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6
-워매 워매! 야가 왜 이런다냐. 야야, 바토야! 너 왜 그냐?
우샤가 낙타 바토에게 사료를 주러 갔다가 평소 보지 못하던 이상한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거저, 와 기렇게 호들갑이네?
바하락이 우샤의 높아진 목소리에 축사로 건너오며 핀잔을 던졌다.
-야가 구유를 밀어버리고 머리를 요란허게 흔들먼서 눈물을 흘리네. 이게 먼 일이다냐?
우샤가 뒷걸음으로 두어 걸음을 물러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레? 어디 좀 보자우!
바하락이 바토에게로 다가갔다. 바토는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아래위로 연거푸 흔들더니 바하락의 어깨에 머리를 비벼댔다.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흘렀는데 금방 바하락의 어깨가 젖을 정도였다. 바하락은 가만히 바토의 목을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쓸었다.
-니보라우, 바토! 쾌탼아야, 거럼, 괜탼티 말구. 아모 일 없을 거이니 걱덩하디 말라. 알간! ······너레 이러는 거 보믄 주인님이 좋아 하시갔네? 기리니끼니 진정하고 여물 잘 먹고 힘내라! 알갔디?
바하락이 그렇게 한참 동안 바토의 목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한결 자연스러워지자 바하락은 등을 툭툭 치며 몸을 빼어냈다. 그리고는 우샤에게 눈짓을 하며 우리를 나왔다.
-쟈레 어제 오라버니하구 나가디 않았었네?
-그랬제?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제!
-어데 갔었는지 모르네?
-물어봐도 말을 안 허던디? 왜? 머 짐작 가는 거라도 있는가?
-기런 거이를 무슨 재주로 알 수 있네? 낙타는 영물이라 일없이 저럴 거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거이디.
-오라버니헌티 꾸중 들어서 그런 거 아녀?
-기렇다면 골 부리고 승질을 내지 조롷게 눈물을 흘리디는 않을 거란 말이디. 거저 답답하구나야!
*
-에레츠가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아베스라가 바랑을 챙기며 묻자 아오슈나르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에레츠를 어찌 아시오? 여기서 하루 반나절은 걸어야 하는 곳이오. 나도 한 번밖에 가보질 못했소만······
-시몬 수사에게서 들었습니다.
-아, 그 땡초!
아오슈나르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아베스라가 보았다. 아오슈나르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칫하면서 입술을 모아 내밀었다가 접었다.
-지금은 거의 폐허처럼 변해 있어요. 한때는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에게 성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고 들었소만······ 시몬이 여기 왔을 때 딱 한 번 따라갔었소. 그 땡초가 거길 둘러보더니 얼마나 격하게 통곡을 하던지,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조차 따라 울고 싶어집디다. 그건 그렇고 동행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 내일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아오슈나르는 미안함을 숨기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원래 혼자 다니는 데 익숙한 사람인지라 대략 위치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절벽 수도원을 홀로 지키고 있던 토마스 노수사의 두루마리에 거룩한 신의 도시라는 표현이 있습디다. 저의 짧은 소견머리로는 도무지 그곳이 어딘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는데, 시몬 수사가 에레츠라고 알려 주더군요.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이었어요.
-나도 그 땡초에게 들었어요. 이주 유대인들의 아픔이 서린 곳이더군요. 그리고 서로 다른 지향을 가진 겨레의 비극이 배태된 곳이라는 생각도 들더이다.
아오슈나르는 문득 시몬의 유쾌한 얼굴에 드리워진 근원을 알 수 없는 피로감을 떠올리며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베스라로서는 그게 뜻밖이었는데 아오슈나르가 시몬에 대해서만큼은 늘 호쾌하고 밝은 모습으로 언급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천기를 읽을 줄 안다는 늙은 마구쉬가 있었습니다. 별의 운행을 보고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노 사제였소. 시기를 특정하진 않았는데 유대의 한 작은 마을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위대한 성인이 나올 거라 예언했지요. 그는 제 민족으로부터는 끝내 배척당할 것이지만 종국에는 그들보다 크게 될 거라고 말했죠. 그러자 그게 왜 보잘것없는 민족에게서 나오겠냐며 그동안 그의 이름 위에 쌓였던 명성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시몬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어요. 그 친구가 자기도 들은 적이 있다며 아주 좋아했어요. 그러고는 탄식하며 말했죠. ······고난받는 주의 종, 나는 그 얘기를 바빌론의 이름 없는 예언자가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 없는 고통을 노래한 줄 알았다네. 그런데 딜밧(Dilbat)에서 만난 어떤 마구쉬가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들려준 그 얘기를 생각해 보니 다르게 읽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구먼. 나는 점성술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전해오는 노래에 포개어보면 오실 이를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아. 아, 그런데 오실 그분의 고난이 지금의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닌지 두렵다네! 그분의 수난 이후에도 우리 겨레가 세상에 지을 죄가 무서워!······
아오슈나르는 탄식하듯 시몬의 말을 되뇌고 있었다.
