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d2d0d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5

posted Sep 18, 2025

강물이.jpg

 

 

*

-당신은 기어코 이야기의 창조자가 되려는 겁니까?

아베스라의 물음에 아오슈나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건 최초의 목격자들과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 그리고 종국에는 얘기꾼들의 몫이지요.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고 덧붙이고 혹은 빼면서 허술한 듯 조밀한 구조를 구축해 내고 부드럽지만 강한 힘을 갖게 하지요.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말이오. 언젠가 아베스라 님이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한 창녀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질 않소. 진실한 말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지 이보다 확실하게 전해주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오슈나르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아니라 자신 이후에 전개될 사태만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베스라가 알고 싶은 건 지금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 가였다.

-내가 보기에 아오슈나르 님이 해오신 일은 이미 역사서의 지면 한쪽을 차지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날카로운 기둥 위에 외발로 서는 방법을 택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역사가 되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신의 뜻을 묻고, 신의 계획을 듣고, 또 내 궁극의 길을 확인하고 실행하는 겁니다.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신의 시간에 올라탈 수 있는가, 수행의 결과는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거지요. 그게 남는 사람들에게 빛이어야 하는 거지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일이 되어선 안 되는 일이기도 하지요. 진실한 말을 찾고, 좋은 이야기가 될지 결정하는 일은 대중의 몫인 거고요.

아오슈나르의 뜻은 분명하고 확고했다. 그는 신과 인간이 필연으로 접속하는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희망과 평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침묵이 니루샤를 무겁게 박제하고 있었다.

 

-왜들 이렇게 침울하고 돌아올 수 없는 길 앞에 선 사람들처럼 견디기 어려운 그늘을 안고 있는 게냐.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오슈나르가 그의 누이들 앞에서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말로 못 살겄소. 우덜을 다 데리고 가소!

우샤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격한 파열음을 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바닥에 깔린 펠트를 거친 손길로 쥐어뜯고 있었다.

-오, 새벽의 여인1)이여! 무엇이 너의 마음을 그리 거칠게 하느냐.

-그것을 몰라서 묻소?

우샤는 여전히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애원하는 목소리로 아오슈나르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긍께 말여라, 오라버니. 굴바하르 그것을 잡아다 쥑이고 오라버니는 살어야 안 허겄소? 안 그요? 나 말이 틀렸소?

우샤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아오슈나르는 안타깝고 답답했다.

-우샤, 너는 세상의 일만 보는구나. 이것은 싸우자는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난 무식혀서 복잡한 이야기는 몰라라. 내 눈엔 오라버니와 영영 이별해야 한다는 거만 보인당께? 오라버니 읎이 우덜은 어치케 산단 말이오?

아오슈나르는 우샤의 억지스러운 투정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넌 네 남편이 죽었을 때도 그런 말을 했다. 도저히 못 살 것 같았지만 잘 견뎌내지 않았느냐?

-거저, 오라바니의 뜻은 알겠지만서두 다른 방법은 없갔시오? 여기 니루샤의 에미나이들이 무식해 개지구 설라므네 사람의 일밖에는 보딜 못하는 거이 사실이디요. 기리티만 이 상황을 어드렇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딜 않는다는 거이를 오라바니도 아셔야 합네다. 우샤가 저레 억지스럽게 구는 거이 오라바니를 끔찍하게 생각해서 기런 거 아니갔습네까?

슬픈 눈의 바하락이 목울대를 울컥거리며 아주 느리게 말을 했다.

아오슈나르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 니루샤는 필생의 사업이었고 이곳의 여인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여인들의 공동체를 세워가면서 자신이 남성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극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여인들의 자율적 공동체를 지향했기에 그 자신의 영향력은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우샤의 따뜻한 희생, 바하락의 추진력 그리고 지금은 에리두로 돌아간 레일라의 영민함이 조화를 이루는 지도력이 갖춰진 것을 자부하였다. 지금 그녀들이 아오슈나르에게 인간의 목소리로 인간의 일을 묻고 있다. 인간은 두려움을 품고 사는 존재다. 그 두려움은 인간을 인간답게도 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게 하기도 한다. 그 둘의 차이는 지극히 미미하여 순간의 선택 혹은 착각으로 길이 달라지기도 하고, 서둘러 되돌리는 시점을 놓쳐버리면 의지로 수정하기란 꽤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신의 섭리를 머리 꼭대기에 얹고 살면서 늘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세속의 고단함에 침윤되어 사람됨의 본모습을 잃고 본능에 의지하는 사이에 두려움은 거센 모래폭풍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지금 니루샤의 여인들이 거기에 있다.

