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잠시 멈추어
길섶에 숨어있는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음> 전문
작년 겨울 아랫집에서 허리 수술을 하러 나가신 뒤 우리 섬 식구들의 병원 나들이가 잦아졌다. 예전 같으면 병원엘 가보시라 해도 괜찮다고 버티던 분들인데 아플 것 같으니 혹시나 하고 나가기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약해진 것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섬에 달랑 셋이 남아있던 어느 날 아침, 혈압계를 가지고 와 달라는 전화가 와서 혈압을 재 드렸는데 130에 80이 나왔다. 이 정도는 양호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머리가 자꾸 아프다며 두 분이 나가시겠다고 했다. 다음날부터는 풍랑이 일어 배가 안 들어온다니 불안해지신 모양이다. 큰일을 한번 치르신 후라 그 마음이 이해되어서 잠자코 외출준비를 거들어 드렸는데 그러다 문득 내 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나만 혼자 남겨두고?
그제야 현실 파악이 되면서 내 마음이 요동을 쳤다. 나도 따라 나가야지 하는 마음과 아니,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하는 호호거리는 마음.
섬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어 보는 건 오랜 내 로망이었다. 혼자 남게 되면 발가벗고 미친년처럼 꽥꽥 소리 지르며 쏘다녀야지, 떠벌리기도 했다. 섬에 혼자 남겨졌을 때 이 인간이 과연 어떤 마음일까, 뭘 할까 늘 궁금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그것도 갑작스레 닥치니 이 기회를 누려야 할지 아니면 따라 나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혹시 밤에 무섭지 않을까 하는 예측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으니 딱히 생각나는 무서운 장면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내 안에 어떤 두려웠던 기억들이 나를 덮치지는 않을까?
게다가 날씨도 안 좋아진다는데 정전이라도 되면,
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밤에 막 무서워지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멧돼지라도 내려오면....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황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그 막연한 공포가 별별 이유로 내 머릿속을 휘저으며 겁을 주는데 한편으로는 만약 이대로 물러서면 나는 계속 도망 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처음이 어려운 거야.
해보지, 뭐 그 처음.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혼자 섬에서 지내게 되었다. 물론 미친년이 되어서 소리를 꽥꽥 지르며 돌아다니는 일은 없었지만, – 막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뭐 하러 그런 쓰잘머리 없는 짓을 하고 싶어 했을까, 한심했다.
언제나 조용한 우리 동네.
어쩌다 날이 궂어서 일을 할 수 없을 때만 모두 회관에 모여 밥을 먹고 그때 잠깐 누워 낮잠을 자거나 티브이를 보는 게 유일한 오락거리이니 우리는 서로의 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일이 거의, 아니 완전 없다. 간혹 우리 집 문을 두드려도 생선이나 반찬을 들고 와서 문 앞에서 건네주실 뿐 절대 내가 청하지 않은데 들어오시는 일도 없다.
나는 맨날 혼자 있는 편이고 또 혼자가 자연스럽고 편하다. 그런데도 섬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것은 그 혼자 있음과는 달랐다. 그 차이가 뭘까 생각해 보니 섬에 사람이 있을 때는 떨어져 있어도 우리의 의식은 한 공간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의식이 자연스레 내 안으로 모아들었다. 마치 틈이 있으면 빛이 밖으로 새 나가는데 그 틈을 막아버리니 나갈 데가 없는 것처럼 의식은 밀도 높게 내 안으로 집중되었다. 겨우 어찌어찌 명상해야 몰입이 되곤 했는데 그냥 저절로 고요히 머무르는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아무런 낭비 전파나 방해 전파 없이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하는 그 편안함과 자유로움이라니! 다시 그 시간이 그립다.
밤에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고 전보다 문단속을 야물딱지게 했을 뿐 잠도 잘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막연한 공포에 당당히 맞서준 나에 대한 뿌듯함이 반겨주었다.
이 나에 대한 뿌듯함도 얼마만이런가, 반가웠다.
사흘 만에 배가 들어오는 걸 보는데 반가움 속에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식구들이 들어오니 좋으면서도 이 특별한 경험이 마무리되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이런 시간은 또 찾아와 주겠지만 그래도 처음은 이제 아닐 테니까.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을까? 나의 처음은.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놓치지 말아야지.
문득 삶이 숨은 보물 찾기처럼 즐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