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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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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4

posted Aug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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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스라는 아오슈나르가 대강 일러준 대로 길을 걸었다. 계속된 상류 지역의 가뭄으로 턱없이 낮아진 하상을 걸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유프라테스강 지류를 건넜다. 이 작은 하천은 소멸 중인 것 같았다. 계속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걷고 걸었다.

······ 터무니없는 풍광이 나올 때까지 계속 걸으시오.

아오슈나르의 말을 떠올리며 아베스라는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황량한 풍광 너머의 낮은 사구들을 보고 있었다. 사구가 햇빛을 받아 만들고 있는 음영의 물결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터무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나절을 걸었을 때였다. 무릎 높이의 허물어진 흙벽 잔해들이 나타났다. 한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었다. 물길이 방향을 틀어 마을에서 멀어지면 사람들은 떠나고 마을은 풍화되게 마련이다.

'인생이라고 다르겠는가?'

아베스라는 부서져 흩어가고 있는 흙벽을 보며 스승이 들려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옛날에 말입지. 언제나 열심인 사냥꾼이 있었는 게라. 이 사냥꾼이 제붑 활을 잘 쏘았나 봅지. 들짐승을 만내믄 열에 아홉은 멩중을 시켜 사방 마을에 그 멩성이 자자했다고 전해 집지. 하루는 그이가 초원으로 사냥을 떠나게 되었습지. 한참 사냥감을 찾아다니는데 풀섶 위로 어둑한 짐생 하나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습지. 그 사냥꾼은 흥분하기 시작했습지. 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빼 들고 짐생을 향해 쏘았는데 어둑한 짐생은 더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는 게라. 그때 다른 사냥꾼 하나가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뭐라 소릴 지르며 크게 웃었습지.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생각한 사냥꾼은 평정심을 잃고 서둘러 화살을 쏘아댔습지. 어둑한 짐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초원을 빠져나갔고 말입지, 살통의 화살을 남김없이 쏘아댄 사냥꾼은 크게 낙심하고 자신에게 분노를 했습지. 하늘엔 커다란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나는 수리 한 마리가 있었고 말입지, 그러고 보니 사냥꾼이 쫓아가며 화살을 쏘아댄 어둑한 짐생은 다름 아니라 그 수리의 그림자였던 겝지. 우리네 삶이란 것도 그렇습지. 수리를 보지 못하면 허둥허둥 그림자를 쫓으며 살통은 비어가고 인생은 저물어 가는 게라!

 

생(生), 삶······.

저물어 가는 생을 가진 어떤 존재도 자기의 시간을 초월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어떤 유정물도 처음이 있으며 마지막을 향해 간다. 처음에서 마지막으로 가는 동안의 흐름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 개체에 할당된 시간의 길이를 가진 인생은 그걸 넘어서는 시간의 질감을 알 수 없다.

스승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라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진정한 주인이란 시간이라고 말했다. 유정물은 우연히 그것의 한 구간에만 편승하도록 허여된 존재이며 그리하여 쓸쓸한 풍경 속에서 저물어 간다. 그러나 그림자가 아니라 하늘의 수리를 볼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하늘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알아챈 사람은 복이 있다. 아, 그리운 스승님!

 

······ 태양이 중천에 떴는데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있습지. 그 사람은 세상을 밝히려는 갸륵한 마음은 있으나, 맥락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슬픈 사람이 되고 말았습지. 우리네 공부도 그러한데 말입지. 높은 뜻을 개지는 것은 중요한 게지만서두 그 뜻이 펼쳐지고 스며들 우주의 모든 유·무정물들과 관계를 엮어내지 못하면, 수리의 그림자를 쫓고 벌건 대낮에 횃불을 쳐들고 호락하는 꼴이 되고 맙지.

