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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정선영의 영화로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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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 - 지구인의 상식에서 벗어나기

posted Sep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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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텍트>(Arrival, 2016)

 

감독 : 드니 빌뇌브

주연 : 에이미 아담스, 제레미 레너

 

 

몇 해 전, 친구의 소개로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다. 몇 개의 단편과 중편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첫 번째 단편의 두 페이지를 읽고, 단박에 나는 작가 테드 창의 열혈 팬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알았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은 독창성이 부족한 창작자들의 변명이란 것을. 세상엔 여전히 우리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창작물들이 있다. 그것도 매우 독창적인!

 

그중, 표제작인 중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매우 독특한 '시제'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서 일종의 반전으로 활용된다. 한 문장 안에 현재형, 과거형, 미래형 시제들이 뒤섞여 있어서 초반에는 읽으면서도 조금 헛갈린다. 하지만 좀 더 읽다 보면, 이 독특한 서술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녀의 아이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씨줄이라면, 날줄을 이루는 것은 외계인과의 대화 시도에 관한 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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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비행물체를 보며 지구인들은 으레 외계인들이

 

'침공'하러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마치 길쭉한 조개처럼 생긴 외계 비행물체들이 세계 각지의 상공에 출몰한다. 지구인들은 으레 그들이 지구를 침공하기 위해 왔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공격적인 행동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 루이스의 직업은 언어학 교수. 그녀는 외계인의 언어를 해독해, 그들이 어떤 목적을 띄고 지구에 왔는지 알아내는 임무를 정부로부터 부여받고 비행물체 안으로 들어가 외계인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마치 거대한 문어처럼 생긴(사실 영화에서 구현한 이 생명체는 어이없을 정도로 문어와 흡사하게 만들어서 실소가 나왔다) 외계 생명체들은 유리창에 먹물 같은 것을 그려서 지구인들에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흡사 둥그런 상형문자처럼 생겼다. 루이스는 이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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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생명체들은 독특한 그림을 그려서 지구인들에게

 

뭔가 알려주려고 애를 쓴다.

 

 

영화 <컨택트>는 원작 소설과 조금 다른 노선을 취한다. SF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의 기대에 호응하기 위해서일까, 장르의 관습을 살짝 따른다. 외계인들이 지구에 '침공'을 하러 온 건지도 모른다는 가장 익숙한 기본 전제를 설정하고 전 세계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외계인들과 최첨단 무기로 우주 전쟁을 벌이는 본격 액션 우주 어드벤처 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쯤에서 관람을 멈추는 게 나을 것이다. 이후로는 외계인과의 소통 문제에 집중하니까.

 

원작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오로지 외계인과의 소통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간과 전혀 다른 사고와 언어, 관습 체계를 갖고 있는 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 주인공은 지구인으로서의 모든 고정관념과 관습 따위를 버려야 한다. 여기에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며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는 고정관념을 일거에 깨트려버린다. 외계인이 지구에 온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개념을 지구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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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 생명체와 소통하기 위해

 

지구인의 언어를 이용해 다가간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원작 소설에서 루이스의 1인칭으로 서술되는 문장이 이해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딸에게 말하는 그녀의 이 언술 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 테드 창은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언어학을 공부하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문자인 '어의문자(語義文子, Semagram)'라는 것까지 만들어낸다! 활자로 된 소설로 접했을 때는 그 형태가 뚜렷하게 와 닿지 않던 이 개념이 영화로 시각화되자 비로소 확연하게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언어학과 물리학에 대한 공부가 잘 되어있거나 최소한 관심이 있는 독자나 관객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잘 모른다 해도 상관없다. 당신이 지구인으로서의 관습과 상식, 고정관념을 버리고 볼 자세가 되어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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