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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카메오 13 - <타이타닉> ‘디테일’이란 이런 것이다

posted Mar 03, 2020

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13. <타이타닉> ‘디테일’이란 이런 것이다


워낙 인상적인 장면이나 볼거리가 많아서 영화 <타이타닉>에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등장한 것을 기억에 남긴 사람이 흔치 않을 것이다. 그것도 그냥 슬쩍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이 집중해서 그 그림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도 그러하다. 어쩌면 영화의 키포인트 역할을 하는 잭 도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그린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누드화 스케치 정도를 기억에 남겨 놓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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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처음 개봉관에서 봤을 때는 사실 좀 짜증이 났다.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 기존의 재난 영화와 달리 남녀의 애정을 지나치게 스토리의 중심 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기대한 ‘재난’에서 자꾸 벗어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짙고 미묘한 로맨스 영화로 보아도 될 성 싶다. 그렇게 봤을 때 도슨과 로즈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그림’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살하려는 로즈를 구해준 인연으로 도슨은 다시 로즈를 만나지만 둘 사이에 겉돌며 불퉁거리는 대화로 인해 인연이 끝나가려는 즈음, 도슨이 소중하게 손에 쥐고 있는 그림 스케치북을 로즈가 채가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로즈는 스케치에 담긴 도슨의 그림에 한껏 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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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급작스런 반전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영화의 초반부, 사람들이 배에 올라타고 자신들의 계급에 맞는 선실 자리를 잡아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화면에 잡힌다. 피카소, 모네, 드가 그리고 세잔. 타이타닉 침몰 사건이 일어난 1912년 당시에 이미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인상파와 현대미술의 가교 역할을 하는 세잔, 그리고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피카소의 큐비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때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로즈와 그녀의 약혼자인 칼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사가 두 사람의 관계를 단번에 각인시켜준다.
 

칼 : 그 쓰레기 같은 작품은 완전 돈 낭비야.
로즈 : (큐비즘 인물화를 보며) 아니예요. 이 작품들은 환상적이에요. 마치 꿈과 같죠. 여기엔 논리는 없지만 진실이 있어요. 화가 이름이…… 피 카 소.
칼 : 그는 결코 뜨지 못할 거야. 날 믿어. 싼 게 비지떡이지.

 

이 대사를 따라가자면 그림을 선택하고 수집한 사람은 로즈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돈은 칼이 대었겠지만 말이다. 로즈의 피카소 이해가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환상적, 꿈, 논리 없는 진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이 모든 가치 판단의 전부인 칼과 미술작품에 담겨진 내용을 바라보는 로즈의 완전히 상반되는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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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작품들은 처음에 잠깐 등장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로즈의 방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 그림들은 눈에 띄게 카메라에 잡힌다. 드가의 춤추는 무희는 로즈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모네의 수련은 도슨의 손길에 따라 그 미묘한 색감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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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차분히 그림을 바라보면 짐짓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작품들은 어느 화가의 작품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들이지만 그 어느 작품도 현재 남아 있는 작품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습작이거나 또는 같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한 눈에 보더라도 피카소의 수많은 습작 중 하나임을 알게 되지만 다른 작품들도 모두 현재 남아 있는 작품들과는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들은 모두 북대서양 차가움 물속에 수장되었다고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 중에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언급이나 관심을 끌지 않지만 꾸준히 화면에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세잔의 <양파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Onions)>이 그것이다. 세잔은 이 정물화를 같은 구도로 여러 개 남겼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은 그 어느 작품과도 동일하지 않다. 지금 남아 있는 세잔의 작품들과 거의 같지만 조금이라도 다르게 그려서 영화에 등장시키는 그 세심함은 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역할이었는지 아니면 어느 소품 담당자나 미술 감독의 역할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디테일’이란 이런 것임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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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세잔의 <양파가 있는 정물>이 좌우가 바뀌어서 등장하는 것이다. 함께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결코 두 화면 중 하나가 거울에 비친 모습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작품만이 좌우가 반전이 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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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양파가 있는 정물>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짚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로즈와 그녀의 약혼자 칼의 대립되는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한 첫 번째 장면에 사용하였는가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5년 전인 1907년에 제작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은 큐비즘의 첫 번째 작품이요 현대 미술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아직 이 새로운 사조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칼이 이 작품을 싸구려라고 말하는 것도 굳이 미술에 대한 몰이해라고만 치부할 수가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여기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등장시킨 것은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때문이 아니라 ‘아비뇽’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아비뇽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마도로스 상대의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며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녀들이다. 도슨의 스케치북 그림 중 로즈를 매료시킨 작품도 역시 창녀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로즈 자신도 그 창녀의 포즈와 동일하게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여기서 창녀는 어떤 사회적 신분이나 계층 또는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로즈가 자살을 생각할 만큼 그토록 숨막혀하는 상류층 문화에 대한 반발, 즉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피카소의 그림 역시 어떤 감정적인 상태를 제거한 비정(非情)을 그림으로써 표현하면서도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은 극도의 해방감을 추출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로즈는 20세기 초 유럽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귀족주의와 미국의 팽창하는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가식과 위선과 물질만능의 세계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자신만의 삶을 오래 오래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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