 

-알보루즈 거룩한 산의 북쪽에는 평생을 바쳐 수행해 온 늙은 은수자(隱修者)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죽기 전에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어요.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내며 오직 신만을 생각했기에 그의 안중엔 사람이 없었지요.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도 지팡이를 휘둘러 멀리 쫓아냈습니다. 사람과 만나면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질까 봐 두려웠던 거지요. 그렇게 용맹정진을 하는데도 어쩐 일인지 신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두어 해 전쯤 거룩한 산 남쪽에 젊은 수행자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수행자가 거룩한 산 여기저기에 움막을 지었지만 결국 남아있는 것은 자기뿐 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노수자의 거처에 천방지축인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노인의 목을 안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노인의 물건을 함부로 만졌지요. 노인은 질겁을 했어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아이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아 제자리에 놓기 바빴지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분주하게 아이의 뒤를 쫓다 보니 짜증이 나서 아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죠. 그 순간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아이의 마음이 너를 구원하리라!' 하는 아주 세미한 음성만 들려왔어요. 마음의 귀가 닫혀있던 노수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분심(分心)이 들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진했어요. 달포쯤 지나자 웬 늙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몸에선 역한 냄새가 나고, 흰 머리칼은 언제 빗었는지 얽히고설켜 떡이 져 있었으며, 저승꽃이 가득한 얼굴을 열어 웃어 보일 땐 덜렁거리는 이가 금방이라도 잇몸에서 떨어져 나올 듯 불안했어요. 웃을 땐 입에서 사막 늑대가 게워놓은 토사물 냄새까지 났어요. 노수자는 숨을 쉴 수가 없었지요. 견딜 수 없어진 노수자가 목욕 좀 하고 오라고 버럭 소릴 질렀어요. 그러자 노인이 웃으며 '니가 목욕시켜 줘!'하고 말했지요. 노수자가 코를 막아 쥐고 뛰쳐나가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하고 돌아와 보니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거예요. 노수자는 어리둥절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흔적도 없었어요. 노수자는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사라져버린 노인을 어쩔 수 없다고 여겼지요. 다시 달포가 지났지요. 이번엔 한밤중에 난데없는 무슈크(Mušk)향2)이 진동하더니 젊은 여인이 문을 두드렸어요. 여인은 산달이 가까워 친정으로 가는 중인데 길을 잃었다며 하룻밤 재워 달라고 했어요. 노수자는 당황했습니다. 아무래도 청정도량에 여인을 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자 여인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어요. 노수자는 신이 자신의 음심과 도력을 시험한 것으로 생각해 스스로 대견해했답니다. 자, 이 세 사람의 나그네는 누구일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음날 노수자는 거룩한 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젊은 수행자의 낭패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자신에게 왔던 나그네들이 그에게로 갔을 것이고 그는 분명히 그들의 시험에 빠졌을 거라고 추측을 했던 거지요. 노수자는 젊은이에게 점잖게 한마디 해주리라 생각하고 산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젊은 수행자가 머문다는 움막에서 서광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노수자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움막의 문을 연 노수자는 그만 눈이 멀 것 같았어요. 거기 앉아있는 젊은이의 몸에서 봄 햇살만큼이나 부드러운 빛이 무슈크 향과 함께 퍼져 나오고 있었던 겁니다. 노수자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지요. 그런 노수자에게 젊은이는 '어찌하여 세 개의 시간, 세 개의 성지(聖智)를 맞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하며 공중으로 몸을 날리니 불새 한 마리가 긴 울음을 내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어요. 노수자는 자신의 편협함을 탄식하며 산을 내려갔답니다.

아오슈나르는 아주 느린 눈길로 무거운 침묵 사이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자매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어갔다.

-노수자가 놓친 건 무엇일까요. 그리고 젊은 수자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아오슈나르는 눈을 감고 아주 얕고 긴 호흡을 했다. 코를 통해 들어와 인후와 기도를 흐르며 한없이 늘어지는 기운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인력(引力)을 강화하듯 꾹꾹 눌러 가늘고 긴 숨이었다. 그것은 기다림이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는 니루샤의 자매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 주기 위해 사유의 씨앗이 뿌려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묘판에 뿌려진 씨앗이라고 다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또 싹을 틔우더라도 어떤 것은 제법 빠르게 흙을 밀어내고 나오며, 어떤 것은 아주 더디게 나온다. 신기한 것은 일단 하나가 나오면 여기저기에서 다투듯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렇다. 처음을 기다리는 것이 어려운 법이지 그 시간을 견뎌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오슈나르가 요지부동이었다. 가늘고 긴 숨조차 멎어버린 듯한 모습이 꼭 헬라 사람들이 우러르는 신의 조상(彫像) 같았다.

