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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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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posted Jul 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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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70

전설_다운로드.jpg

 

1

 

가을걷이도 끝나고 계절이 깊어져 어느덧 조석으로 찬바람이 살갗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산중에서 겨울을 나려면 이제부터 부지런히 땔감을 모아야 했다.

"뭣이여? 산이 왜 이런 겐가? 처삼촌 산소 벌초한 겨? 으째서 산이 이 모냥이 되아 부렀는가?"

앞서가던 중년의 나무꾼 하나가 산등성이를 넘자마자 펼쳐진 건넌 산의 광경에 기겁을 하며 탄식했다. 화전민이 산을 개간한 듯 나무들이 듬성듬성 넓게 베어져 있었고, 그는 처음 삭발한 중이 허전함을 못 이겨 자꾸 머리를 쓰다듬듯 눈으로 산을 쓸어보고 또 쓸어보고 있었다.

"으메! 환장해 부네잉. 웬 소리꾼 하나가 돌아댕기면서 산을 아조 조져놓는다더니 여기도 지나갔나 부네."

뒤따르던 나무꾼도 일망무제로 펼쳐진 허허로운 광경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소리꾼이?"

"그려, 그 빌어 처먹을 것이 소리 허기 전에 나무 한 그루씩 베어놓고 큰절을 허믄서 수련을 헌다는 둥만. 달포 전에 남원에 나갔다가 들은 얘긴 디, 그걸 눈앞에서 보네그려."

두 나무꾼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한동안 그렇게 서서, 나무하러 온 처지도 잊은 채 그 낯선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 소문 들었는가? 거 뭣이냐, 낭구 베어감서 수련을 했다는 그 소리꾼 야그 말여?"

"나두 귓구녕이 있응께 소문이야 들었지만서두, 그거이 사실일 거나? 그 사램이 지나간 디는 민둥산이 되아 부렀담서. 그리고 그렇게 수련을 해서 그런지 장작을 쌔리 패듯 소리를 헌담서."

"그랑게 말여. 원근에 소문이 자자헌디, 때 마참 교동 김초시 자당 회갑연에 그 사램을 불렀다니 좋은 귀경꺼리가 될 거고만잉."

"증말여? 거 잘 되아 부렀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다니 행운 천만일세."

 

풍문은 사실을 압도하는 법이다. 풍문의 말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임에도 잘 뭉쳐지고 부풀려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현란하여 눈 밝은 이가 아니고서는 현혹되기 일쑤이며, 때로는 누항의 일을 애호하는 식자에 의해 문자로 정착되면서 정설처럼 여겨지게 되기도 한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라는 별호로 불렸던 명창 주덕기(朱德基)는 한때 송흥록과 모흥갑의 수행 고수였다. 그런 그가 발심하여 소리꾼으로 입신하고자 홀연 산속으로 들어가 수련을 하였는데, 소리 연습을 하기 전에 나무 한 그루를 베어놓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지나간 산은 온통 민둥산이 되어버렸다는 구전 전승이 만들어졌다. 구전 전승은 전설의 형태를 띤다. 더구나 소리판에는 선배 명창의 더늠을 부르면서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는데, 개중에 입담 좋은 소리꾼은 선배의 일화를 그럴듯하게 전하므로 대중들에게 그의 전설은 확장되어 각인된다.

 

2

 

"이봐요. 당신 누군데 아침마다 여기다 차를 대어놓는 게요?"

재주가 메주라서 죽어라 연습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여기면서 벌목정정 주덕기를 롤모델로 삼은 한 아마추어 소리꾼이 아침마다 지양산 자락 한 귀퉁이에 무단으로 차를 대어놓고 소리 연습을 하는데, 웬 늙은이가 시비를 걸어왔다.

"뭣 하는 사람인데 사유지에 들어와 차를 대느냐 말이오?"

