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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의 아트 카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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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카메오 20 - <경주>와 <군산> 장률 감독의 허무주의 미학

posted Oct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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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20. <경주>와 <군산> - 장률 감독의 허무주의 미학

 

 

저예산 작가주의의 대표적인 감독인 홍상수가 시니컬리즘, 김기덕이 데카당티즘이라면 장률은 니힐리즘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주>(2013)와 <군산>(2018)의 주인공들이 공허하게 공간을 떠돌고 늘 죽음 또는 자살이라는 현실에 맞닿아 있지만 그래도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힘이 영화의 배경에 단단히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허무주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롯되는 파열음이며, 텅 빈 삶에 욕망이라는 동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발버둥이다. 또한 그의 허무주의가 삶에 대한 되새김질이 되는 이유는 적절한 환각적 트릭을 겸비한 사회적 리얼리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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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남녀 주인공은 20세기 중국 화가 봉자개가 그린 문인화에 무려 3분 동안 주목을 한다. 그 사이에 그림에 쓰인 시구를 중국어로 한 번, 남자주인공 최현(박해일 분)이 우리말로 두 번, 여자주인공 공윤희(신민아 분)가 화장실에서 혼잣말로 한 번, 이렇게 네 번을 반듯하게 되뇐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人散後)

초승달이 뜨고(一鈎新月)

하늘은 물처럼 맑다(天如水)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이 모두 자리를 뜬 후에 갑작스레 밀려드는 쓸쓸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는 청아한 시구이다.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글귀지만 이 그림을 여주인공 공윤희의 남편이 자살하기 바로 전에 집의 거실에 정성스레 걸어놓은 것임을 알게 되면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이생을 떠난 후라도 하늘의 달은 다시 차오르기 시작할 터이니 맑은 하늘처럼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런 유언과도 같은 뜻이 된다.

영화에서 봉자개라고 불리는 펑쯔카이(Feng Zikai, 1898-1975)는 만화가이기도 하며, 수필가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로 2013년부터 시진핑 중국 정부가 그의 그림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의 꿈’(中国梦)의 포스터에 사용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작가이다. 봉자개는 “사람이 흩어진 후에…”라는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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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에는 무수한 자살이 나온다. 북경대학교 교수인 주인공 최현은 선배의 문상을 위해 한국에 온다. 자살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는 고승처럼 죽었다는 선배의 죽음 이야기가 처음부터 영화를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의 템포는 최현의 엉뚱한 말과 행동, 그리고 장률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곧 길에서 최현과 우연히 두 번 마주친 모녀가 경주의 보문호에 투신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이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다시 여주인공 공윤희의 남편도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한다. 오토바이 두 대를 나누어 탄 경주의 폭주족 세 명은 어처구니없게 최현의 눈앞에서 사고로 죽는다.

이 죽음을 지켜본 최현은 물은 없지만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는 돌다리를 건너 모녀가 투신자살한 보문호로 간다. 삶을 초탈한 듯 꿈속에서 헤매는 듯 경주에서 하룻밤을 지낸 최현은 그렇게 허망하게 호수에 몸을 던진 것일까? 물론 영화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막을 내린다. 단지 숲을 지나서 물이 있는 곳으로 나가는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로 남겨졌을 뿐이다.

장률 감독 영화에는 유사한 장면이 서로 다른 영화에 교차하여 등장한다. 촛불을 켜놓고 입으로 불어서 끄려 하기, 점집 가서 점보기, 길거리에서 어설픈 무술(태극권) 품새 하기, 등등. 그중 하나가 바로 숲을 지나 물가로 나아가기이다. 이 장면은 영화 <군산>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박해일, 문소리, 정진영, 박소담 등 꽤 쟁쟁한 출연진을 갖추었다. 군산에서 민박집을 하는 정진영은 아마추어 사진가다. 여전히 흑백 필름을 사용하는 그는 민박집 여기저기에 자신의 작품을 걸어 놓았다. 박해일과 문소리가 그 민박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들의 시선을 끈 사진 하나가 있다. 멀리 덩그러니 떠 있는 섬 하나를 담은 사진이다. 군산 앞바다의 47개 섬 군락인 고군산군도에 포함된 하나의 섬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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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 듯 기억인 듯 이 섬의 모습이 여러 차례 영화에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이지만 영화 속 시간적 흐름으로는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장면에 박해일과 박소담은 함께 그 섬을 간다. 그리고 대나무 숲을 지나 물가로 나아가는 박소담의 모습이 부각된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박소담은 거기서 사고를 당한다. 하지만 그 사고가 ‘어떤’ 사고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박해일이 그녀를 구했다는 말만 나올 뿐이다. 그렇게 숲을 지나 물가로 나아가는 모습이 <경주>의 마지막 장면과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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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도 죽음이 스토리를 끌고 간다. 박해일이 오랜만에 만난 학교 선배인 이혼녀 문소리와 뜬금없이 군산을 함께 가는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을 찾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끔찍스럽게도 철도에 가로로 누워서 자살을 한 것으로 나온다. 군산에서 유별난 생활을 이어가는 정진영 부녀에게도 쓰라린 기억이 있다. 아내는 남편과 다툼 끝에 갑자기 차에서 내려 트럭에 치여 사고사를 당한다. 그 상황을 딸이 모두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내의 죽음이 그들의 삶 밑바닥에 깔려 있다.

장률 스타일의 유머 감각과 자잘한 에피소드의 연속, 주인공들의 엉뚱한 행동이나 말, 그리고 꿈인지 환각인지 모를 괴이한 스폿이 얽혀서 영화는 리듬감 있게 흘러가지만 죽음이 환영이 늘 장률 감독의 영화를 지배한다. 그 가운데 생명력이 소진하고 욕망을 잃어버린 듯한 인물들이 흐느적거린다. <춘몽>이나 최근에 개봉된 <후쿠오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2007년 영화 <중경>만이 허무주의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갈 뿐 대부분의 영화는 늘 허무주의라는 거울을 통해 삶을 반추하도록 만드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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