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d4d7d5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7 - 마르크스 동상 곁에서

posted Jun 28, 2019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Karl_Marx_-_Moscow_-_panoramio_resize.jpg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7 : 마르크스 동상 곁에서
 

 

난생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일행보다 늦게 출발한 이유로 유서 깊은 도시를 둘러볼 시간은 네댓 시간밖에 없었다. 공항 근처 호텔에 짐을 풀고 곧장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성 바질 성당과 크레믈린 등 위대한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활한 광장, 거기는 각양각색의 평화로운 모습을 띤 여행객과 시민들로 가득했다. 한 세기 전 세계 인민들의 영혼을 뛰게 한 사회주의 혁명이 여기서 펼쳐졌단 말인가! 어느덧 분주해진 나의 발길은 볼쇼이 극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다. 맘은 길 건너편 마르크스 동상을 향한 것이다.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시간은 그에게 빼앗겼던 고통스럽게 맑은 영혼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은 수리 중이었고, 선생은 펜스에 갇혀 있었다.

삼십 대 후반을 지나던 어느 날,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을 그려보다가 그들의 사진을 하나로 엮어본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하면 목록에 추가될 이가 없지 않으나 여전히 이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사용하며 내 사상의 지도가 어떠했는지를 되돌아보곤 한다. 사진 속의 인물 가운데 시작점이 되는 맨 왼편 위에 있는 인물은 여전히 구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검색되는 바로 그 사상가이다. 내 청춘의 시작은 그의 목소리가 영혼에 울리면서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를 닮은 세계에 대한 회의가 나를 밀고 가다가 나중에는 화이트헤드로 이끌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영향은 나를 물들였다.

 

 

인문의 종교 이미지 김희헌목사의 스승들.jpeg

김희헌 목사의 스승들

 


두 사상의 결합을 보다 진지하게 관심하게 된 것은 보다 최근의 일이다. 그것은 지난 한 세대 동안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폐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진보주의가 어쩌면 사상적 유미주의에 더 관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면서부터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만 개의 진보사상이 한 개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기지 못했다는 회의가 인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접두사를 가진 제 사상이 저마다의 취향을 긍정하는 동안 실상은 공동체적 실험을 동력화 할 수 있는 실사구시의 대안사상을 구축하고 연대를 실천하는 감각은 도리어 후퇴하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말이다. 그럴 때 떠오른 것은 마르크스와 화이트헤드가 엮여 만들어진 튼튼한 사상의 밧줄이었다.

얼마 전 읽은 「유기체적 마르크시즘」 (Organic Marxism: An Alternative To Capitalism and Ecological Catastrophe, 2014)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화이트헤드의 생태주의 사상과 결합시켜 실질적인 정치실험을 기획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사유체계 위에서 다시 마르크스의 해방 전략을 작동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당위성에 입각한 정치철학적 논의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사회정책의 입안과정과 유리되었던 일종의 사상편력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먼저 ‘왜 마르크시즘인가’(‘Why Marxism?)를 다시 물으면서 자본주의 시대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사상으로서 마르크시즘의 가능성을 재점검한다. 그 다음에는 21세기에 작동 가능한 마르크시즘을 위한 재구성의 방식을 ‘from modern to postmodern Marxism’이라는 주제로 논의한다. 그 결과물이 ‘유기체적 마르크시즘’(organic Marxism)이다.

인류의 삶은 불평등과 파괴로 귀결되어버리는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위기를 자본주의 자체의 해결 방식으로는 해소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가장 빈번하게 소환되고 있다. 그렇다고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하여 형성된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거기가 산업문명과는 다른 감수성을 지닌 생태적 마르크시즘이 모색되는 지점이다. 결정론적 역사관과 유토피아적인 낙관주의를 극복하고, 사회경제적 분석과 함께 예술, 문학, 종교 등의 창조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인간만이 아닌 모든 지구 생명체에 대한 생태학적 의식을 갖춘 해방사상이 도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질서로부터 몸을 빼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술과 미신으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인류의 길은 이전의 사회체제와 비교해보면 보다 혼성적인 제도실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제약적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양산했던 자본주의 제도를 극복하는 한편, 기존의 사회주의가 시도했던 국가주도의 산업 육성이나 모든 사적 소유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다 유연하게 공동의 관심사를 구현해가는 문명 말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질서를 구성하는 지식의 뿌리인 근시안적 편의주의를 이겨낼 정신의 승리는 과연 가능할까? 배부르면 나태해지는 동물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희망은 있다. 야만적인 삶에서 생겨나는 슬픔과 수치를 이겨낼 인간의 긍지는 반드시 올라올 것이다.

