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판화를 만들어볼까요? — The Renee and Chaim Gross Foundation

Sue Cho, "The Cat and Money Tree", July 2025, Digital Painting
조카가 뉴욕에서 몇 해를 살다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며 키우던 Money Tree(머니 트리)를 내게 맡기고 갔다. 조카의 아파트에서는 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왔던지, 나무는 한쪽으로 기울어 자랐다. 길게 늘어진 가지는 오히려 운치를 더해 준다.
조카와의 추억 가운데에는 집 근처 The Renee and Chaim Gross Foundation(리니와 하임 그로스 재단)에서 열리던 크리스마스 카드 판화 워크숍도 있다. 함께 무엇을 새길지 고민하며 만든 카드를 지인들에게 보내는 일은 어느새 우리 둘만의 작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올해는 발렌타인 카드 워크숍 즈음에 조카가 근처로 출장을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찌감치 티켓을 예약했다. 하지만 출장이 취소되는 바람에, 대신 남편을 끌고 가게 되었다.
판화만들기

Sue Cho, "Families", 1981, Woodcut
워크숍은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2층 갤러리에서 열린다. Chaim Gross가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판화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전에는 마음에 드는 작품의 이미지를 따라했는데 이번에는 망치더라도 무언가를 베끼지 않고 나만의 창의적인 것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손녀딸이 한복을 다소곳이 입은 사진이 떠올라 그 모습을 그려 보았다.
찍으면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뀌어 나오고, 파낸 곳은 하얗게 나온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자신이 없어 아웃라인만 팠는데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세 장을 찍어 1, 2, 3번 번호를 매겨 보았다. 나름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우리 테이블에는 조카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앉아 있었다. 뉴욕의 겨울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맨홀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판에 새기고 있었는데 그 김을 하트 모양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재미있어, 조심스럽게 그 판화를 나도 찍어 봐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판화의 매력은 이렇게 나누는 데 있는 것 같다.
처음 해 본 사람의 작품이 의외로 멋질 때가 있다. 마지못해 따라온 남편의 첫 작품에는 해보기 전에는 몰랐던 손의 재능이 숨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카드종이와 봉투, 조각 칼과 잉크를 어디서 구입하는지도 친절히 알려준다. 생각보다 준비는 간단하다. 집에서 해보려고 재료를 주문해 두었지만, 쉽게 펼치고 판화를 만들게 되지 않았다.

어느 날, Chaim Gross 가 그랬듯이, 친구들과 집에 모여 함께 판화를 만들어 보았다. 처음이라 반신반의하며 시작했지만, 잉크를 묻혀 판화를 찍어내는 순간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작은 테라피처럼 느껴졌다. 한 친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백합꽃과 대추, 귤을 판화로 담아내며, 그 시간을 작품으로 남겼다.
The Renee and Chaim Gross Foundation
https://www.rcgrossfoundation.org/

뉴욕 Washington Square Park 근처, 526 LaGuardia Place에 위치한 이 재단은 조각가 Chaim Gross와 그의 아내 Renee 가 살던 집을 그대로 보존한 곳이다. 187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을 이 부부가 사서, 1963년에 작업실과 생활공간으로 함께 쓸 수 있게 고쳤다. 1991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때의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판화를 직접 만들어보는 일도 흥미롭지만, 조금 일찍 도착해 그의 작업실과 작품들, 그리고 평생에 걸쳐 Chaim Gross가 모은 방대한 컬렉션을 둘러보는 경험도 특별하다.
1층 작업실에 들어서면, 마치 Chaim Gross가 방금까지도 끌과 망치를 들고 나무를 다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나무 작품들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 좋아 오래 머물게 된다. 아내 Renee와 자신을 표현한 나무 조각상도 눈길을 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딸 Mimi Gross (미미 그로스)와 친지들이 그려준 그림들이 걸려 있어, 마치 그림으로 엮은 '패밀리 트리'를 따라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워크숍이 열리는 2층 갤러리를 지나 3층에 들어서면, Chaim Gross가 평생 세계 곳곳에서 모은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작은 음악회나 행사가 열릴 때면, 공간의 독특한 분위기가 한층 더 살아난다. 사실 내가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산책 중 우연히 건물 앞에서 Julian Kytasty의 공연 안내를 보게 되면서였다. 우크라이나 전통 악기인 반두라(Bandura) 연주를 바로 눈앞에서 접할 수 있었고, 모국을 떠올리며 'Lament(비가)'를 연주하던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3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살롱 콘서트를 계기로, 이곳에 행사가 있을 때 찾아와 연주를 듣고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하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Milton Avery(밀튼 에버리)가 그려준 Chaim Gross의 초상화와, 그의 제자였던 Louise Nevelson(루이즈 네벨슨)이 선물한 그림도 인상 깊다. 네벨슨이 자신의 초기 작품 상당수를 스스로 없앴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에게 남긴 이 작품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이 공간에 걸린 그림들은 단순히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기보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과의 소중한 인연과 우정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전시를 감상한다기보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듯한 따뜻하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쩌면 나 역시 집에 아버지의 붓글씨, 오빠의 사진 작품, 새언니의 민화, 그리고 언니의 붓글씨를 가까이 걸어두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예술성보다 그 안에 담긴 관계와 기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The Family

Chaim Gross, "The Family", 1979. Bronze, 7'6″ x 7'6″. Donated to the City of New York by Chaim Gross in 1991 in honor of Edward Koch, Mayor 1978-1989. Bleecker Street Park at 11th Street, New York City.
4월에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함께 판화로 카드를 만들어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손주들이 아직 어려 그런 여유를 갖기엔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 근처 West Village에 있는, Chaim Gross가 기증한 조각 작품을 보러 갔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브론즈 작품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며, 또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짠한 부모의 마음으로 이 조각을 마주한다. 부모가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기 위해, 위태로운 허공에서도 서로를 받쳐 주려 애쓰는 모습.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서 끝내 버텨내는 힘.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런 곡예와 같지 않을까? 흔들리면서도 균형을 잡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이 작품이 더 이상 위태로운 장면이 아니라, 그저 즐거운 곡예처럼 보이는 날이 올까?
PS. Chaim Gross(1902-1991)

Joseph Hirsh, "Portrait of Chaim Goss at work", 1968. Oil on canvas.
Chaim Gross는 끌(chisel)과 나무망치(mallet)를 사용해 재료를 직접 깎아내는 '직접 조각(direct carving)' 기법을 주로 구사한 조각가였다. 그는 돌과 청동으로도 작업했지만, 이곳에 전시된 목조 조각들은 그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들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미국 전역의 주요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특히 워싱턴 D.C.의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에는 그의 조각 작품 27점이 포함된 의미 있는 컬렉션이 자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