 

스승은 관계를 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행도 절대자에 다가가 관계를 맺고 연대하는 것이다. 스승과 도반들과 세상과 그리고 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요가와 끄셰마를 거듭하는 민중들과 심지어는 가축들에까지······ 뿐만 아니라 우주에 미만해 있는 모든 존재와 어떻게, 어떤 관계를 엮어내고 연대하는가, 그 길을 찾는 일이 수행자가 해야 하는 요가라 했다. 우리가 찾는 진리는 그들에게 보여줄 길이어야 한다. 무엇이든 되어질 가능성이 충만한 상태인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

아, 나는 그 길의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는가! 아베스라는 열풍에 들끓는 대기의 불안정한 흐름보다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회오리치고 있는 자괴지심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가 아그레의 승문(僧門)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겠다고 말하자, '큰 공부허고 돌아올 거고만 입지!'라며 아이 같은 맑은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 주던 스승의 모습이 눈에 맺혔다. 아베스라는 종종 자신이 스승이 준 가르침을 담아내기는커녕 그릇이 터무니없이 작아 하릴없이 넘쳐 사라지게 하고 있으니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부한 것과 다른 사유의 방편을 찾아보겠다고 초원을 나왔으나 오히려 사유의 실타래는 얽히고설켜 다양한 변수에 따라 흔들리고 있질 않은가. 변수들에서 그것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법칙을 찾아낸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긴 문제를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변수는 상수로 소환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굳이 상수니 변수니 하는 명호를 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조건을 빌어 본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변화해야 할 존재는 외물이 아니요, 자기 자신이었다.

아베스라는 허물어진 흙벽 앞에 바랑을 벗어놓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내 흙벽을 넘지 못한 모래가 만든 사면에 미끄러져 벌렁 눕고 말았다. 찬연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망막의 기능을 무력화시켰다. 아베스라는 눈을 감았다. 빛의 잔재가 여전히 눈꺼풀 안쪽에 남아 흑암이어야 할 동공을 애매한 미명 속에 잠기게 했다.

 

······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말입지, 보이지 않는 것이 내는 작은 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허는 겝지.

 

스승의 말을 되새기며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 귀를 열었다. 그러자 바람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읽을 수 있었으며, 햇살이 만들고 있는 직선의 굉음이 들렸고, 엇박의 쾌음을 내며 흐르는 모래의 쫑알거림도 들렸다. 그렇다! 가청권 밖의 우주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내 몸의 심연에서 내보내는 태초(처음)의 신호를 읽고 그것에 맞춰 리듬을 지어낼 수 있다면, 지금 이대로 녹아 사라져도 좋으리라! 아베스라는 혼곤한 무의식이 그의 세포를 하나씩 점령해 들어오는 듯한 감각 속에서 의식이 해체되며 다짜고짜 수크라(Śukra, 정액)를 뿜어내는 환각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쾌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킨 아베스라는 바지 앞섶이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기겁을 했다.

-이 빌어먹을 축생을 어이할꼬!

 

*

아베스라는 기이한 깃발을 등에 메고 에레츠를 향해 걸었다. 지팡이에 펼쳐 맨 흰색 바지가 바랑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후힛, 후힛 하고 기가 빠지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초원에 남아 수행 중인 동도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승문을 나가더니 결국 나락에 떨어져 유랑가무단 깃발이나 메고 다닌다며 통탄할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한편 기가 막히고 한편 통쾌한 생각에 삐질삐질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떠돌이 수행자나 유랑가무단 가객이나 다를 게 무에란 말인가! 다르다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이라도 주지만, 나 같은 얼치기 수행자는 뙤약볕 내리쬐는 벌건 대낮에 헛되이 수크라를 쏟으며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이지! 염병할 땡추 같으니······

그의 바랑에 걸린 바지 깃발은 치열하지 못한 수행과 불임하는 사유에 대한 부끄러운 자기 고백이었다. 아베스라는 뜨거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움직임이 뒤통수에 전해질 때마다 발심수행경(發心修行經)의 초심자권학장(初心者勸學章)을 되풀이해 암송하면서 마음밭을 갈아엎고 또 갈아엎었다.

사막의 일몰은 거침이 없다. 태양은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는 동안에도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얇은 일몰운(日沒雲)을 슬쩍 보여줄 뿐 미련 따위도 없이 곤두박질친다. 그러고 나면 어둠의 시간이다. 처음엔 박명을 어느 정도 허용하다가 인내하지 못하고 점령군처럼 사위를 접수한다. 그러나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 한낮의 햇살에 몸을 달구며 빛을 축적한 모래가 흩뿌려진 듯한 하늘이다. 수효를 감당할 수 없는 별들의 연합군이 모여 내뿜는 찬연한 빛의 향연에 맥없이 미명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사막의 밤은 빛과 어둠이 더불어 있는 공간이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시간마저도 미동하는 것이다.

