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녹색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진보정당에서 당직자로 일했고 앞으로도 진보정치 할 거라 말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어려운 길 가네."
맞다. 어려운 길. 진보정당에서 정치하는 것은 어렵다. 흔히 내부에서는 자조 섞인 말로 '3無 정당'이라 말하곤 했다. 사람, 돈, 권력의지도 없다는 말이다. 없는 것 빼고, 있는 것도 많은 정당이다. 생태평화, 탈핵과 기후정의, 퀴어와 페미니즘, 반정당의 정당, 추첨제 민주주의 등.
녹색당은 2012년 후쿠시마 핵사고를 계기로 조직된 세력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녹색정치를 표방하는 독자적인 정당으로 출발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시작된 진보정당 역사에서 녹색당의 출발선만 달랐다. 당시에는 같은 진보정당으로 불리길 거부했다 들었으나 어느 순간 녹색당 또한 진보정당으로 명명되고, 연대하고, 연합하기 시작했다.
늘 굴곡이었다던 진보정치 역사는 책으로 처음 접했다. 집회 후 뒤풀이 자리에서 '운동권 선배'들을 통해 듣기도 했다. 사회운동부터 진보정당 역사까지, 녹색당에서 경험한 '작은 도토리 하나가 만드는 떡갈나무 혁명1)', 그 정치의 역사와는 사뭇 달랐다. 바닥에서 거칠게 구르고 싸우다가 또다시 같은 붉은 깃발 아래 단결하여 모이는 경험 같았다. 무엇이 그렇게 치열하고 절박했을까. 수십 년 역사 속에서 분열과 부침을 겪으며 여전히 진보정치에 확신을 갖고 활동하는 이들의 신념은 따라갈 수가 없다. 한편으론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기도 하다. 내 10년의 진보정당 경험은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오늘의 진보정당은 어떤가? 40년 가까이 거대 보수 양당이 번갈아 정권교체를 해오며 기득권을 나눠 먹는 동안, 진보정당의 입지는 사분오열했다. 양당의 권력다툼 사이에 일어난 국정 농단과 내란 정국을 마주하며 대통령 두 명을 끌어내린 것은 보통의 시민들이었다. 그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먹인 이들은 운동단체나 진보정당 깃발 아래로 삼삼오오 모였다. 보통의 시민들을 대변하고 사회를 조금 더 다양하고 평등하게 만들며, 민주주의를 지켜온 데는 진보의 힘이 컸다. 그러나 두 번의 광장을 지나며, 진보를 선택하는 시민들은 점점 적어졌다. 광장 속 여성, 청년, 장애인, 농민, 소수자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진보 없이 우리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양당 정치처럼 부와 가난도 양극화된 사회에서, 우리네 삶은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던 2002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당시 대통령 후보의 질문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듯하다.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진보정당의 현재는 녹록지 않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으며 진보정당 사상 처음으로 원내 진입에 성공한 후, 선거제도의 한계와 거대 양당 중심의 의회 정치 속에서도 노동, 여성, 소수자 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써왔다. 그러나 여러 갈등 속에서 2020년 총선에서 정의당이 얻은 의석은 6석. 노동당과 진보당2), 녹색당의 득표율은 더 하락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보정당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진단들이 쏟아져나왔다.
"현장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지역 기반이 약화됐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진보적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 진보정당이 소홀히 했던 민생 현장과 다시 결합해야 한다." 등. 이 평가는 원외 정당인 녹색당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노동당과 녹색당, 정의당과 사회운동단체가 함께 연합하여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했던 권영국 후보는 0.98%의 득표율을 받았다. 2025년이 된 지금, 진보정치의 현재와 미래는 아직도 4년 전 그 진단에 멈춰 있는지도 모른다.
