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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하죽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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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삽니다

posted May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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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가난한 밥상으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것

덕분에 저는 주님의 계획을 온전히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에 가장 걸맞은 옷입니다

 

그 빈 순수한 공간 속으로

저를 불러 앉히시고

생생한 만나와 까마귀가

여전히 당신 손안에 있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난하지 않고는

당신의 부요함을 누릴 수 없기에

기꺼이 나를 가난하게 하신

당신의 사랑을 감사하나이다.

- <貧者의 노래> 전문

 

자주 왕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늘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지인이 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내가 올해로 일하고 돈 벌고 산 지 40년이에요.

그래서 이제 돈 버는 일은 그만하려고...

아니 정확히는 돈 벌기 위해 일하는 건 안 하려고."

 

"그리고 이제 내 짐은 메고 다닐 수 있는

배낭 하나로 정리를 했는데 자전거만 남겨두고

시내에 있는 거처는 아예 없애려고 해요.

돈 없이 사는 세상을 정말 살아보려고"

 

내가 알기로 그녀는 돈을 벌어서 모으지 않았고 생계유지와 자녀 학비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사용했다. 그러니 그녀의 수중에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만큼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돈 없이 사는 세상을 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나는 그녀를 응원하고 그녀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본다. 어디 먼데 여행을 가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여행지로 선택하고 모험을 떠나는 그녀가 반갑고 소중하다.

 

재미있게 사진 2.jpg

 

 

나는 2년 전부터 세금과 교통비 그리고 미용실 비용(1회 15,000원 × 4번=60,000원) 외에 나에게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첫해에는 45만 5,900원을 썼는데 미용실 포함, 용도는 여름옷, 겨울 신발, 책 구입 등이었다. 한 해를 결산하며 꼭 필요했다기보다는 (그런 것도 있었지만 ) 소비 욕구에 졌다는 느낌이 남았다.

 

그리고 지난해는 지출 액수가 그 절반으로 줄기는 했는데 이번엔 간헐적 단식을 하며 우유나 계란 등의 식비 지출이 있었다. 먹는 걸 줄이겠다니 오히려 식비가 늘어난 상황이 된 거다. 그래도 한 해를 결산하며 드는 마음은 계속 이렇게 안 쓰고 살아보고 싶다는 쪽이어서 올해는 교통비와 세금 말고는 아예 나에게는 돈을 쓰기 않기로 했다.

 

도대체 왜?

처음엔 자본에 대한 반발심 같은 거였다.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그 위력이 일단 싫었다. 거기에 세뇌가 되어서 해보기도 전에 돈이 없으니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만나면 숨이 막히고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서 일단 나부터라도 돈 없이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2년을 완벽하진 않아도 살아본 경험으로는 나를 위해 안 쓰니 남을 위해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았고 제3의 길이랄까, 꼭 돈이라는 수단을 거치지 않아도 나름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평소에는 눈에 안 뜨이던 오솔길을 찾아 걷게 되는 기분이랄까. 돈이 배제된 생활에는 뜻밖의 소소한 비결 혹은 비밀들이 숨어있었다. 무엇보다 없으면 어쩌지? 하던 새가슴이 없으면 말지, 하는 낙천적 기질로 변한 것도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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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성원기 교수님이 주관하시던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길에 참여한 적이 있다. 특별히 탈핵 운동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걷는 걸 좋아하는데 함께 걸을 사람들이 있으니 따라나선 거였다.

 

성 교수님은 예전 내가 작은 도서관에 근무할 때 강사로 와 주셨는데 그 쉽게 풀어내는 탈핵에 관한 내용과 소탈한 웃음과 담백한 성품이 좋아서 담박 팬이 되었다. 그 순례길에 몇 번이나 갔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데 그 경험이 의도치 않게 내 삶을 바꿔놓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성 교수님 자체가 행동하시는 분이라 말씀이 별로 없으셨고 그러니 들은 것도 별로 없는데 더구나 누구에게 자기를 과시하며 영향을 미칠 열의도 없으신 분인데 내가 뭔가 달라진 것이다.

 

나는 늘 결핍과 궁핍 속에 살았다. 어쩌면 내 신앙이라는 것도 없으니 언젠가는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 순례길을 다녀온 후 내 눈은 없다에서 많다로 시력 교정이 되어 있었다. 내 집을 둘러보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어낼까를 궁리하고 있는 나를 보곤 한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없이 살기는.

 

-----

 

오시다 시게토 님이 쓰신 <기도하는 모습에 無의 바람이 분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다시 한번 진짜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생각해 봅니다. 우선 돈이 없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잣대로 재며 좋은 일을 해보겠다는 발상 따위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진짜 재미는 생기지 않습니다." (145쪽)

 

사실, 늘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에게 딱 알맞게 채워주신 것 같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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