-늙은네는 공부럴 잘 못 했는 게구만이라요. 한밤중에 사램이 챚어 왔으먼 우선 들여야 헐거인 디 뭔 지랄을 헌다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헌다요?

오래 들고 있기 거북한 유리 단지 같은 긴 침묵을 깬 것은, 들병이처럼 떠돌다 니루샤에 온 작은 엘리제흐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으로 펠트 바닥을 긁듯 쓸면서 말했다. 조용한 여인이었다.

-옳거니! 노수자는 사람을 못 보았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수행이 높아도 사람을 보지 못하면 그건 말짱 헛거지요. 그건 우리 주님이 바라는 게 아닙니다. 엘리제흐 자매의 말대로 한밤중에 찾아온 사람을 잘 맞아들이지 못한 것은 수행자뿐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이야기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젊은 수행자는 그 나그네들을 잘 맞아들인 것 같아요. 그렇죠?

아오슈나르는 다시 자매들을 둘러보았다. 우샤는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을 하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그를 아프게 했다.

-우샤! 젊은 수행자가 본 것은 무었이지요?

아오슈나르의 호명에도 우샤는 여전히 무언가를 빼앗긴 아이처럼 잔뜩 부어 있었다. 한참 있다가 고개를 치들어 아오슈나르를 바라보더니 대뜸 말을 던졌다.

-부질없는 것들을 보았고만이라. 어린 아해도 늙은네도 그리구 젊은 처자도 잠깐 뵈구 사라지는 것들이었응께. 젊은 수행자가 그들을 보았고 누군지 알아챘을지라도 우덜같은 무지랭이덜 헌티는 무슨 의미가 있겄소? 다 배운 냥반들 야기고, 거 뭣인게라 거룩한 산꼭대기 야기 아니겄소? 시방 오라버니도 그런거요이. 오라버니가 챚어가는 거그가 우리같이 비루한 인간들헌티 밥 한끼나 줄거이요?

우샤는 분풀이라도 하듯 말을 쏟아냈다.

그들의 위태위태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베스라는 우샤의 말에 탄복했다. 그녀가 사유의 맥락을 잡고 한 말이 아닐지라도 윗물이 아랫물과 섞이지 못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다. 윗물이 애초엔 물이었다가 종국에는 기름이 되어버리고는 아랫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아오슈나르가 지금 그녀를 떠나려는 상황 속에서 화를 풀어내듯 돈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아베스라는 얼굴을 돌 아오슈나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오, 새벽의 여인이여! 그대의 말에 돋은 가시가 나를 아프게 하는다! 그대는 굴바하르의 일로 분에 사로잡혀 내가 하려는 일의 크기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발아할 수 없는 무화과의 씨와 같다면 내 일은 알보루즈 산정의 철목과 같습니다. 우리네 삶이 신비로운 것은 예측하지 못한 일을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오랜 간구가 어느 한순간에 신의 뜻에 부합하여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늙은 수행자는 평생토록 신의 뜻을 갈구하였지만 신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요구를 신의 뜻인 양 관철하려 한 것이지요. 젊은 수행자가 비록 법랍은 어렸지만 찾아온 세 사람의 나그네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는 첫 번째 시간이었고 추한 노인은 두 번째 시간이었으며 젊은 여인은 세 번째 시간의 화신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본 것은 그의 시간이 신의 시간과 이어졌으니 더는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그는 나그네들을 서둘러 맞아들였습니다. 지치고 굶주린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여러분이 신의 길에 놓는 사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징조에 관한 이야기이며 신이 내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지난번에 광야에서 두 개의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스승 쿠루쉬와 친구 소흐랍의 숙제를 두고 답을 찾고 있었어요. 흑암 가득한 동쪽의 하늘, 명멸하는 별빛 가득한 서쪽 하늘 그리고 그사이의 치열한 싸움. 빛과 어둠의 대혈투를 보고 있자니 눈이 아프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어둠을 빨아들이는 데도 놀랍게 그 크기는 변하지 않았어요. 주먹 두 개를 모은 것만 한 크기였는데 그 작은 구체 안으로 거대한 어둠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거였죠. 어둠이 그렇게 사라지자 세계는 두 개의 거대한 리듬 속에서 조화를 이루었는데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리듬과 왼쪽으로 도는 리듬이 그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때 중요한 힌트를 준 게 누구였는지 아시나요? 놀라지 마십시오. 바로 레일라였어요.