다음 날 아베스라는 에레츠로 향했고, 아오슈나르는 낙타 바토를 이끌고 니루샤의 북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어서 바람이 서늘했다.
*
그즈음 수사의 성직위원회에서 보내온 서찰이 우르크 사원을 통해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굴바하르가 여기저기 들쑤시며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수상한 패거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답디다. 수사에까지 갔었던 모양입니다. 지난번 사원으로 웬 사내가 책임 사제에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옷차림이 드물게 훌륭했는데 언행과 부조화가 심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요. 민사관(民査官)을 통해 내밀하게 조사를 했었죠. 톤박을 연주하는 유랑 악사였는데 닳고 닳아서 웬만한 사람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패거리에 이곳의 건달이 하나 끼어 있는 걸 발견한 민사관이 몰래 잡아다 족쳤던 모양입니다. 그 건달 말에 의하면 평시엔 그 둘만 붙어 움직이고 물리력이 필요할 때만 나머지 패거리를 모아 동원한다더군요. 그래서 톤박 연주자와 굴바하르가 정확히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며, 그렇지만 주로 큰 사원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고 합디다. 그래서 알음알음 제 동기들과 우리 민사관의 연통망을 통해 알아보니, 굴바하르의 몸뚱이가 미끼이고 그걸 문 사제들에게 접근해 협박하고, 아오슈나르 님에 대해 터무니없는 황언위사(謊言僞辭)을 전파하는 건 톤박 연주자 조학이라는 자였습니다.
사안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하고 직접 성직위원회의 서찰을 가지고 온 바흐만이 매우 염려하였다.
-그것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주로 수사와 파르사(페르세폴리스의 페르시아어 명칭) 인근의 사원에서 주임하는 성직 위원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바흐만은 차 한 잔만 겨우 마시고 책임 사제 바스파르가 눈치채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며 서둘러 일어서며 첨언을 했다.
-늙은 말들에게 굴바하르의 몸뚱이는 몰약입니다. 제가 공부한 상학(象學)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니, 유념하시고 대책을 세워야 하실 겁니다.
바토를 타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면서 아오슈나르는 소흐랍이 만났을 세 번째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무시무종의 무량겁을 흐르는 신의 시간에 접속하는 일이야말로 그분의 승인 없이는 불가할 터인데, 소흐랍은 어떤 말로 신의 언어에 다가갈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 거대한 파동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리듬을 버리고 우주의 리듬에 올라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굴바하르에게 치욕을 당하고 얼마 동안은 수치심과 분노 때문에 견딜 수 없었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나자 그것은 아오슈나르 자신에게 향했다. 비록 미치광이풀이 매개한 것이긴 하였지만, 영혼 없는 쾌감에 몸을 떨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혈류를 따라 흐르던 감각 따위를 거부하지도 못하던 형편없는 나약함이 보였다. 결국, 결국엔 문제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자신의 터무니없이 부실한 영혼이 문제였다는 결론에 이르자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밖에서 부는 거센 바람에 몸이 흔들릴 수는 있겠지만, 몸에 담긴 영혼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항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스승 쿠루쉬 문하에 들었으니 사실상 그때부터 영혼을 닦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걸 깨닫다니 하는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그걸 깨닫고 나자 천천히 자신의 리듬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아오슈나르는 수사에 가지 않기로 했다. 성직 위원들에게 이러고 저러고 해명하는 게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굴바하르가 어처구니없는 중상을 하고 다니는 것에도 아예 대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돌이켜 바른 마음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자의 분별없는 행위는 시간과 리듬의 불화, 부조화가 작용하여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한 존재는 돌이킬 수 없는 역조(逆造)의 파동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바토, 여기다.
새벽 어스름에 출발하여 해가 부드러운 채색을 거두고 제법 따가운 살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에 이르러 도착한 곳은, 둔덕이 제법 넓은 분지를 이룬 곳이었다. 조금 거친 황무지를 높지 않은 사구가 둘러싼 형국이었는데 평지와 모래 언덕이 만나는 불규칙한 선형을 따라 관목이 듬성듬성 무리 지어 있었다. 이곳은 아오슈나르가 라르사에서 지진이 있던 무렵에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지맥이 동서로 흐르는 지맥을 만나 그 기운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상승하는 보기 드문 곳이었다.
'지기가 우선하면서 하강하면 우주의 기운이 좌선하면서 그것을 끌어올리는데, 두 힘이 균질의 상태에 이르는 한순간, 시간의 흐름은 정지한다. 우주의 시간과 땅의 시간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 시간은 매우 짧기 때문에 순간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오직 그 순간을 포착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신의 허락이 합일되는 찰나를 구해야 한다.'