아베스라는 고운 모래를 찾아 케피예를 펼친 뒤 그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그는 한밤의 사막이야말로 우주의 리듬과 시공의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이따금 빠르게 곤두박질치는 유성을 볼 수 있다.

-접속인가?

빠르게 광흔(光痕)을 만들며 사라지는 별이 있다. 그것은 별이 아니라 어쩌면 아오슈나르가 말한 신의 리듬과 한 인간의 리듬이 일치하는 순간의 발현이고, 이내 이쪽 하늘 공간에서 저쪽 하늘 공간으로 건너가는 환희의 지점이라 여겨졌다. 아베스라의 교의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아오슈나르의 사유 속에서 베헤쉬트(Behesht)1)를 직조해가고 있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려 한다. 그는······

아베스라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가 본 것은 수행자가 다다르고자 하는 궁극의 세계, 그렇다면 그는 깨달은 자이다. 유한의 세계를 초극해버린 자는 굳이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인가? 남겨진 중생들은 그 위대한 여정의 흔적을 더듬으며 피안을 꿈꾸게 될 것인가?

아오슈나르가 중생들이 마주치는 삶의 변곡점마다 펼쳐놓는 의례를 통해서만 그들을 만나는 보통의 사제로 살았다면 번뇌의 무게는 훨씬 가벼웠을 것이고, 통증의 깊이는 얕았을 것이다. 그를 만난 속인들은 얇은 은혜와 값싼 위로만으로도 달착지근해지는 영혼을 느끼며 더없는 만족과 감사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명성은 커졌을 것이며 교단에서의 지위와 권력도 훨씬 높아져 있었을 것이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흐뭇하게 했을 것이며 더 얇고 부드러운 의복으로 몸을 감쌌을 것이다.

아베스라는 절벽수도원에서 만났던 수사 시몬이 아오슈나르를 가리켜 '괴짜'라고 했던 말이 괴팍한 성격을 이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괴짜인 것은, 그의 삶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이 있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선과 악 사이의 중립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 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면 최상이겠지만, 다에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악의 지대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대개 사유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과 천성이 맑고 깨끗하여 악에 오염될 여지가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좋은 선택을 하지요. 그러나 대중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조차 구별할 줄 모르며 곁에 조언자조차 없지요.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이 그 지점에 있습니다. 동행하면서 조언하는 자, 그게 접니다.

언젠가 아오슈나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 제 신학교 동기 중에 호다야르(Khodayar) 사제가 있습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지요. 그 친구는 교의를 그림으로 쉽게 풀어 대중이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겠다는 원을 세웠지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친구의 그림은 진리를 가리키는 아주 훌륭한 푯대가 됩니다. 저는 그런 재주가 없기도 하거니와, 땀 냄새를 섞어가며 뒹굴고 부딪치면서 길을 가리켜보자 하였던 거지요.

 

아오슈나르의 말을 떠올리면서 아베스라는 인간의 기원과 종말 사이의 간극에 대해 생각했다. 아오슈나르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단지 그 자신에 대한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후라 마즈다의 궁극적 투쟁에 참여하면서 우주적 결과로서의 선을 확립해가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다.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 것은 그것을 선택한 개인이 많다는 것을 뜻하며, 그 개인은 영원의 시간 앞에서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존재이고 종말의 시간은 갈림길에 서는 때이다.

 

······ 선과 악을 구별할 판단 근거를 갖지 못한 자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 문제는 간단치 않을 텐데요.

아베스라가 주저하며 물었다.

······ 돌이킬 수 있어야지요. 돌이켜 선의 길로 달려가야지요. 물론 그들 혼자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판단 근거를 갖지 못했을뿐더러 누구에게 그런 것을 전해 들을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책임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죠. 무지가 죄가 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있겠다고 나섰지만 쉽지 않습니다.

아오슈나르는 조심스러워했다.

······ 우리에겐 방법이 없을까요?