아오슈나르가 레일라를 호명하자 여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워했다. 그녀는 지금 에리두에 가 있지 않은가. 그 먼 곳에 가 있는 레일라가 어찌 아오슈나르의 광야에 나타날 수 있었단 말인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레일라는 에리두에 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씨름하던 곳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어요. 그녀는 내가 고뇌하는 것을 알고 실마리를 알려주기 위해 왔던 겁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내 시간의 파동과 그녀의 파동이 일치하는 지점이 있었던 겁니다. '공명'입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리듬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였다는 그녀의 힌트 덕분에 나는 스승 쿠루쉬와 친구 소흐랍의 뜻을 알 수 있었고, 그 위에 내가 궁구하던 것을 엮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주님이 가리키시는 방향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내게 일어나는 일은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니루샤의 누이들이여! 그러니 여러분은 이 일의 증인이 될 것이요, 첫 번째 전법자가 될 것입니다.

아오슈나르의 말은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속기가 빠지고 선기(仙氣)가 미만하여 처음 세상의 광휘가 은은하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니루샤의 여인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들에게 아오슈나르는 '출타 중인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없는 듯하여 긴장을 놓아버리고 흐트러지면 곁에서 엷은 미소를 띠고 서 있었으며, 어디엔가 있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여기고 보면 아무 데도 없었다. 작업장에서 함께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며 양모를 펼치고 물을 뿌리고 방망이로 그것을 두드리다가도 홀연 보이지 않으면 항용 그의 방에서 기도하는 중이었다. 대개는 존재와 부재의 사이를 오가는 단조로운 왕복운동에서 진자의 움직임이 그려내는 원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녀들은 그가 뿜어내고 있는 본말을 가르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재가 부존재는 아니어서 언제든지 그 육신을 볼 수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현혹하는 존재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사고의 그물에 걸러진 찌꺼기를 사실이라 믿는 허약한 구조물이다. 그래서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기껏 예전을 통해서나 느끼고 믿을 뿐이다. 사랑하는 자식이 전장에 출정하여 죽었을지라도 비로소 그 죽음을 인지하고 슬퍼하는 것은, 수개월을 지나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이후에야 가능하다. 지금 니루샤의 여인들이 아오슈나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곧 그의 존재가 그녀들로부터 사라질 것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로 표현되는 상징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로 표상되는 상징인지 모른다.

 

아오슈나르는 확신에 차 있었으나 니루샤의 여인들에게서 흔쾌한 배웅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면 나와 저 누이들 간에 격의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 모르지요. 아니, 시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갖는 '낯섦'은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오슈나르는 아베스라가 선뜻 끼어들 수 없는 침묵 속에 흐르는 모래시계의 알갱이에 새겨진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것처럼 보였다.

-존재의 낯섦이야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숙명이 아닐지요. 자신조차 낯설 때가 있는데 남이야 어떻겠습니까.

아베스라는 아오슈나르의 얕은 호흡 끝에서 보이고 만 틈을 파고들었다.

-본질적으로는 몸담은 세계가 달랐고 지향점이 달랐는데 그것은 차이를 넘어서는 다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상에서 존재자의 외피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 다르게 변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 앞에 무력한 존재니까요. 우리가 한때 한마음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왜 없었겠습니까. 처음의 낯섦이 오히려 동질성을 느끼게 했는데, 익숙함에 길들여진 이후로는 다름만을 보게 되었지요. 서로 다른 시간의 파장이 각기 다른 삶의 무늬를 만들어내는데, 그들이 느끼는 '낯선 나'를 어쩔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것이 더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겠지요. 그녀들이 각자의 시선 속에 옭아두었던 나를 풀어 각각의 이야기를 지어낼 테니 말입니다.

아오슈나르의 흐린 미소가 애잔해 보였다.

-시생은 아오슈나르 님의 궁극을 향한 치열함을 들었으니 장차 하시려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미진함이 있거니와 여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언뜻 굴바하르의 일을 떠올리며 연관 짓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항차 굴바하르는 어찌하실 셈이신지요.

아베스라의 말에 아오슈나르는 잠시 해를 가리는 구름을 지나 보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확실한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습니다. 화해와 용서라는 지고지순한 결말을 통해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 것인지, 악의 필멸이라는 통쾌하지만 진부한 이야기로 마무리할 것인지. 전자가 나 자신을 위한 구성이라면 후자는 니루샤의 누이들을 위한 배려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배제하고 신성한 불꽃 아샤 바히쉬타(Aša Vahišta)3)의 결정에 따르려 합니다.

