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에스테의 언덕길>
스가 아쓰코 저
뮤진트리, 2024
날이 덥고 습하다. 이제 정말 진정한 여름이구나 실감이 난다. 이번엔 무슨 책에 대해서 쓸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한증막 같은 더위에는 머리에도 마음에도 부담이 좀 덜한 책을 골라보자 싶었다. 자연스럽게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가 떠올랐다.
스가 아쓰코라는 이름이 어쩌면 낯설 수도 있겠다. 1929년 일본 효고에서 태어난 그녀는 1958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갔다가 1960년 밀라노에서 친구들과 코르시아 서점을 운영하던 페피노 리카를 만나 결혼을 한 후 밀라노에 정착하게 된다. 1967년 남편이 갑자기 죽고 나서 3년 후 일본에 다시 돌아온 그녀는 대학 강의와 번역 등 활발한 활동을 했고 1985년부터는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하여 다수의 에세이집을 펴낸 수필가이자 번역가이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을 십여 년의 이탈리아 생활에 대해, 함께 한 동료와 친구, 가족에 대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문체로 묘사한, 서정적인 글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도 송태욱의 번역으로 <밀라노, 안개의 풍경>,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 <유르스나르의 구두> 등 그녀의 작품이 다수 출간된 바 있다. 이 책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은 남편이 죽고 난 후 남편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한 추억, 그리고 이탈리아의 작가인 움베르토 사바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 인생은 대체 뭘까. 쓸쓸한 루이지는 걸으며 생각한다. 아홉 살에 부모를 여의고, 그때부터는 마을 술집 일을 도와주며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 철도 직원이 되어 술집의 여덟 번째 딸과 결혼하고 아이들이 차례로 태어나자 이제야 드디어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잡고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마리오가 죽고 브루나가 죽었다.
공터를 빠져나가 제과 공장 조금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면 시영전차의 정류장 앞에 늘 가는 술집이 있다. 우선 싼 '레드와인' 한 잔, 소금에 절인 멸치 하나를 집으면 그것을 안주로, 밤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갈 터였다."(p126)
시아버지 루이지는 철도원이었다. 아내와 자식에게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고 가정에 관심도 별로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아들 셋 딸 하나, 자식을 넷 두었는데 그중 두 명을 병으로 잃고 평생을 근근이 살다가 자신도 일찍 죽는다. 그런 그도 어쩐 일인지 동네 인근의 창부들에게는 신뢰가 두터워서 그녀들이 일하며 모은 돈을 맡아주는 역할을 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스가 아쓰코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상 속에 그려보는 시아버지의 심정을 읽다 보니, 어렵고 불행한 시대에 살았던 가장의 모습 - 내 인생은 대체 뭘까 하며 퇴근 후 싼 술과 안주로 시름을 달래는 모습 - 은 어쩜 이렇게 어느 나라나 비슷한 모습인 걸까 싶은 마음에 괜스레 아스라해진다.
남편이 죽고 나서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이어진다. 자식 셋을 차례대로 황망히 잃은 것에 넋이 나간 시어머니. 그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제멋대로 살던 생활에서 벗어나 이탈리아 북부 산간에서 만난 실바나와 결혼하는 시동생 알도. 실바나의 친정 식구들. 그 북부 산간에서의 생활. 스키를 타는 것이 일상인 그곳. 알도와 실바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카를로. 손자가 태어나고 채 2년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 그 아이 카를로가 어느덧 자라 입대를 하는 이야기까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이제 세상에 없을 때의 추억들. 살던 철도원 관사와 그곳의 채소밭. 남편 페피노의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지 않음에도 책 곳곳에 그의 그림자가 옅은 배경으로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엔 가난하고 불행한 이탈리아의 어느 가정에 불쑥 들어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머물렀던 자신이 어느새 서서히 그들에게 스며들어가는 모습도 겹쳐진다.
"비가 거세졌다. 페피노가 자신의 우산을 토니에게 씌워주자 그는 됐어, 하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손에 든 카네이션 다발을 받침대 위에 내던지고 우리가 깜짝 놀랄 틈도 없이 근처 건물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작별 인사도 없이 두 손으로 양복의 옷깃 언저리를 단단히 쥐고. 남편과 함께 길을 걸었던 것도, 토니를 본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p87)
생활이 빠듯한 계급의 남자들은 우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그래서 소나기라도 만나면 윗옷의 앞섶을 손으로 잡고 달린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는, 지능이 좀 낮은 문제아 토니와 인텔리인 남편이 겹쳐지는 지점을 이렇게 묘사한다. 굳이 가난과 계급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 느낌이 전해지는 대목.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가 좋은 건, 다가온 상황에 대해 설명하듯 노골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쓰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읽는 사람이 조금씩 젖어들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그 아릿한 느낌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정도로.
이 책은 이탈리아의 대문호이자 시인인 움베르토 사바가 사랑한 트리에스테에 홀로 방문하여 거리 곳곳과 움베르토 사바 서점(지금은 두 세계의 서점)을 들르는 얘기에서 시작하여 생전에 가끔 교류했던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집 주변에 찾아가 같이 보냈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으로 끝난다.
"이튿날 아침, 만을 크게 돌며 베네치아로 향하는 열차의 창을 통해 바다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트리에스테를 바라보며 나는 이탈리아에 속하면서도 계속 이국을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의 모습에, 밀라노에서 살던 무렵 너무나도 굳건한 문화에 견딜 수 없어지면 리나테 공항의 북새통으로 이국의 소리를 찾아가곤 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아마 트리에스테의 언덕 위에서는 오늘도 눈에 지중해의 파랑을 담고 있는 '두 세계의 서점 주인'인 나의 사바가 자신이 애용하던 파이프를 느긋하게 피우고 있을 터였다."(p35)
"문득 추위에 얼어붙을 듯한 카라바조의 손 너머로 4월, 결국 마지막 방문이 되었을 때 커피를 끓여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지치고 가냘픈 손을 본 것 같았다. 주방 장갑을 대체한 검은색 스웨터의 소매 안에서 늙은 그녀의 손은 어쩔 도리 없이 떨려 살짝 엎질러진 커피가 받침 접시로 천천히 넘치고 있었다."(p253)
멀고 먼 낯선 타국에서, 살아온 환경도 언어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과 가족으로 친구로 함께 살며 모국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어 '내 안의 일본어가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리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살았던 스가 아쓰코가 당시에 마음으로 한없이 의지했던 이탈리아 작가들의 자취와 추억을 찾아가는 모습은 왠지 애잔하면서도 다정하다. 숱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 이방인의 외로움과 경계인의 주저함을 느끼며 살았을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그녀에겐 그래도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으로 남았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된다.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는 작가의 감정 밑바닥을 여지없이 보이며 공감해줄 것을 강요하는 듯한 에세이들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없다.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향수를 자극한다거나 자아도취에 빠지는 일 없이 과거를 차분히 회상하면서도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덕분에 마치 잘된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특히나 그녀의 글에서 보이는 부드러우면서도 바탕이 견고한 문체는 읽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이 더운 여름, 잠시 쉬어가는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본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 위안이 더해질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