천상의 춤 

 

 

두 분 소개로 조태일 시문학기념관과 태안사에 가보았다. 

 

 

국토서시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내게는 첫 연에서 이미 감동을 다 받은 벅찬 시였다. 

 

☆ 2021년 7월 25일 일 순천시 장동마을~송광면 곡천삼거리 10km+송광사

오전 6시반에 토스트와 커피와 과일을 먹고, 니키와 함께 길을 나섰다. 

7시 40분, 전날 종착지인 출발지 장동마을에 차를 세우고 출발했다. 보성까지 46km 남은 지점이었다. 걷는 내내 오른쪽 옆으로 보이는 주암호 왼쪽 옆으로 터널을 뚫는 벌교주암간 도로공사(2027년 예정) 중이었다. 평촌마을 주민들이 소음으로 인한 괴로움을 현수막에 실어두었다. 잠깐 걸으면서 들어도 시끄러운 그 소음을 앞으로 6년이나 더 들어야 한다니……. 게다가 그 분진은 또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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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까지

 

 

그 지역은 조계산 도립공원과 송광사가 있는 지역이었다. 주암호 따라 구불구불한 18번 국도를 걷는 게 나라고 좋아서만은 아니다. 곡선을 두고 직선을 만들어서 조금 빠르게 가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들까? 전문가들이 알아서 했겠지만 그 견적서에 자연과 사람이 파괴됨으로 인한 보상할 수 없는 계산은 포함되었을까?        

 

여럿이 걸을 때는 모르다가 둘이 걸으면 알게 되는 점들이 있다. 나는 벗들과 월, 화 이틀 걸을 계획으로 초대를 했었다. 그런데 니키가 하루 일찍 오셨다. 착각을 하셨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니키는 그 걷는 하루가 천금과도 같다고 하셨다. 그에게는 탈핵도보순례가 영적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람을 만난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를 느낀다. 대답 없는 신에게 질문하는 게 묘미라는 수사, 니키. 나 역시 끊임없는 질문 속에 걷고 또 걷는다. 산티아고에서도 7번 국도에서도 18번 국도에서도 신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10km를 걷고는 니키의 인도로 송광사에 들렀다. 신라말 혜린 선사가 창건한 후 고려 중엽 보조 국사가 크게 중창한 송광사는 아늑하게 둘러싼 조계산 산세에 꼭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계곡 위 청량각과 우화각은 여름날 냉수처럼 시원했다. 유서 깊은 승보종찰(僧寶宗刹) 송광사 대웅보전 앞으로 그날도 장삼자락 휘날리며 참선수행하는 승려들의 행렬이 배롱나무를 지나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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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자락 휘날리는 까닭은

 

 

오후에 청명이 왔다. 마지막 김장김치를 물에 씻어 볶아서 저녁식사를 했다. 

내가 어딘가에 정착하면 꼭 하고 싶은 일로 ‘녹색평론 읽기’와 ‘탈핵신문 읽기’ 모임이 있다. 그날 셋이 탈핵신문 읽기를 해 보았다. 탈핵신문에서 톰(성원기 삼척화력반대투쟁위원회 공동대표)을 만났다. 

 

“울진에서 시작해 신가평까지 가는 제2 송전선로는 10년 전 삼척, 영덕, 울진에서 짓겠다던 핵발전소 때문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이 모든 핵발전소가 백지화되었는데 이상하게 송전선로 계획만 살아남았다.” (출처 : 탈핵신문 90호)

 

작년여름부터 지금까지 그가 삼척우체국 앞에서 날마다 탈석탄·탈송전탑 시위를 하고 있는 이유이다. 핵발전소를 위한 송전탑 계획이 핵발전소가 백지화되었는데도 그대로 있고 이제는 그 송전탑 때문에 다른 발전소를 짓는다는 역발상이 문제의 시초였다. 동해안 석탄화력발전소 건설백지화, 동해안-신가평 500kV 송전선로 건설사업 백지화, 주민배제·금전매수로 송전선로 추진하는 한전 해체 등 초고압송전탑·석탄화력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산업부에 전달한 서한문 내용을 읽으며 내 머릿속에는 홍원항의 서천화력발전소가 떠올랐다. 강원도가 이리 단결할 때 외로운 충청도의 ‘홍원마을 미세먼지·철탑·고압선 피해대책위원회’는 어떻게 싸우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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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신문 읽기

 

 

☆ 2021년 7월 26일 월 곡천삼거리~문덕버스정류장 13km

매주 월요일 오전 8~9시에는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원회 상여시위와 연대한다. 

