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버린스(Labyrinth)를 걸어볼까요?
"Stand at the crossroads and look; ask for the ancient paths, ask where the good way is and walk in i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 Jeremiah 6:16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 예레미야 6:16
Sue Cho, "Labyrinth 1" 2025, Digital Painting
나의 상상 속 정원에는 언제나 래버린스가 자리하고 있다. 래버린스라는 단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처음 접한 것 같다. 크레타섬의 왕 미노스(Minos)의 명으로, 발명가 다이달로스(Daedalus)가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를 가둘 래버린스를 만들었다. 매년 젊은이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었는데 영웅 테세우스(Theseus)가 용감하게 래버린스로 들어가 괴물을 무찌르고, 공주 아리아드네(Ariadne) 실타래의 도움으로 실을 따라 미궁을 빠져나온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래버린스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비로운 상징으로 수 세기 동안 묵상과 영적 충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고 한다. 래버린스가 나에게 의미 있는 리튜얼로 자리 잡은 것은 샌프란시스코, Nob Hill 꼭대기에 있는 그레이스 성당(Grace Cathedral)에서 처음 래버린스 워크를 경험하고 나서이다. 성당 안에 있는 레버린스는, 굳이 길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내딛다 보면 구불구불 돌아, 어느덧 중심에 도달하게 된다. 쉽게 중심에 가까이 갈 듯하다가 멀어지고, 또 가장 멀리 있다고 생각할 때 중심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면서 위로가 되었다. "빨리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또 희망을 버리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라"라는 메시지를 그 당시 받았던 것 같다. 중심에 서서 기도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그 길로 걸어 나왔다.
Maze(미로)는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하고, 헤매다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하고, 빠져나오려고 애쓰지만, Labyrinth(미궁)는 그 길 자체가 안내자이고 천천히 따라 걸으면서 호흡이 깊어지고 긴장되었던 몸이 이완된다.
그 후론 래버린스가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 여행할 때 근처에 래버린스가 있나 찾아보곤 한다. 성당, 교회, 학교, 공원 등 생각보다 쉽게 래버린스를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집 가까이 커뮤니티 가든 옆 공터에도 시멘트 바닥에 파랗게 페인트칠한 래버린스를 발견하고 걷곤 한다. 맨해튼에서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준 래버린스를 세 군데 소개한다.
Meditation Garden, "Garden of Renewal" by Lily Kwong, Madison Square Park(4/22-9/1/2025)
오가는 길에 자주 들리는 매디슨 스퀘어 파크에 릴리 퀑이 디자인한 명상 가든이 이번 시즌에 새로이 설치되었는데 래버린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나선형으로 구불구불 돌면서 주변에 피어 있는 빨간 비 밤(Bee Balm) 등 들꽃을 즐기면서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편편한 바위가 보여 아무 생각 없이 철퍼덕 앉았다. 이렇게 쉬기 좋은 자리가 어찌 비어 있을까 했더니, 뜻밖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바위 벤치에 앉으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는 초대장입니다. 부디 친절하세요."
다행히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가갔더니, 신기한 얼굴로 Picher Plant(벌레잡이통풀)를 가리키면서 속 안에 벌레가 갇혀 있는 것을 보라고 한다. 곤충을 먹는 식물을 전에도 식물원에서 본 적은 있었다. 나선의 중심으로 갈수록 희귀하거나 멸종위기에 있는 자생식물을 심어, 환경보호와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우려는 깊은 의도도 있었다.
이 명상 가든에서 하는 메디테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먼저 심호흡을 하면서 걷다가 멈추고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시선을 마주하고 심호흡을 한다. 걸으면서 반복한다. 다행히 나는 선글라스를 꼈지만, 사람들은 무지 어색해한다. 그다음엔 명상 가든을 돌면서, 눈에 띄는 것들, 나무, 꽃, 나비, 벌, 돌 … 과 시선을 고정하고 심호흡을 해보라고 한다. 놀랍게도 이렇게 집중해서 쳐다보는 동안 그들도 사람들처럼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다. 사람들과 하는 것보다 훨씬 덜 어색했다. 바위 벤치에 있는 메시지가 톡톡히 한몫한 것 같다. "fellow human"뿐 아니라 모든 존재까지 친절함이 확장된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이 명상 가든이 영구적으로 설치되었으면 한다.
Labyrinth at Marble Collegiate Church, 1 West 29th Street
K- town에서도 가까운, 마블 컬리지에트 교회 지하층에도 래버린스 룸이 있다. 13세기의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 바닥에 있는 래버린스와 같은 디자인으로 대리석에 새겨졌다. 보통 때는 의자를 놓고 모임의 장소로 쓰이다, 매주 수요일 오후 5시부터 6 시, 매달 첫째 일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래버린스 워크를 위해 열려 있다고 한다.
https://www.marblechurch.org/labyrinth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위의 모양을 다운로드해서 프린트하여 그 길을 따라서 손으로도 트레이스해볼 수 있다. 전에 성당 기념품 샵에서 금속으로 만든 손 래버린스를 샀었다. 끝이 뾰족한 작은 막대기를 왼손으로 잡고 트레이스해 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서랍 속 깊숙이에 있다. 역시 걸으면서 몸으로 드리는 기도가 좋다. "메이즈는 그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데, 래버린스는 자신을 찾게 된다"라고 안내문에 쓰여 있는 글이 공감이 간다.
지난 사순절 기간 매주 수요일 저녁에 래버린스 룸이 열려 이곳에서 레버린스 워크를 해보았다. 야외에서의 래버린스 워크가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걷는다면, 교회 안에서는 엄숙한 분위기 때문인지 좀 더 경건하게 기도에 집중하게 된다. 여럿이 함께 걷다 보니 오가는 길에 마주치게 되고 상대방 또는 내가 눈치껏 옆으로 길을 비켜준다. 감사의 눈짓을 교환하기도 한다. 여럿이 함께 걸으니 커뮤니티의 유대감도 생긴다.
The Labyrinth for Contemplation @The Battery Park
이 글을 쓰면서 배터리 파크에도 래버린스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4월부터 11월까지 개방되는 이곳은 9/11 추모 일주기를 맞이하여 2002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이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한데, 새와 나비가 레이스처럼 새겨진 게이트만큼은 눈에 띄었다.
야외의 래버린스는 동틀 때나, 해 질 무렵에 걸으면 멋있을 것 같은데 게이트가 열려 있는 시간이 제한되었다. 저녁 서늘할 무렵 갔다가 문을 닫아 아침 녘에 다시 갔었다. 마침,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퀘이커 교도들이 가끔 그룹으로 와서 래버린스 워크를 하던지, 개인적으로 추모 모임을 하러 오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 대부분 한적하다고 한다.
주변엔 래즈베리, 블루베리, 구스베리를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래즈베리가 빨갛게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오는 사람도 없으니 원하면 래즈베리를 따가라고 했다. 날도 덥고 또 왠지 보기 좋게 남겨 두어야 할 것 같아서 8알을 따가지고 나왔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많은 여행객이 Castle Clinton에 표를 사러 줄을 선다. 잠시 벗어나 지척에 있는 래버린스를 걷고, 알록달록한 벤치에 쉬어가면, 뉴욕의 북새통에도 견딜 수 있는 정한 기운을 받고 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