아오슈나르가 굴바하르 사건 이후에 기도와 명상을 하는 가운데 이곳을 떠올리며 얻은 사유의 일단이었다. 그는 소흐랍이 찾아 건너간 세 번째 시간의 실마리를 낚아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스승 쿠루쉬의 영이 탄식하며 유언처럼 남긴 '죽음을 개인의 사건으로 만들지 말라'던 말도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신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변화를 끌어낼 각오가 있어야 했다. 마침내 그것은 희생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토, 보아라. 참 좋은 땅이구나! 여기서 얽히고 뭉쳐진 실타래가 처음 자아진 실처럼 깨끗하게 풀릴 것이다.
아오슈나르가 둥글게 이어진 사구가 끊겨 저절로 통로가 된 분지의 남서쪽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다 바토의 등에서 내려서며 말하였다. 바토가 머리를 흔들어 아오슈나르의 허리에 문지르며 푸르렁푸르렁 낮은 신음을 내었다.
*
아오슈나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이 물러가고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에 맞춰 '거룩한 불' 앞에서 예식을 하고 기도와 명상에 들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선정에 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느닷없는 거대한 불꽃이 그의 눈에 보였다. 놀라서 번쩍 눈을 떴는데도 불꽃은 사라지지 않고 또렷하였다. 얼마나 생생하던지 화염이 그를 향해 덮쳐오는 듯하여 공포를 느꼈을 정도였다.
거센 불꽃이었다. 노랗고 흰 그리고 푸른 불꽃, 그 바깥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붉은 화염이 서로 어우러지는 거대한 불꽃이었다. 불덩이 안에는 형체를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응축된 빛의 씨앗 같은 것이 점점 커지면서 유리구슬 모양의 구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확산의 시간에 미치지 못한 기운이 구슬의 내부에서 거칠게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여전히 투명한 구체의 내부에서 수축의 시간을 벗고 확산하려는 거대한 기운이 회오리를 치고 있었다. 구슬을 둘러싼 불꽃이 점점 커지면서 두 개의 덩어리를 만들어 갔다. 그 하나는 좌선하면서 불꽃을 키워 상승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우선하면서 불꽃을 수렴하며 하강했다. 두 개의 기류가 엉키면서 생긴 팽팽한 응력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쿠릉, 쿠릉, 쿠르릉······ 두 개의 힘이 부딪치면서, 처절한 싸움에서 이기고야 만 사자의 포효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굉음의 끝에 세상을 가르는 섬광이 구체에 내리꽂히고 산산조각을 내었다. 이어 폭발하듯 확산하는 불꽃이 회오리를 이루며 상승하였다. 그 불기둥을 타고 불새 한 마리가 날카로운 울음을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모래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가볍고 얕은 소리였는데 점점 무겁고 깊은 울림을 내고 있었다. 어디서 몰려온 것인지 무수한 암회색 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점들이 검은 옷을 입은 남녀에게로 몰려 가 전신을 뒤덮자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을 길게 그었다.
아오슈나르는 연이어 사흘 동안 똑같은 시간에 보인 세 개의 환상에 혼란스러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을 입구의 앙상한 올리브 나무(귀슈탐의 전언에 의하면 약 백여 년 전에 수상쩍은 점성술사가 심은 것으로 이곳의 거의 유일한 올리브 나무라고 한다)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환상이 말하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서 시공의 질서가 재구축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은 무수한 사건의 직렬인가? 그렇다면 한 줄로 늘어선 사건 가운데 하나를 소멸시킨다면 시간에 균열이 생기는가? 그렇게 콕 집어 뽑아낸 사건으로 인해 한 사람의 시간 끝에 있을지 모르는 결괏값이 바뀌는가?'
'시간이 유체라면 흐름의 방향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흐름의 처음과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본류와 지류의 접점을 찾는 일은 가능한가?'
'레일라가 말했던 안팎의 구분이 무색해지는 띠가 시간이라면 생사를 애써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그것이 한 개인의 차원에만 머문다면 부질없는 윤회에 갇힐 것이니 영원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또 다른 숙제가 아닌가?'
'종말이 사멸이 아니라 시간 차원의 이동이라면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에 몸을 싣는 것은 비상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걸 신의 허락이라고 할 것인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벗게 되면 두 개의 시간 차원을 보게 될 것인데, 하나는 앙그라 마이뉴의 혼란 그득한 시간이요, 다른 하나는 아후라 마즈다의 거룩한 시간일 것이다. 앞엣것으로 던져지는 몸은 악귀가 되고, 뒤엣것으로 갈 존재는 신인(神人)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날 것이다'
이런저런 궁리 속을 유영하다, 그 첫 번째 환상은 시간 차원의 문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에서 부싯돌의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스승 쿠루쉬의 영이 탄식하듯 던진 말과 친구 소흐랍의 확신이 아귀가 들어맞듯 하나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신이 그 앞에 열쇠 하나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했다.