그래서 우리 셋은 형광색 ‘월성 핵발전소 2,3,4호기 조기폐쇄’ 조끼를 입었다. 니키는 손수 만드신 ‘월성 핵발전소 인접 주민 이주 대책 즉각 이행하라!!!’ 손피켓을 들고 걸으셨다. 서울 서대문구와 똑같은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 서재필 기념공원 ‘독립문’ 앞에 우뚝 선 니키는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는 은발의 탈핵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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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화 탈핵

 

 

도보순례 후 곡성군 농민회장 집으로 갔다. 역시 부회장도 만났다. 15년 가까이 맨손으로 농사짓는 농민회장과 부회장, 진짜 농부들과 만남에서 자급자족 농업을 목표로 하는 청명은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신이 났다. 나로 인해 좋은 사람들이 연결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건강한 기운이 알곡처럼 넘쳐 흘러 무척 행복했다.    

 

이날 밤, 나는 품격에 대해, 니키는 길동무와 공동체에 대해, 청명은 떠남에 대해 순례소감을 나누었다. 똑같은 길을 걷고도 우리의 나눔은 항상 다르다. 함께 걸어도 길에서 얻는 건 각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도보순례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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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농사와 탈핵

 

 

☆ 2021년 7월 27일 화 보성군 문덕버스정류장~복내면 행복노인복지센터 12.5km+복내사거리~문덕버스정류장 6km=18.5km

뜨거운 18번 국도 보성구간을 셋이 함께 걸었다. 

돌아오는 차편 때문에 걸어간 거리의 반이나  되돌아오느라 목표지점에서 10km가 남았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 혼자 그 구간을 메꾸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니키는 곡성역에서, 청명은 곡성버스터미널에서 떠났다. 혼자 남을 나를 안쓰러워하며 갔다. 둘 다 나보다 먼저 탈핵도보순례를 했고 각자 활동영역이 다양하게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내가 어디에 있든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도보순례를 한다고 하면 와서 걷고 가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내가 어찌 잊겠나. 그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커지는 날이면 나는 그들을 부르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속깊은 배려심은 늘 불러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간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해주는’ 게 아니라 ‘한다’는 주체성, 그게 청명이 가르쳐 준 삶의 태도이다. 그들은 와 준 게 아니라 와서 함께 걷다 떠났다. 하지만 아무리 주체적으로 살아도 셋이 있다 혼자 남아 감당해야 하는 커다란 집의 정적은 휑했다. 원래보다 더욱.  

 

코로나19바이러스로 외부인 출입을 엄격히 단속하고 있는 시골 마을에 백신 접종자라도 타지 사람을 불러들임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해남에서 구례까지 240km를 혼자 걸었으니 그 절반도 안 되는 보성에서 구례까지 혼자 걷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리 호화로운 집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조심조심 말소리도 크게 못 내고 조용히 걷기만 하다 스르르 헤어졌다. 이 위축된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 2021년 7월 28일 수 복내면 주암호 생태습지 입구 메타세콰이어 길 3km+보성버스터미널~용정리 춘정마을 7.2km=10.2km

하루는 쉬려고 했다. 

10km를 더 걷겠다고 왕복 100km 자동차 연료를 쓰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날 아끼던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 포루투갈에서 사온 이태리제 선글라스. 몇 년째 오래 써서 몇 주 전 렌즈를 새로 갈았는데 8년이나 애용한 얇은 배낭의 찢어진 구멍으로 빠진 듯했다. 그 애가 밤새 풀숲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 8시 넘어, 복내면 메타세콰이어 숲 초입부터 땅바닥만 보며 3km쯤을 걸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뒤에서 버스가 왔다. 내가 돌아보자 세워주기에 그냥 타버렸다. 보성버스터미널까지 가는 버스였다. 지난 6월 도보순례 때 몇 번이나 갔던 역과 터미널이 눈에 익었다. 

