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역할과 정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약 80일, 이재명 정부에 대한 여러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최근 개헌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1987년 9차 개정 후 38년간 바뀌지 않은 헌법이었으니, 꽤 반가운 소식이다. 지난 8월 24일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두 번이나 폐기했던 법안인 노란봉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반가운 소식은 또 하나 있다. 비동의 강간죄,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을 강조한 원민경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명되며, '여성가족부 폐지' 구호를 내세웠던 이전 정부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반갑지 않은 소식도 있다. 이재명 정부는 '기후에너지부'를 신설하며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적인 의지를 밝혔지만, 실제로 지난 13일 밝힌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내용은 여전히 경제와 산업 '성장' 중심이었다. 여기에 더해, 광복절특별사면에 기득권과 불공정, 불평등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조국 전 장관이 포함되었던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지난 대통령 한 명이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민주주의를 위협한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일까? 전반적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 잘하는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여기서 묻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좋은 대통령을, 좋은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양당 정치의 40년
자그마치 40년이다. 파란색 아니면 빨간색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아온 반복된 역사 말이다. 이 시간 동안 시민들은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음 정권으로 교체하는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더욱이 최근 10년은 기대와 실망 수준을 넘어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마저 버거웠다. 지금의 민주주의도 시민들이 나서서 지켜온 것이지, 오히려 정치는 뒤따라가거나 혹은 후퇴하기 일쑤였다. 좋은 정치는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살아있어야 하지만, 사실 한국의 정치는 정반대였다. 민주주의뿐 아니라 한국의 정당정치가 후퇴한 것 자체가 한국 정치사의 큰 위기였다. 거대 양당만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며 작동할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 새롭고 다양한 정당이 출현하고 정치 개혁이 이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양한 목소리와 요구가 국회 안에서 경합하며 변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풍성하게 작동하지만, 양당 독점의 정치가 지속되며 양극화된 사회와 함께 시민들의 삶은 더욱 불평등해졌다.
이런 정치를 마주하며, 우리는 광장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끌어내리며 민주주의의 훼손을 막아냈다.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는 줄 알았으나, 낡은 것이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은 채로 새 하루를 살아간다. 역사 속 앞서간 이들이 어렵게 민주주의 역사를 일구어냈지만, 다시 이토록 수준 낮은 정치를 경험하며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일이 생긴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통령제에 대한 여론의 변화
한국 시민들에게 대통령이란 '내 손으로 뽑은 지도자'라는 심리가 강하다. 그러나 내 손으로 뽑은 지도자를 다시 내 손으로 끌어내려야 하는 이 괴리 속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정치적 현실은 늘 기대와 실망을 반복한다. 주권자인 시민들이 매번 '좋은 정치인'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좋은 사회가 갑자기 도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더이상 대통령 한 명에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대통령 한 명에 온 시민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대통령제'의 한계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가 아닐까?
사실 이미 개헌 논의와 더불어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말하며 개헌의 필요성과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혁신을 말해온 이들이 많다. 특히 이번 내란 사건을 지나며, 민주주의가 다시는 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대통령제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정치체제가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졌다. 2025년 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개헌 추진 방향과 관련하여 49%가 '4년 중임 대통령제'를, 17%는 '의원내각제'를, 14%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했다. 다수 여론이 현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1) 물론 <대통령제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말하듯, 근본적인 제도개혁 없는 '4년 중임 대통령제'가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할 위험성도 있다. 그렇기에 권력구조 개편은 단순한 임기 조정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포괄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 책에서 말하는 대안으로서 '의회제(의원내각제)'는, 완벽한 제도는 아닐지라도 대통령제보다는 민주주의를 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미 좋은 정치가 작동되는 국가의 대다수가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의회제로의 변화를 상상하며
우리에게 더이상 한 명의 영웅적 지도자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평등한 참여와 소통을 이끌어내는 민주적 리더십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대통령제의 종언> 저자는 한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의존하는 대통령제보다, 제도화된 협력과 견제의 균형을 갖춘 의회제가 더 적합한 통치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의회제가 대통령제의 여러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길은 멀고 지난할 것이다. 특히 한국은 대통령제에 대한 애착이 강한 만큼 의회제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헌 논의가 시작된 지금, 더 늦지 않게 의회제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어야 한다. 정당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동시에, 성숙한 의회정치를 통해 대통령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견제와 연계도 필수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정치 체제를 시도해볼 수 있을까?
새로운 헌법은 민주주의를 회복한 시민들의 염원과 다양한 목소리가 담긴 '새로운 사회'를 위한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다양성이 사라진 정치 토양을 갈아엎고, 대통령제가 아닌 의회제로 정치 개혁이 된 사회를 상상해 본다. 완벽한 제도는 없지만, 좋은 제도는 적극적으로 시도하며 새로운 정치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한 때다. 새로운 정치 체제를 상상하며, 새롭게 펼쳐질 사회도 함께 상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