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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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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2 - 바닥에서 비롯된 정신

posted Feb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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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바닥에서 비롯된 정신

복음서(누가 8:26-31)를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라는 동네에서 한 미치광이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무덤에서 홀로 산다. 사람들은 사나운 그를 쇠사슬로 묶어두기도 했다. 이 미치광이는 그것을 부수고 무덤과 산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대고 제 몸에 상처를 내며 살았다. 비참한 밑바닥 인생이었다.

예수님이 그의 ‘맑지 못한 정신’(unclean spirit)을 고치려고 하자,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들이 간청한다. 자신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귀신들은 지옥을 ‘아비소스’(abyss) 즉, ‘바닥이 없는 곳’으로 이해했다. 대신 그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바닥도 없는 삶보다는 차라리 돼지 떼 속에서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이겠다. 귀신의 처지도 이해할만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바닥없는 심연(深淵)의 아비소스는 그야말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지옥.jpg

 


아무튼 거라사의 미치광이는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고, 수많은 귀신이 그 삶에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미치광이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바닥 인생은 귀신이 들러붙은 고달픈 삶이요, 귀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밑바닥 인생이 바닥없는 지옥보다는 차라리 나은 곳이라 하겠다. 예수는 거라사 지역 밑바닥에서 온갖 귀신이 들러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간절한 만남이 그 사회의 밑바닥에서 이뤄진 것이다. 대체로 신을 만나는 체험은 바닥에서 생긴다. 성경이 증언하는 신은 하늘을 노니는 천상의 지배자가 아니라 땅바닥으로 화육한 신이며, 바로 이 사실로부터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준거점이 생긴다.

기독교 사상사에 수많은 교설들이 등장했다 사라졌는데, 맥없이 사라진 것들의 공통점은 신을 저 세상에 거주하는 초월적 존재라고 강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고고한 신에 관한 환상이 있고, 그 환상에는 복종을 미덕으로 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결부되어 있다. 고고한 신은 바닥을 떠난 신이요, 따라서 밑바닥 인생은 그 신을 결코 만날 수 없다.

이런 사고의 구도에서는, 신을 만날 수 없는 밑바닥 인생이란 불경한 삶으로 해석되며, 그 밑바닥 인생에 신을 매개해주는 브로커들이 신을 대신하는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만일 신이 밑바닥을 떠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에 대한 증언이요, 결국 이 세계에서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바닥이 중요하다. 발이 제 노릇을 하려면 발바닥이 있어야 하고, 손이 제 역할을 하도록 모으고 잡아주는 곳이 손바닥이다. 정치철이 돌아오면,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고상한 인사들이 밑바닥 민심을 훑어보려고 애를 쓴다. 왜 그런가? 바닥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바닥은 우매한 곳이라기보다는 진리를 품은 곳이다. 책을 이해하려면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뜻을 찾아내야 한다.
바닥의 힘과 진실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성서는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바벨탑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실상은 그것을 떠받치는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근원적인 사실에 대해서 어둡다. ‘흩어지지 않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창11:4)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실존을 지배한 상태이다. 두려움은 이웃을 잠정적인 적으로 대하게 하며,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탐욕으로 변질시킨다. 바벨탑을 지어가는 사회의 밑바닥에 귀신이 많은 것은 그들 자신이 귀신이 되기 때문이다.

 

 

바벨탑.jpg

 


이성의 눈으로 보면 바닥은 고통이다. 그러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지혜는 믿음에서 비롯되며, 그 바닥에 우뚝 서도록 힘을 주는 것도 믿음이다. 믿음은 바닥에서 신을 만나고, 바닥을 딛고 서도록 요청하는 존재도 신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믿음의 사람은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 주는 시련을.

바닥에는 그곳을 두터운 사랑의 공간으로 변모시키려는 모든 성실성을 불구로 만드는 귀신이 우글거린다. 귀신은 바벨탑을 지어 바닥을 떠나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바닥에서 신을 만난 믿음의 사람은 안다.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을 모두 밀어버릴 때, 그곳은 한 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지옥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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