아오슈나르는 천천히 일어서 제단 너머의 거룩한 불을 향해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계속)

 

----------

1) 우샤라는 이름이 고대 아리안(인도-이란)의 전통에서 새벽을 의미하며 '새벽의 여신'을 지칭한다.

2) 사향을 일컫는 페르시아어. 고대 페르시아에서 사향은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사향(musk)'이라는 단어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동쪽의 사향노루나 다른 향기 나는 동물의 분비물이 귀한 향료로서 페르시아 지역으로 활발하게 유입되고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정. (gemini 참조)

3) '최상의 의로움'을 뜻하며 아후라 마즈다가 자신을 돕는 존재로 처음 창조한 일곱 신의 하나. 추상적인 개념을 인격화하는 고대 인도·이란 계통의 종교에서 보이는 특징을 알 수 있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1.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6

    * 귀슈탐과 바흐아도르가 니루샤를 다녀간 후부터 니루샤와 '시간의 언덕'(니루샤 북쪽의 분지를 아오슈나르가 그렇게 불렀다)이 부쩍 분주해졌다. 잘 마른 다비목을 실은 나귀와 낙타가 '시간의 언덕'에서 짐을 부리고 나면 인부들이 니루샤...
    Date2025.10.14 By관리자 Views12
    Read More
  2.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5

    * -당신은 기어코 이야기의 창조자가 되려는 겁니까? 아베스라의 물음에 아오슈나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건 최초의 목격자들과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 그리고 종국에는 얘기꾼들의 몫이지요...
    Date2025.09.18 By관리자 Views28
    Read More
  3.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4

    아베스라는 아오슈나르가 대강 일러준 대로 길을 걸었다. 계속된 상류 지역의 가뭄으로 턱없이 낮아진 하상을 걸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유프라테스강 지류를 건넜다. 이 작은 하천은 소멸 중인 것 같았다. 계속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걷고 걸었다. ·&...
    Date2025.08.16 By관리자 Views43
    Read More
  4.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3

    Ⅱ-6 -워매 워매! 야가 왜 이런다냐. 야야, 바토야! 너 왜 그냐? 우샤가 낙타 바토에게 사료를 주러 갔다가 평소 보지 못하던 이상한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거저, 와 기렇게 호들갑이네? 바하락이 우샤의 높아진 목소리에 축사로 건너오며 핀잔을 ...
    Date2025.07.09 By관리자 Views64
    Read More
  5.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2

    * 아오슈나르가 문득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레일라를 생각하면서, 몇 해 전 제국의 서쪽 끝에서 만났던 떠돌이 헬라인에게서 들었던 디오티마(Diotima)에 관한 이야기가 겹쳐졌다. 서쪽 바다 건너 헬라의 만티네아(Mantinea) 지방에 디오티마라...
    Date2025.06.11 By관리자 Views56
    Read More
  6.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1

    흑암 속으로 잠겨버리고 싶었다. 모래를 반사하며 빛나는 작은 빛조차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얇은 꺼풀을 통과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어서 케피예로 눈을 둘러 머리 뒤에서 묶었다. 그러나 눈을 막는다고 망막을 통해 들어온 사실에 대...
    Date2025.05.14 By관리자 Views78
    Read More
  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0

    굴바하르가 돌아오고 열흘쯤 뒤였을 것이다. 행정관 카마란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읍내를 떠도는 유녀 십여 명을 니루샤에서 받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읍청으로서는 니루샤가 정기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정중하고도 간...
    Date2025.04.08 By관리자 Views127
    Read More
  8.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9

    *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아베스라는 동방의 성자 고타마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경구를 읊조렸다. -아오슈나르여! 거기서 도를 보았소이다 그...
    Date2025.03.14 By관리자 Views149
    Read More
  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8

    굴바하르는 충격이 좀 컸는지 며칠을 자신의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종일 우두 멍하니 누워 뚫린 천정의 빛우물을 쳐다보다, 우샤가 보리를 불려 끊여낸 죽을 들고 들어가면 겨우 일어나 바싹 구워진 난을 뜯어 그것을 떠먹었다. 다행히 그녀의 식욕은 여...
    Date2025.02.08 By관리자 Views163
    Read More
  10.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7

    얼마 후, 하란에서부터 함께 길을 걸었던 낙타 바토가 입술을 심하게 떨고 연거푸 침을 뱉어내더니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반 식경이 지나자 땅이 심하게 흔들리고 비히브(beehive, 원추형 흙집)의 벽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는 땅이 울더라고 ...
    Date2025.01.13 By관리자 Views15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