-맞춤한 곳이다! 개인적인 것이 아닌 종말을 말한 스승님의 유지와 결단을 강조한 내 친구 소흐랍의 말, 그리고 안팎을 구분 짓지 않는 경지를 알려 준 레일라의 말이 합생(合生) 하는구나. 비로소 나의 주께서 열쇠를 내려주시는 도다! 보아라! 여기 새로운 차원으로 가는 문이 있다. 저기 단단히 잠긴 자물통이 있지 않으냐. 내가 받은 열쇠를 꽂아 돌리면 그뿐이다. 아! 벅차도다.
아오슈나르는 낮은 사구로 둘러싸인 분지를 바라보며 벅찬 감흥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작은 분쟁은 맞서 싸워 이기는 것으로 옳음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큰 싸움은 무기를 드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선을 향한 큰 결단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초월하지 않고는 애매한 지점에서 서성거리는 자들에게 길을 보여줄 수 없다.'
그는 북쪽 사구 꼭대기에 올라서서 분지를 바라보았다. 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광이었다. 한참이나 서서 그곳을 둘러보던 그가 손차양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케피예를 풀어 바닥에 깔고, 샌들을 벗고, 발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 위에 서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부터도 창조되지 않으시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여!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당신은 천지 간에 유일하게 숭배받으시는 분!
태양과 별이 다닐 길을 그어주시고,
하늘과 땅을 지어주시고,
사람과 온갖 생물을 살게 하셨나이다.
생사장(生死場)의 섭리도
인간의 시간 위에 소망을 얹어 주신 것도 당신이시니
아, 제가 어찌 당신을 찬양하지 않으리이까?
이제 당신이 내려주신 열쇠를 받아들었사오니
무엇이 두렵겠나이까.
이제 당신의 시간으로 건너가려 합니다.
제가 온전히 길을 찾아가게 하소서.
오, 주여!
미워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제 몸을 제물로 드리오니,
이로 인하여
그들이 다시 나게 하소서!
다에바의 자식으로 세상에 온 자들과
그에게 영혼이 사로잡혀 그릇된 선택을 한 자들에게는
반창조(反創造)의 섭리를 보이소서.
이제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겠나이다.
저의 시간을 멈추고 당신의 시간 위에
온전히 제 리듬을 맞추겠나이다.
영원한 영광 받으소서!
기도를 마친 아오슈나르가 바토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작은 마대 자루와 물주머니를 끌어내렸다. 자루에서 난 한 장과 대추야자 한 움큼을 꺼내 케피예 위에 놓고 도기로 된 잔과 대접을 꺼내었다. 케피예 옆 모랫바닥에 대접을 놓더니 물주머니의 주둥이를 열어 가득 따랐고 마대 자루의 주둥이를 벌려 놓았다.
-바토, 오늘 점심이다.
아오슈나르는 바토의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나 바토는 주둥이로 자루를 밀어냈다. 물이 가득 든 대접도 엎어버렸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바토, 왜 그러는데? 웬 심술이야?
그러나 바토는 여전히 목을 뒤로 빼 흔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콧구멍을 한껏 넓히며 이를 드러내고 푸룩푸룩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제 머리를 아오슈나르의 등에 비비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오슈나르는 그제야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서 바토가 어떤 낌새를 알아채고 있음을 느꼈다.
-오, 바토! 너는 무엇을 보느냐, 내 길이 보이느냐? 잘 보았다. 그러나 서운해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느니. 어떤 사람에겐 처음이 있고 끝도 있어 종국에는 파국에 이르러야 하며, 또 드물게 어떤 이는 처음과 끝이 하나로 이어져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닌 상태에 머물며 변화하는 경지를 갖게 된다. 물론 이런 경지는 자신의 힘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허여가 있어야 하지.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머물 수가 없구나. 삶의 리듬이 도무지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지. 네 놈이 일전에 너 닮은 낙타에게 끌려 북쪽으로 달아났던 적이 있었잖느냐? 같거나 비슷한 리듬에 끌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게 그때가 온 것뿐이란다.
아오슈나르는 다시 한번 분지를 내려다보며 두런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놀랍게도 분지와 사구의 경계에 듬성듬성 늘어선 관목 사이에서 사막딱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사막딱새가 낮게 날아 분지의 가운데쯤에 이르자 수직으로 치솟듯 비상하여 사라졌다. 마치 어떤 기운이 빨아올리는 것 같았다. (계속)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