아베스라 역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바람을 타고 퍼져나갈 그런 이야기 말이죠. 누군가 초월의 순간을 보여준다면 그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질 겁니다. 때로는 사실보다 소문의 위력이 더 큰 법이니까요.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선망하고 동화가 됩니다. 이야기의 힘이지요.

아오슈나르는 어떤 확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밝아 보이는 법이다. 사막의 밤은 밤하늘을 가르며 흐르는 은하수와 은하의 폭포에서 흩뿌려진 별들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구름처럼 뭉쳐있는 별무리의 빛에 그 곁을 따라서 더욱 짙은 어둠 띠가 세로로 드리워져 있어 물결 아래의 음영처럼 보였다.

아베스라는 다시 케피예 위에 누우면서 얇게 저며 짠 양모 펠트를 바랑에서 꺼내 덮었다. 한밤중에는 서늘할 거라며 아오슈나르가 챙겨 준 것이었다.

 

아오슈나르의 말대로 에레츠는 터무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얼핏 보았을 때는 그냥 커다란 토괴나 지구라트 하나가 풍화되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청을 발랐던 흔적이 보이는 어깨높이의 기단부에 어느 정도 흙벽돌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대략적인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 한 변의 길이가 대략 100여 보쯤 되는 기단 위에 서너 걸음쯤 안으로 들여 쌓은 수직흙벽이 제법 높았을 것이다. 서북쪽 면의 중앙에 세 사람쯤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넓이의 계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맨 위층의 성전에서는 예루살렘 방향으로 추정했을 동남쪽을 향하여 기도와 의례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귀환파가 그곳의 성전기능을 복구한 후에 이곳의 쓸모가 다되었다고 여겼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방치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다수의 유대인이 제국의 영역에 남아 생활하고 신앙을 지키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버려져 있었다니 의외였다.

······ 시몬이 거길 도착해서 유구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폐사지 같은 모습을 보더니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합디다. 한시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지만, 한때 그들의 성소였던 곳인데 막상 흙무더기로 남은 것을 보니 유민의 고단한 삶과 마른 연못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그 흙무더기 위에 그림으로 겹쳐졌던 모양이오.

이곳에 오기 전에 아오슈나르가 해준 말과 허망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허의 고적함으로 인해, 아베스라의 심중 깊은 곳으로 시몬의 무력감이 느껴졌다.

아베스라는 피부병의 흔적처럼 군데군데 역청이 떨어져 나간 기단의 흙벽돌에 손바닥을 대었다. 처음 이곳을 건설하던 유대 유민들의 간절함조차 풍화되어가고 있는 성소의 피폐함에 세월의 무상이 전해졌다. 소멸은 필연이겠으나 그 과정은 참으로 쓸쓸하다. 그는 흙벽돌에서 손끝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몇 걸음 못가 모래 사면에 미끄러졌다. 허둥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으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다 기겁을 하였다. 기단 참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 앞에 반쯤 모래에 덮인 상태로 엎드려 있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아베스라는 경악했다. 유대 사제의 것으로 보이는 그의 흰색 튜닉은 햇볕에 누렇게 바래어 있었고, 바람에 헤진 모양으로는 죽은 지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얼굴은 모래에 묻힌 상태였으며 드러난 뒤통수의 긴 머리칼은 빠지면서 서로 얽혀 뭉쳐있기도 했다. 그것은 바람이 거칠게 불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휘돌아 두피에서 뜯길 듯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무심코 얼굴 주위의 모래를 파내려 했다. 그의 얼굴을 보려는 게 아니라 그걸 보고 있는 자신의 숨이 막힐 것 같아서였다. 아베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내뻗으려는 순간, 기단 위쪽에서 죽을힘을 다해 내지르는 가녀린 비명이 들려왔다.

- 소, 손대지 마라!

허물어져 형체를 잃은 기단 상부의 흙무더기 남서쪽 건너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베스라는 몸을 일으켜 소리 나는 곳을 보려고 손차양을 했다. 왜소한 노인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힘겹게 서서 팔을 내젓고 있었다.

