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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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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28 - 연대는 가능한가?

posted May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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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8 : 연대는 가능한가? 

 

 

강남역 사거리 철탑에 올라 일 년 가까이 투쟁을 이어온 김용희 님이 지난 금요일에 내려왔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거대자본에 의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 아니 상상을 넘는 재벌의 악행을 당한 그는 존재 자체가 메시지였다. 반 평밖에 되지 않은 철탑 위에서 일 년간의 삶이라니! 그 긴 자발적 고행은 종교적 경건을 무색하게 만드는 세속의 수행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환으로 가득 찬 그의 시련에 가담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향린교회가 그를 찾아 나선 건 그가 철탑에 오른 지 사십여 일이 된 때였다. 이미 시작된 단식은 오십일이나 되었는데, 그는 진료거부에 물까지 끊었다고 했다. 당시 그가 발표한 <인간 새>라는 글에는 절망과 회한이 일렁이고 있었다. “삼성의 알을 깨고 나온 인간 새 / 폭염과 장마 속에서 /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50일을 기다렸지만 / 어미 새는 끝내 날 버리고 말았네. / 날개 없는 새가 어디 나뿐이랴 / 날개를 달고도 날지 못하는 인간 새가 넘쳐나는 세상인데 / 날개 없는 인간 새가 자유를 찾아 하늘을 날을 수 있음을 / 날 버린 어미 새 앞에서 보여주고 싶다.” 

상황이 절박했다. 서둘러 강남역 8번 출구 앞에 모인 향린 교우들은 <욥기>를 낭독하고 노래를 번갈아 부르며 그를 지지하고 격려했다. 2주가량 진행된 매일 저녁기도회는 주일예배로 이어졌다. 향린 공동체에 속한 4개 교회는 주일날 교회 문을 닫고 강남역에 모여 함께 예배드렸다. 보기 드문 이 행동에 언론이 주목했고, 당사자인 김용희 님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는데, 향린교회가 매일 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고, 오늘 예배 모습을 보면서 끝까지 살기로 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얼마 되지 않아 <개신교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연대가 확대되면서 강남역 8번 출구는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곳으로 변해갔다. 

김용희 님을 향한 수많은 연대는 단지 해고노동자에 대한 연민으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연대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을 깊이 하게 된 계기는 투쟁이 해를 넘겨 길어진 시간만큼 사연 또한 많아질 때였다. 삼성은 늘 제한된 범위에서 협상에 응했고, 협상 결과는 투쟁당사자들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결국, 대책위원회의 주축세력이 교체되었고, 강남역 투쟁의 또 한 당사자인 이재용 님은 낙향을 택했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모두 심경이 복잡해졌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연대는 가능한가? 

이 물음은 더 큰 투쟁을 위한 전략적 질문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관한 종교적 질문이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지어졌길래 실망과 낙심 속에서도 연대를 다시 고려하는 걸까? 그것은 마음이 오고 가는 인간관계의 교차로에 나르시시즘과 에고이즘이 공공연히 출몰하지만, 고통당한 신을 증언하는 복음의 연대든, 고통당한 인간을 향하도록 이끄는 사회적 연대든, 그것들보다는 더 순결한 마음이 등장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는 그것을 오래전에 겪었다.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자선(charity)으로서의 신앙은 정신의 비굴을 낳고, 에고이즘의 거래(trade)에 관심하는 신앙은 익숙해질수록 영혼의 몰락을 체험한다. 그런 정신실험을 이미 거친 인류의 연대활동에서 자선의 감정과 거래의 관심이 주도적일 리 없다. 귀족적 잉여감정의 충동에 따른 중세적 나르시시즘도 상인적 야망의 계산에 따른 근대적 에고이즘도 더는 인간관계를 지휘하는 주도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당위성이 해체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포스트모던의 연대는 언제까지 가능할까? 담론과 사건의 상품성에 민감한 깨알 같은 지성은 존재와 역사와 신과 같은 큰 물음(거대담론)의 해체를 시도한다. 대신 자기주장의 알리바이로 왜소화되어가는 탈-진리(post-truth) 시대의 해체적 해방은 각자가 원하는 모든 방향으로 길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어디든 만족스러운 곳이 되기 어려워졌다. 다행스럽게도 존재의 무게에 이끌리는 영혼이 남아서 고통과 수난의 연대는 이어질 것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투쟁은 일단락되었지만,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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