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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정선영의 영화로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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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 신랄하고 웃픈 블랙코미디

posted May 14, 2025

어느 호화 크루즈에 다양한 사람들이 탑승을 한다. 남아도는 것이 돈과 시간인 부자들과, 무기 사업자, 협찬을 받고 무료로 승선한 모델 커플 등. 이 배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간다면 드라마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지면서 배가 전복되고 겨우 8명의 승객이 무인도에 당도하게 된다. 크루즈 항해가 이 영화의 1부에 해당한다면 언제 구조가 될지 과연 구조가 되기나 할지 막막한 가운데 무인도에서 이들 사이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2부에 해당한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한마디로, 젠더, 계급, 권력 문제 등에 관한 신랄한 블랙코미디이다. 대놓고 신랄해서 굳이 어려운 미학적, 사회학적 용어들을 들먹여가며 해석할 여지가 많지는 않다.

 

영화의 도입부, 모델들이 표정 연습을 할 때 소위 명품 광고 모델을 할 때는 소비자를 도도하게 내려다보는 표정을 짓고, 저가 의류 모델을 할 때는 친근하게 웃는 표정을 연습하는 장면부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그 안에서 작동하는 계급성.

둘 다 모델인 연인 사이에서도 갑을 관계가 작동하고 그 가운데 고정화된 성 역할을 둘러싼 갈등이 드러나는 장면은 애교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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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작동한다.

 

 

이 작품의 주제가 가장 극명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장에서 펼쳐지는 호화 크루즈 안에서 일어나는 일. 어마어마한 부자들만 타는 그 유람선은 철저한 계급사회의 축소판이다.

 

유람선 종업원들을 말 한마디로 해고할 수 있는 부자 손님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온갖 수발을 다 드느라 늘 무릎에 멍이 들어있는 종업원들. 그 종업원들보다 더 아래층에서 근무하며 각종 허드렛일을 해내는 노동자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설국열차>의 코미디 버전을 보는 것 같다.

 

감독은 이 부자들의 천박한 행태를 꼬집기 위해 대놓고 화면 가득 구토로 발라버린다. 평소 값비싼 보석과 옷들로 치장하고 한껏 교양과 우아함을 과시하는 그들이 토사물로 범벅이 된 채 쓸려 다니는 이 기괴한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다 배가 난파되고 간신히 살아남은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리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 계급의 전복이 일어나는 모습은 유쾌하게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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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계급의 전복이 일어난다.

 

 

제 손으로 변변히 할 줄 아는 일이 없는 부자들에게, 물고기를 직접 잡아 와서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한 유람선 청소부는 그 섬에서는 자신이 '캡틴'이라고 하며 자신의 명령에 따를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당장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부자들의 모습에서 이 영화의 블랙코미디는 절정에 달한다.

 

아직 이 영화를 안 본 사람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쓸 순 없지만, 엔딩 장면에서 청소부가 과연 어떤 액션을 취할지 직접 보여주지 않고 관객의 상상에 맡긴 채 끝낸 것은 감독의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어쩌면 태어나 처음 주어졌을지도 모를 그 작은 권력마저 다시 빼앗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그 청소부가 취하려고 하는 행동이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현실에서도 늘 발견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작으면 작을수록 그것을 최대한으로 휘두르려고 하니까. 서글픈 인간 본성의 초상이다.

 

정선영 프로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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