 

노사제는 아베스라가 내어놓은 난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쉬지 않고 연거푸 석 장의 난을 뜯어 입속으로 밀어 넣는 그를 보며 불안해진 건 아베스라였다. 얼른 물주머니의 주둥이를 끌러 목기 사발에 따라 주었지만, 노사제는 난을 다 먹어 치운 뒤에야 사발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우헤헤, 곧 죽을 목숨이 음식을 탐하고 있네그려!

그는 밀기울 한 줌과 물 한 종지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며 식량 자루가 비기 전에 숨이 끊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계단 앞에 엎드려 죽은 사제를 가리켰다.

-운이 좋은 친굴세. 평생 그랬지. 늘 앞서서 갔지. 뒤따르는 사람이 늘 저 친구의 뒤치다꺼리를 했어. 그러더니 이곳에 와서도 먼저 가버렸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두 사제는 에레츠에 몸을 의탁하기로 작정하고 두어 달 치의 밀기울만 챙겨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저 친구는 제가 가져온 밀기울의 반의반도 못 먹고 떠났지. 결국 내가 그걸로 연명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사치스럽게 허기를 몰아냈다는 노사제는 허물어지고 있는 벽에 몸을 기대며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노사제는 이제는 이곳에서 죽을 거라며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왔다고 했다.

-나와 저 친구는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남아야 했지. 우리는 에즈라의 기준을 반대했거든. 그는 엄격한 순혈주의자였어. 나와 저 친구는 부계가 유대인이면 겨레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지. 과격한 순혈주의가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했어. 칼자루는 그들에게 있었고 칼날은 우리를 향해 있었다네. 배제와 배타는 우리 겨레의 핏속에 대대로 유전될 걸세.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 머리 둘 자리를 찾아온 것뿐이라네.

노사제는 모처럼 포식을 한 탓인지 몸이 나른해져 자꾸만 눈을 감았다가 가늘게 뜨기를 되풀이했다. 아베스라는 덜컥 겁이 났다. 기갈을 면한 노인이 갑자기 죽었다는 얘기는 초원의 승원에 있을 때부터 여러 차례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세요?

아베스라가 서둘러 묻자 노사제는 손을 내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흐으흘흘,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가? 아직 때가 아닐세. 우리 나이쯤 되면 육신을 떠날 때를 짐작할 수 있지. 머지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라네. 젊은이는 아르얀 같긴 한데 차림새가 남다르군.

노사제는 이제야 눈앞의 젊은이가 보인다는 투로 아베스라의 정체에 관심을 나타냈다.

-초원에서 온 수행자 아베스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아베스라는 자린의 절벽공동체와 토마스 수사에 대해, 그리고 야곱과 시몬을 만났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자 노사제는 상체를 조금 일으키며 탄식했다.

-좋은 사람들이지. 하지만 과격한 개혁주의자들이기도 하고. 에즈라나 느헤미야하고는 대척점에 섰던 사람들이야. 그래서 배제되었어. 아, 내가 젊은이의 교의에 대해 알고 싶긴 하지만 여력이 없네. 내 시간이 다 되어 가거든······

그는 숨을 고르기 위해 눈을 감고 침묵하였다. 검버섯이 주름 가득한 얼굴에 고루 피어있었으나 대체로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회한이나 비애 따위는 심연 깊은 곳에 감춰두었는지 겉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침묵이 그리 길진 않았다. 잠시 후에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입술을 오물거렸는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일상적인 어투가 아니라 예언서 두루마리의 글을 읽듯 낭송하고 있었다.

 

'허물어져 사라지고 있는 에레츠. 유대 디아스포라의 설렘과 회한이 녹아 있는 곳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사람의 일이란 게 그렇다. 누구든 한껏 부푼 욕망이 작동할 때는 영원을 잡을 것처럼 행동한다. 신의 뜻을 앞세우며 권세를 도모한 죄는 후손들에게 세세연년 유전되며 신의 길을 벗어나 아벨의 길로 들어서는 재앙이 될 것이다. 처음 에레츠를 건설하자고 핏발 선 눈으로 독려하던 이들은 시온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들의 귀환은 자신들의 성공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겐 지옥이 되었다. 그리고 에레츠는 시온이 아니었으므로 버려졌다.'