18번 국도 도보순례 내내 차를 두거나 가지러 가야했기에 적어도 세 번씩은 한 마을에 들렀다. 한 번 스쳐지나가는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사람도 두고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듯이 마을도 그렇다. 적어도 가본만큼 친숙해지는 건 확실하다.   

9시 반, 보성버스터미널에서부터 걸어 올라와 11시, 전날 끝난 행복노인복지센터를 3km 앞두고 버스를 탔다. 그날 아침에 생긴, 12시 목사동우체국 점심식사 약속 때문에 더 걸을 수도 없었지만, 당일 목표 거리만큼 다 걸었다. 그것으로 18번 국도 곡성~보성 도보순례를 마쳤다.   

 

☆ 2021년 7월 29일 목 압록 사거리~구례현충공원 마지막 14km

마지막 곡성~구례 구간은 세실과 함께 걸었다. 

작년 겨울부터 함께 걷고 싶다고 했던 그이와의 약속을 드디어 지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려는 내 성격에 역사의 운명이 스토리텔링처럼 더해졌다. 

 

여순사건의 발단이 제주4.3사건인데 마침 여순사건특별법 공포일과 제주 제2공항 건설 사업에 관한 국토부 전략환경영향평가서를 환경부가 최종 반려하면서 사업 절차가 중단된 날이 7월 20일로 같은 날이었다. 극적인 연관이었다. 

제주 제2공항 건설사업 반려의 구체적인 내용은 조류 및 그 서식지 보호방안에 대한 검토 미흡, 항공기 소음 영향 재평가 시 최악 조건 고려 미흡 및 모의 예측 오류, 다수의 맹꽁이(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서식 확인 영향 예측 결과 미제시, 조사된 숨골에 대한 보전 가치 미제시 등이다. 부동의가 아닌 반려로 사실상 결정을 다음으로 넘긴 건 아쉽지만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도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상황이다. 찬성측은 비판하고 반대측은 기뻐한다. 6년간 생긴 주민갈등은 종지부를 찍는 날까지 골이 더 깊어질 것이다. 그 후에도 그들의 상처입은 가슴은 회복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공항부지 건설 하나 놓고도 이런데 살육의 현장을 겪은 4.3사건이나 여순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될 것인가.       

여하튼 재작년 가을부터 작년 초까지 제주 제2공항건설 반대투쟁에 연대했고 추이를 지켜보던 나로서는 여순 사건의 현장이 있는 18번 국도를 제주의 딸 세실과 함께 걷는 것이 의미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초대했고 세실은 곧바로 응했으며 철저한 방역 속에 도착했다. 그동안 함께해오던 탈핵벗들이 아닌 사람과의 동행은 최초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새로운 장을 여는 도전이었다.

 

출발지로 가는 대황강로에서 고라니 주검을 보았다. 차를 세우고 120번에 전화해서 로드킬 신고를 했다. 18번 국도에서 만났던 동물들의 주검이 연상됐다. 그간 걸으면서 신고했던 고양이, 족제비 등은 잘 치워졌을까? 

오전 6시 50분,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압록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뚝 떨어져 말없이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순천시 황전면으로 넘어갔다. 트럭 한 대가 저만치 정차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 차선으로 걷던 내가 다가가자 운전자가 소리쳐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핵 발전소 멈추게 하려고요. 너무 위험해서요.”

   “좋은 일 하시네요.”

궁금증이 풀린 트럭은 다시 출발했다. 새벽부터 걸은 한나절, 14km의 걸음이 그 한 번의 관심, 한 마디의 설명으로 충분히 가치있었다.  

 

등산용 샌달을 신고 흐트러짐 없이 걷던 세실이 순례 내내 말을 건넨 건 두세 마디가 전부였다. 

   “별, 저기 좀 봐요.”