 

 

김희헌목사-프로필이미지.gif

 


  1.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7 - 마르크스 동상 곁에서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7 : 마르크스 동상 곁에서 난생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일행보다 늦게 출발한 이유로 유서 깊은 도시를 둘러볼 시간은 네댓 시간밖에 없었다. 공항 근처 호텔에 짐을 풀고 곧장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성 바질 성당과 ...
    Date2019.06.28 Views300
    Read More
  2.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6 -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출처:불교방송BTN 유투브 영상캡쳐)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6 :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지난 5월 12일 경북 영천의 한 사찰에서 보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태도로 인해 종교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 황 씨는 당 대표 ...
    Date2019.05.28 Views281
    Read More
  3.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5 - 이웃종교에 대하여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5 : 이웃종교에 대하여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지며 길거리에 연등이 걸리고 있다. 이즈음에는 오래 전 부목사로 일하던 수유동 지역 한 교회에서 겪은 경험이 껄끄럽게 떠오른다.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화계사에서는 해...
    Date2019.04.28 Views239
    Read More
  4.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4 - 계시의 하부구조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4 : 계시의 하부구조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 땅의 봄은 아프게 다가온다. 해마다 봄은 제주의 4월을 찾더니 피 흘린 진실을 차츰 드러냈다. 그러는 동안, 억울한 죽음을 향한 정부의 사과가 있었고, 금년에는 ...
    Date2019.03.28 Views297
    Read More
  5.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3 - 두 이야기의 합류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3 : 두 이야기의 합류 삼일운동 백주년을 맞아 기품 있는 옛 정신을 잇고자 하는 열망이 크다. 특히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가운데 절반을 차지한 개신교 진영은 과거의 정신적 지도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심...
    Date2019.02.27 Views298
    Read More
  6.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2 - 범재신론(Panentheism)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2 : 범재신론 (Panentheism) 종교가 인간의 활동이라면 결국 그 진정한 힘은 사유의 능력에 있다. 종교의 흥망성쇠는 그 세계관에 좌우된다는 말이다. 19세기 후반 서구 문명이 무신론으로 물들어간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
    Date2019.01.28 Views421
    Read More
  7.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1 - 진리와 조화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1 - 진리와 조화 앙리 베르그송의 말대로 만일 세계가 ‘창조적 전진’을 하는 살아있는 세계라면, 이 변화무쌍한 세계에 대한 진리인식은 개방적 사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근대과학이 오해했던 것처럼 단지 운...
    Date2018.12.29 Views234
    Read More
  8.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0 - 평화를 향한 철학적 모험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0 - 평화를 향한 철학적 모험 새로운 사상이 기존의 사유체계를 실제로 대체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간혹 나타난 천재는 자기 시대를 외롭게 보내곤 한다.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1861~1947)가 그 중 한 명이...
    Date2018.11.28 Views209
    Read More
  9.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9 - 생태문명과 신

    인문(人紋)의 종교,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9 생태문명과 신 지난 10월 11일 서울시가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다. ‘문명전환과 도시의 실험’이라는 주제를 가진 대회의 첫 강사는 93세의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 교수였다. 그...
    Date2018.10.29 Views221
    Read More
  10. 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8 - 근본주의 망령

    인문(人紋)의 종교-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근본주의 망령 해마다 9월이면 개신교 교단들의 총회가 열린다. 안타깝게도 진취적 정신보다 퇴행적 정책을 도입하는 곳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지난 한 세대를 지나오는 동안 한국교회가 더...
    Date2018.09.25 Views184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