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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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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5

posted Jan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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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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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이름은 아레주예요.

여자는 서쪽 하늘에 아직 남아있는 우주의 그늘을 바라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발자국 하나를 내딛는 순간, 그 이름을 지워버리세요. 다만 지워진 이름의 흔적만 지니고 있다가, 당신이 찾는 것을 얻거든 그 흔적 위에 쌓여있을 먼지만 털어내면 됩니다.

아베스라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길을 의식한 여자 아레주가 고개를 돌려 아베스라를 바라보았다. 미명의 희붐한 빛이 동쪽으로부터 그녀의 얼굴에 가닿았다. 운명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은은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아베스라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둘러 작별의 예를 표시해야 했다. 아베스라의 심장 저 안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 전에 떠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것 같았다. 그녀가 돌아서려는 그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아베스라는 돌아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흔들렸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분명 그걸 알아챘을 그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레···주······'

그녀는 지워버리라 한 이름이 자꾸만 아베스라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하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빛

시들지 않는 불멸의 세계

열락의 길을 여는

천상의 음료여!

 

불을 지키는 사제들의 땅을 지나

올리브나무 그루터기로 남은 궁벽한 땅

무슨 인연이 있어 그대 사우마를 맞아들였는가

수행자의 감각 끝에서

표리의 세계를 맛보았는데

오호라!

영원의 세계는 찰나였고나

찰나였고나 탄식하는 사이

영원은 사라지고

다시 지리한 고행의 시간일러니

그러나, 보라!

이제 눈 뜨고 보면

가야 할 길이 보이는도다

그 열락의 순간을 기억하면

운무 가득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

문득 한 줄기 빛이 가리키는

길이 보이네

 

운명의 이름 아레주

그가 가리킨 것은 창공 높은 곳의

독수리

가라, 독수리를 잡아라

독수리의 그림자에 현혹되지 말고

독수리만 보라 하는구나!

그리하여

찰나에 보았던 그 경지

영겁에 붙들어 매어

온전히 신의 곁에 머물러라

그러나 수행자여!

그대가 영원을 가졌더라도

세상을 잊어선 안 되느니

세상은 영원을 떠받치는 곳

세상은 영원을 향해 무릎 꿇은 자들의

간절함이 서린 곳

수행자여!

그들 무릎 꿇은 자들의 두터운 발바닥

손바닥에 아프게 박혀있는 굳은살을

외면하지 말아다오

그들이 내뱉는 고통스런 신음에 새겨진

절망을 기억하여 다오

 

오! 운명의 이름이여!

궁극의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여

천지간의 유일자

그분을 찾아가는 길의 독려자

잊혀져 더욱 빛날 이름이여!

그대가 한 잔의 사우마에 희석해 준 것은

신의 세계에만 머무르지 말고

세상의 고통과 함께하라는 당부

찢긴 가슴들을 사랑하라는 명령

살아 제물이 되는 희생

수행자의 이름에 새겨진 희미한 낙인은

처절하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

또렷이 본래면목을 드러내는 법

광활한 사막에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며

저자의 혼란 속에 있을지라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

한처음 세상에 쏟으신 그분의 마음을

찾아 새기고

세상에 나와

찢긴 희생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리

아레주

아레주

그대 이름을 두고 맹세하노니

신이 보낸 사자여!

 

아베스라는 모래 한 줌으로 입술을 문지르려다 문득 아레주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심한 듯 서 있다가 돌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베스라는 순간 자신이 아직도 갇혀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만든 경계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관습과 관념에 묶인 초라한 의식의 일단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아레주의 모습에서 배광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와 어깨 위에서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들이 보였다. 아베스라는 돌아서 가는 그녀를 향해 삼배를 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바람에 날렸다. (계속)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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