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
-댈러웨이 부인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영화 <디 아워스>를 보는 일은 무척 곤혹스러웠습니다. 갈수록 머리 쓸 일 전혀 없는 가벼운 영화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유난히 이 영화가 관객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생략된 부분에 대해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피곤함을 선사하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여성의 삶에 대해 가혹하리만치 미세한 날을 세우고 잘게 도려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차 없이 목도하는 일이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1941년을 살아가는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1951년을 살아가는 브라운 부인, 그리고 2001년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며 잡지 편집장으로 살아가는 클래리사.
그녀들이 현실과 가족이 주는 평화와 안온함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번민하고 보이지 않는 불안과 신경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먹고살기 편해서 부리는 정신적 사치이거나, 원래부터 갖고 있던 정신병리학적 징후로 간단히 치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두고 그녀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꿰어 입고 그것에 갇혀 몸부림을 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그녀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주어진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해 규정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탈출구 없는 삶을 살며 신경증에 시달리는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새로 쓰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 때문에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그녀는 정신과에서 치료받아야 할 만큼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지요. 하루 종일 소설 생각에 빠져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에 몸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온통 소설 속 세계에 빠져 있으니 눈앞에 현실 속 사람들이 들어올 리 없지요. 그것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약간 달뜬 미열 정도지만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그 광기를.
그래서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으며 무척이나 원리원칙에 충실한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활기찬 런던을 떠나 답답한 시골에 그녀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며 하인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처지, 답답한 시골 생활, 숨 막히는 남편의 성격 등. 어디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스스로 이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아버리는 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가정주부'라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은 로라 브라운
그 후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평범한 중산층 가정주부인 브라운 부인이 버지니아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게 됩니다. 그녀의 가정은 객관적으로 보면 평화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아내와 가정에 너무나 헌신적인 남편, 투명한 유리알 같은 총명한 아이, 그리고 둘째 아이 임신. 그런데도 왠지 그녀는 늘 불안해 보입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 또한 행복감보다는 부담과 죄책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에 이끌려 결혼했고, 타의에 의해 규정지어진 '가정주부'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원했던 삶이 아닙니다. 그러니 늘 분장을 지우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을 수밖에요.
2001년을 살아가는 잡지 편집장 클래리스는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립니다. 물론 본래 성(姓)은 그게 아닙니다. 전 남편 리처드가 붙여준 성이지요. 하지만 전남편의 성씨도 '댈러웨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전처에게 '댈러웨이'라는 성을 붙여준 것일까요.

전 남편에게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린 클래리사
이 영화에서는 많은 숨은 이야기가 압축되고 생략됐습니다만, 저의 빈곤한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조합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리처드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늘 즐겨 읽었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어떤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어머니는 알지 못할 미열과 불안에 들떠 언제든 자신을 떠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곤 결국 어머니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가 훗날 성소수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잠시 부부로 살았던 클래리사에게 그는 '댈러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헤어진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기 옆에서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바로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녀에게 투사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클래리사(=댈러웨이 부인 =어머니) 앞에서 자살함으로써 평생의 복수를 한 셈입니다.
그런 리처드에 대해 클래리사는 애증의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평생 떠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는 미묘한 관계. 그것은 클래리사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그녀는 시끌벅적한 파티를 통해 해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삶일까요?
리처드가 죽고 난 후 그의 늙은 어머니(브라운 부인)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출이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었다고 말합니다.
네, 그렇겠지요. 세상 모든 사람이 브라운 부인의 평화롭고 안정된 완벽한 가정과, 버지니아 울프의 작가로서의 성공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본인이 그것을 자신의 숙명에 반(反)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지요. 세상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그 기준은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할 테니까요.
이 제목이 세월(The Hours)인 것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또 다른 제목을 붙여도 좋다고 한다면 저는 '댈러웨이 부인'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들의 삶을 공통으로 규정하고 있는 일종의 '아이콘'과 같은 것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