더 가난하고 더 낮아진, 더 밀려나고 더 약해진 진보정당에 사람들은 묻는다. "희망이 있냐"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어떤 이들이 진보정치의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며 떠나는 동안, 또 어떤 이들은 남아서 곁의 사람들을 달래면서도 스스로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무수한 고민을 오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지금뿐인가? 예수를 기다리고 기다려도 다시 오지 않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각자 예수의 정신이 되어 2천 년 동안 서로를 위로하고 연결해왔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 여성과 소수자, 노동자, 농민, 어린이와 비인간 동물까지 말이다. 쉽게 낙관하지도, 쉽게 확신하지도 않는 이들이 되어 경계를 넘나들며 묵묵히 희망을 놓지 않고 걸어온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정치를 하는 것은 다분히 기독교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끈질기게 희망을 품는다. 왜냐면 우리는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희망은 존재한다'라는 듯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확실성'으로 변하기 쉽다." <낙관하지 않는 희망>, 테리 이글턴
여전히 진보정당의 현재는 난망(難望: 바라기 어려움)하고, 미래는 낙망(落望: 희망을 잃음)하기 쉽다. 그러나 쉬이 낙관하는 것이 아닐 뿐, 누군가는 끈질기게 희망하고 있다. "여성, 노동, 성소수자, 청년 의제가 사라진 선거에 대한 비판을 넘어 '다시 만들 세계'에 대한 토론을 살려낼 진보 목소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던 전 민주노동당(현 정의당) 권영국 대선 후보의 말처럼, 진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목소리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지금처럼 극우, 보수, 중도보수의 자리로 채워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진보가 필요하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할까? 이제 진보정치의 미래를 이야기하려면 '현장 중심, 세대교체, 의제 차별성'이라는 세 개의 진단을 넘어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해본다.
첫째, 더이상 조직화가 되지 않는 시대,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진보정당의 정치조직화도 어려워졌다. 이전과 같은 방식의 조직화가 가능한가? 어떤 조직화가 새롭게 필요한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민도 달리해야 한다.
둘째, 정당이란 정치결사체는 여전히 유효한가? 꼭 정당이어야만 하나? 정당을 경유하지 않는 진보정치란 무엇인지, 정당 소속감이 주는 정치적 효능에 대해 증명해내야 할 과제가 있다.
셋째, 연합정치는 누구와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민주대연합'으로 매몰되지 않고 우리는 독자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앞으로도 이 과제는 우리를 사분오열하게 만들 수도, 더 단단하고 넓게 만들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진보정치에서 정치적 리더에 대한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대교체가 가능한 조건을 함께 만들고 있는가? 단순히 '세대교체'가 아닌, 새로운 리더를 만들 조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너무 근본적인 질문인 것 같겠으나 현재 진보정치 상황이 그렇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비판은 어쩌면 진보정치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부터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진보정치를 떠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아있기를 선택한 이들로서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차별과 불평등이 더욱 만연하는 지금, 그래서 당장 진보정치의 미래가 밝은지는 차치하고 미래 자체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앞설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정치를 지지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 실패하는 것들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 위에 낙관하지 않는 단단한 희망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을 때, 바람과 같이 진보정치의 시간이 올 것이다. 그 바람 안에 오랫동안 뿌린 희망의 씨앗이 준비된 땅에 심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사막화된 정치적 토양을 다시 갈아엎는 심정으로, 누군가는 텃밭을 일구며 씨앗을 뿌려야 한다. 변덕이 심한 한국 정치라는 계절과 불평등한 토양 조건이 매번 "아직도 희망이 있냐"고 묻겠지만, 2천 년도 더 기다린 사람들이 있다. 이때 맺는 정치적 열매들은 작을지라도 배고프고 아픈 이들을 먹일 것이며, 모두가 먹고도 연결될 만큼 모두를 살리는 정치적 토양을 만들어낼 것이다. 어려운 길, 진보정치 하는 것은 곧 기독교 정신의 길과도 맞닿아 있다. 이 긴 여정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희망으로 동행하기를 바란다.
(*이 글은 필자가 지난 5월 '고난함께' 계간지에 기고했던 글을 각색하여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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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녹색당 강령 중 일부
2) 2023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과의 연합을 시작으로 '진보정당' 여부를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지금은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