사내는 사유지라는 말에 이내 풀이 죽어 조심스레 사정을 한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임도가 아주 잘 닦여 있길래 시유지나 국유지인 줄 알았지 뭡니까. 사실은 제가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아, 그래두 그렇지 연습할 데가 없다고 사유지에 무단으로 들어온단 말이오? 그리구 요즘 산에서 소리 지르는 것도 불법이라는 거 몰라요?"

'불법? 이거 잘못 걸렸네.' 사내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그렇지만 소리 연습할만한 곳으로 이만한 곳도 없는데 어떻게든 사정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은 유료연습실에 가라고 야단이었지만,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버텨볼 심산이었다.

"아 그래서 차 안에서만 연습을 하죠. 저 아래 아파트단지까지 소리가 가진 않을 겁니다. 아침 두세 시간만 좀 양해를 해주시면···"

사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한 마디를 툭 던져놓고 숲길로 총총 사라져 갔다.

"에이!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게. 여기도 트럭이 자주 드나드니 그땐 길을 터줘야 할 거요."

 

겨울철엔 연습 도중에 일출을 맞게 된다. 비록 탁 트인 공간에서 보는 것도 아니요, 불규칙하게 솟아있는 아파트들의 레이아웃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일출은 뭔지 모르게 불순물을 다 태워내고 토해지는 용광로의 쇳물을 보고 있는 듯한 감흥이 있다. 산벚꽃이 필 무렵이면 갑자기 겨우내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타났는지 곤줄박이, 박새, 참새 등의 몸집이 작은 텃새들이 요란하다. 야생화한 고양이 한 녀석이 나비의 날갯짓이 만만해 보였는지 펄쩍 뛰어오르며 잡아보려 하는 그림도 등장한다.

늦은 봄에서 이른 여름으로 막 접어드는 때였을 것이다. 햇살은 새들의 정수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더욱 분주해졌다. 짝짓기와 동시에 산란과 부화를 위한 둥지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분주하다는 것은 더 열심히 날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비행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임도에서 살짝 비켜있는 공간에 주차를 하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다르게 꽤 많은 새들, 그리고 청설모에 들짐승으로 변해가고 있는 고양이까지 2008년식 고물 스포티지 주변으로 몰려드는 게 아닌가. 그저 무심하게 소리를 질러대던 사내는 갑자기 격한 탄식을 내뱉고야 만다.

'이거 뭐지? 미물들이 내 소리에 반응을 한다?'

사내는 금방 흥분을 하여 혹시 누군가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지나 않을까 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일이 있을 리 만무한 줄 알면서도 조금 서운한 마음이 비 내린 아침에 죽순이 돋아나듯 기어 올라왔다.

'야속한 일이다! 이 전설적인 장면을 증언해 줄 사람이 없다니!'

 

3

 

우리는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서 너무 멀어져 왔다. 문명이라는 예측 가능한 세월 앞에서 인간의 심리가 각박해져서 그렇다고 단정해 본다. 신화와 전설의 시대를 지나 인문의 시대를 달려온 인류의 문명은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어떤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공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식은 인간의 사유에도 영향을 미쳐서 '합리'라는 객관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제 비합리나 불합리는 미망 혹은 지양되어야 할 가치가 되어, 어떤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배제되거나 유보된다.

주덕기의 시대를 전설의 시대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이(理)와 기(氣)라는 공론(空論)을 놓고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맞서던 유가들의 해프닝 바깥에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일들로 분주했기 때문이다. 주덕기를 비롯한 소리꾼들과 그것의 주요 향유층이랄 수 있는 부류를 통틀어 방외자라 할 것인데, 이들에게는 여전히 리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상관없이 전설의 작동방식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양산을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소리 연습을 하는 21세기의 사내에게 전설의 작동을 바라는 일은 과학의 합리를 거스르는 것이기에 의심을 살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함부로 지껄였다가는 그동안 쌓아놓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허명조차 무너지게 될 게 뻔하다.

아! 야속한 일이다.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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