 

*

아베스라는 니루샤로 돌아오는 내내 신과 인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골몰했다. 신에게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에게 신은 어떤 존재인지 묻고 물어도 도무지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사램덜은 자꾸만 신을 규정하려 듭지. 그래서 한 분인 신을 얘기허는 디, 사램덜 머릿속 그림은 제각각인 게라. 깨달은 사램은 신을 규정하지 않고 그냥 신을 사는 게라! 신을 살아버리먼 신은 언어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떠오르는 겝지!

 

아베스라의 뒤통수에서 스승의 말이 경종처럼 울렸고, 순간 아오슈나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신의 길을 찾았구나. 그 길로 건너가기 전에 시시비비를 일거에 무너뜨릴 초월의 순간을 보여주려는 거야. 그렇게 이쪽에서 저쪽 하늘로 가려는 구나. 누구나 말하고 누구나 듣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려는 구나!'

아베스라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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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헤쉬트(Behesht) : 현대 이란어에서 천국을 의미, 아베스타어 바히쉬타(vahishta)에서 유래. 조로아스터교에서 선한 생각(Humata), 선한 말(Hukhta), 선한 행동(Huvarshta)을 실천하면 도달하는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사후에 가는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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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5.08.16 By관리자 Views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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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3

    Ⅱ-6 -워매 워매! 야가 왜 이런다냐. 야야, 바토야! 너 왜 그냐? 우샤가 낙타 바토에게 사료를 주러 갔다가 평소 보지 못하던 이상한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거저, 와 기렇게 호들갑이네? 바하락이 우샤의 높아진 목소리에 축사로 건너오며 핀잔을 ...
    Date2025.07.09 By관리자 Views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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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2

    * 아오슈나르가 문득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레일라를 생각하면서, 몇 해 전 제국의 서쪽 끝에서 만났던 떠돌이 헬라인에게서 들었던 디오티마(Diotima)에 관한 이야기가 겹쳐졌다. 서쪽 바다 건너 헬라의 만티네아(Mantinea) 지방에 디오티마라...
    Date2025.06.11 By관리자 Views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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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1

    흑암 속으로 잠겨버리고 싶었다. 모래를 반사하며 빛나는 작은 빛조차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얇은 꺼풀을 통과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어서 케피예로 눈을 둘러 머리 뒤에서 묶었다. 그러나 눈을 막는다고 망막을 통해 들어온 사실에 대...
    Date2025.05.14 By관리자 Views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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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20

    굴바하르가 돌아오고 열흘쯤 뒤였을 것이다. 행정관 카마란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읍내를 떠도는 유녀 십여 명을 니루샤에서 받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읍청으로서는 니루샤가 정기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정중하고도 간...
    Date2025.04.08 By관리자 Views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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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9

    *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아베스라는 동방의 성자 고타마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경구를 읊조렸다. -아오슈나르여! 거기서 도를 보았소이다 그...
    Date2025.03.14 By관리자 Views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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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8

    굴바하르는 충격이 좀 컸는지 며칠을 자신의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종일 우두 멍하니 누워 뚫린 천정의 빛우물을 쳐다보다, 우샤가 보리를 불려 끊여낸 죽을 들고 들어가면 겨우 일어나 바싹 구워진 난을 뜯어 그것을 떠먹었다. 다행히 그녀의 식욕은 여...
    Date2025.02.08 By관리자 Views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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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7

    얼마 후, 하란에서부터 함께 길을 걸었던 낙타 바토가 입술을 심하게 떨고 연거푸 침을 뱉어내더니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반 식경이 지나자 땅이 심하게 흔들리고 비히브(beehive, 원추형 흙집)의 벽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는 땅이 울더라고 ...
    Date2025.01.13 By관리자 Views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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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6

    5 밤새 잠들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아베스라는 이른 새벽녘에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둠은 곤한 몸을 일으켜 서쪽으로 물러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동구의 나무 아래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는 두 손을 마주 쥐어 단전에 얹고 호흡을 골...
    Date2024.12.08 By관리자 Views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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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15

    -하란에서 초주검이 되었다가 겨우 몸을 추스른 굴바하르가 또다시 매를 맞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제게 손을 내밀었죠. 아오슈나르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 때문이었나요? 왜 이난나 신전에서 또 그렇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
    Date2024.11.05 By관리자 Views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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