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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혜의 뉴욕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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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띄우는 연하장 - 까치, 소나무, 해

posted Jan 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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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띄우는 연하장

까치, 소나무, 해

 

 

뉴욕스토리-Untitled_Artwork.jpg

Sue Cho, "The Watcher", 2025, Dec., Digital Painting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신영복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 글이 프린트된 조그마한 헝겊 보자기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이제 정말 2026년의 새날이 다가오고 있다.

 

팥을 불렸다. 팥의 붉은 양의 기운이 음귀를 쫓는다는 유래에서 동짓날 팥죽을 먹는다고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저 예전에 한국에서 하던 일들이 그리워진다. 팥을 몇 시간 물에 담갔다가 펄펄 끓여 첫물은 해롭다며 버려야 하는데,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진액까지 아깝게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인스턴트 팟에 넣어 한 시간 삶았다. 새알옹심이 대신 떡볶이 떡을 쪄서 작게 잘라 곁들였다. 엉터리 약식이다.

 

팥빵, 단팥죽, 팥 아이스크림까지 팥을 좋아하지만, 점점 당화혈색소가 올라 이제는 담백한 팥죽으로 만족한다.

 

두 번째로는 남편과 내 내복을 새로 장만하려 한다. "연말에 새 내복을 입고 자면 복이 들어온다"는 내담자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나 전통은 이제 한국에서는 사라지고, 오히려 연변이나 이민자의 뉴욕 아파트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아마도 나 혼자만의 이런 조그만 루틴으로,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고향 생각을 조용히 달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뉴욕스토리-Untitled_Artwork.jpeg

Sue Cho, "Standing through the seasons", 2025, Dec, Digital Painting

 

 

고향의 설날을 떠올리면 까치와 소나무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동요 때문일까? 예전 한국에 살 때는 지금처럼 까치를 흔하게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야 새와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새벽 일찍 잠이 깨 신정산 둘레길을 걷다가 까치를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까맣고 하얀 몸에 청록빛으로 반짝이는 깃털이 눈에 띄었다.

 

옛 친구의 집 마당에 있던 50년 넘은 소나무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서울의 풍토가 잘 맞았는지 나무 껍질의 문양, 휘어진 가지, 바람에 스치는 솔잎 향까지 모두 운치가 있었다. 함께 올랐던 서울 인왕산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도 북한산을 바라보며 고요히 서 있던 한 그루의 소나무가 여전히 눈에 선하다.

 

크리스마스에 친구가 나누어 준 조그만 솔방울 향초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더니, 그 은은한 향기 속에서 한국의 늠름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오늘, 팬데믹 이후 계속되던 온라인 운동 클래스가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되었다. 강사는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 이 선생님이 왔을 때는 훈련소 교관처럼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수업 시작 15분 전부터 끝난 뒤 30분까지 줌을 열어 두고 사람들의 질문을 받는 모습에서 차츰 마음을 열어갔다. 누군가는 유용한 정보를 나누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며, 또 누군가는 그날의 인용구를 가져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는 작은 공동체가 되었다. 이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내어준 여유로운 시간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이제 나는 삶에서 무엇을 더할지 보다, 무엇을 덜어낼지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위한 여유, 가족과 친구를 위한 여유, 그리고 이웃들을 위한 여유가 조금 더 남아 있으면 좋겠다.

 

뉴욕스토리-ART_20251230-160620.jpg

Sue Cho, "Grace over Water", 2025, Dec., Digital Painting

 

 

새해 인사로 새언니가 보내준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 시는 발도르프 학교 저학년(1~4학년) 아이들이 매일 아침 수업 시작 전 낭송하는 시라고 한다.

 

해에서 뿜어지는 사랑의 빛이

나의 하루를 밝혀 줍니다.

나의 혼, 나의 영이

나의 몸 끝까지 힘을 전해줍니다.

 

맑게 빛나는 햇빛 속에서

하느님 당신을 우러러봅니다. 

당신이 나의 혼에

자비롭게 심어준 사랑의 힘으로

나는 온 힘을 다해

일하고 또 배우려 합니다.

 

당신에게서 빛과 힘이 나오며

당신에게로 사랑과 감사가 흘러갑니다.

 

-루돌프 슈타이너

 

저의 글과 Sue Cho의 그림을 함께 나누는 독자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고, 사랑의 빛 속에서 감사함을 느끼며, 경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홍영혜_프로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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