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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하죽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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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사람들

posted Sep 18, 2025

끝물 토마토를 정리하는데

옆집 아낙이 놀러 와서

노닥노닥 함께 웃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기웃 들어와 무씨를 나누어 주고

건너 사는 홀아비는

딸네가 보내온 고등어 두 마리를 들고 온다

 

이 아침

마당에 모인 우리들

누구도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전문

 

섬마을 1.jpg

 

 

미역 작업이 끝났다. 무사히 안전하게 그리고 수확량도 예전과 비슷해서 다행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마치 올해 할 일을 다 마친 것 같은 홀가분함이 느껴진다. 그만큼 미역은 우리 섬 식구들이 몸과 마음을 쏟는 일이다. 주 수입원이기도 하고.

올해는 한 가구가 건강상의 이유로 빠지게 되어 우선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예전에는 스무 가구가 넘게 했다는데 세 가구로 줄어들더니 이제 달랑 두 가구만 남게 된 것이다. 하는 가정도, 하지 못하게 된 가정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 미역은 마을 공동 작업으로 하는 일인데 한 집이 빠지니 당연히 힘이 없고 재미도 없고 내색은 안 하지만 내년에는 나 또한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도 보였다.

 

섬마을2.jpg

 

 

사실 우리 섬 식구들의 자식들 소원은 연로하신 부모님이 인제 그만 일을 하시는 것이다. 미역 작업이든 농사일이든 제발 그만 좀 하고 쉬시라고 당부하지만 그럼에도 이분들은 멈추지 않는다. 일생 해 오던 일이니 습관이 배어서 그러기도 하지만 이 외진 섬에서 일이 없으면 심심하고 시간 보내기가 지루하다고 하신다. 사실 예전이야 자식들 키우느라 들어가는 돈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먹고 살 걱정을 덜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 있으니 좋고 또 그 수고의 대가에 웃는다. 어느새 노동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하늘이 주시는 기회이고 생명을 존중하는 기반이 되었다.

 

 

섬마을3.jpg

 

 

밤샘 작업을 마치고 간식 타임이다. 일을 마친 개운함과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이들 곁에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세월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인생이 보인다. 좋게 보이려는 치장도 없고 그럴듯하지만, 애매모호한 관념도 없다. 그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과 그에 따른 몸의 반응을 함께 나눌 뿐이다.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도. 자랑이 없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데 험담이 없다. 내게는 그저 사람 소리나 파도 소리가 똑같이 들린다.

사람의 지시가 아닌 자연의 섭리에 맞춰 자연이 내어주시는 대로 거두어 먹고사는 사람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시니 고맙고 할 수 있으니, 감사일뿐 일절 군소리가 없다. 겸손과 감사가 몸에 배어 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시는 데도 내 힘으로 먹고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섬마을4.jpg

 

 

그동안 도와주던 아들이 오늘 나가고 혼자 남은 옆집 아지매. 고생만 하다 간 아들이 어매는 마음 짠하고, 또 그 아들은 두고 가는 어매 앞에 놓인 일거리들이 마음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누구도 입 밖에 내어 그 심정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은 하루 쉬었다가 모레 가라고 했어'라고만 하실 뿐.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심란하게 혼자 미역 작업을 하는 그 곁을 술 한 잔씩 걸친 윗동네 아들 친구들이 와서 시끌벅적하게 지켜주었다. 이곳은, 누구든 혼자 남아서 저 혼자 일하게 두지 않는 따뜻한 동네다.

 

섬마을5.jpg

 

 

섬마을6.jpg

 

 

 

오늘 어르신이 그러셨다. 이번 미역 작업에 빠진 식구들, 마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고. 그리고 거둔 미역의 절반을 나누어 주셨다. 자연이 내어주는 것이니 나누는 것 또한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이웃은 또한 언젠가 나일 것이기에 친절은 호흡과도 같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몸은 안 아픈 데가 없고 비록 행색은 초라해도, 사람의 품격과 인간의 온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 나는 이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착하고 마음이 순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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