뒤에서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니 섬진강가에서 흑두루미 한 마리가 강물을 관조하고 있었다. 곡선의 미를 간직하고 있는 섬진강에 비친 산그림자와 교각. 더 이상 개발하지 않기를, 나는 두루미의 마음으로 강과 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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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두루미의 관조

 

 

구례시내에 들어서서 농협은행에서 물을 받아 구례성당에서 마시고는 목적지였다.  

마침내 구례현충공원 여순사건희생자위령탑 앞에서 묵념으로 도보순례를 마쳤다.

그리고 탑 아래 정자에서 짧은 순례나눔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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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희생자위령탑

 

 

세실은 6.25참전유공자기념탑과 여순사건희생자위령탑이 마주 보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시대에 따라 나라를 지키다가 명령에 의해 학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군인과 그들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된 민간인, 그 둘은 죽어서도 한 곳에서 기념되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도 걸을 수 있겠다고 했다. 어디서든 걸음을 뗄 수 있다는 건 축하할 만하다. 걸음의 기쁨과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어디를 걸어도 좋다. 

 

나는 무엇보다 해남~구례 240(241.1)km에 보성~구례 104.5km 도합 345(345.6)km을 걸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보성~구례 구간 83여km 중 20여km은 되돌아가느라 걸은 거리라 원 거리보다 길어졌다.)  

그리고 품격(品格)에 대해 숙려했다. 품격은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고 쩝쩝거리지 않고 먹으며 아무 데나 침뱉고 오줌누지 않고 거짓말도 거친 말도 하지 않는 행동 이상의 배려와 존중을 하는 친절한 성품과 태도이다. 품위 또는 기품이라고도 한다. 공손히 거짓말 하는 사람이 있고 막말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말은 거칠어도 속이 여린 사람이 있고 표현은 못해도 진심이 있는 사람도 있다. 하얀 손가락으로 주가조작을 하거나 악플을 쓰는 이가 있기도 하고 굵은 마디 때묻은 손톱으로 공구를 만지고 흙을 일구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품격이란 우아하게 드러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것은 남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제 자랑만 일삼는 일반적인 구분 기준보다는 좀더 미묘한 지점에서 드러난다.

나는 농협은행에서 텀블러에 정수기 물을 따를 때 몇 mm를 더 담으려고 물을 넘치게 했다. 남의 물을 공짜로 마시면서 욕심으로 바닥을 더럽히는 나를 보며 스스로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야 품위를 지킬 수 있다. 품위는 고급 옷과 교양있는 대화로만 대변되지는 않는다. 품격와 품위는 영어로 dignity. 존엄도 같은 영어를 쓴다. [디그니티] 발음했을 때 느껴지는 위엄이 있다. 이 단어의 라틴어인 어원 dignus는 ‘적절한, 가치 있는’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때와 장소에 적절하고 가치있는 생각과 행동의 완성이 품격과 품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몇 평짜리 집, 몇 cc 배기량 차가 부의 기준인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느린 두 발로 걸으며 천천히 세상을 보면서 품격있는 순례를 하고 싶다. 내가 먼저 품격이 있어야 품위있는 친구들과 걸을 수 있다.  품위란 게 별 건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 되지 않겠나.    

 

구례구역에서 세실을 보냈다. 헤어지기 직전, 기다리던 다음 거처에서 연락이 왔다. 집필실 입주작가 공모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곳은 올여름 18번 국도 도보순례를 시작한 곳, 바로 해남이었다. 운명이 나를 남도땅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구나. 혼자도 좋았고 친구들과도 좋았던 18번 국도 보성~구례 도보순례를 그렇게 기쁨으로 마무리했다.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보낸 7월, 처음으로 길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 혼자이기에 가능했다.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그러했다. 나는 이제 조금씩 낯도 덜 가리고 점점 만남의 폭을 넓힐 것이다. 받기만 하던 자세에서 섬길 준비도 조금은 되었다. 길과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선의와 품격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나는 또다시 짐을 싸서 길을 뜬다. 그 하늘에도 여전히 별이 떠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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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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