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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다큐이야기] 유성기업 이야기 4 - 한광호 열사에게

posted Dec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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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2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있었다.
전날 밤 여의도공원에 갔다. 여의도는 섬이다. 그 섬에서 있던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역시 세상과 격리돼 있었다. 3천여 명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그 수는 여의도공원 면적에 비하면 자못 적었다. 석 달간 한 번도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의 노동자들은 술을 물처럼 마셨다. 술을 마셔도 아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모처럼 넉넉한 안주를 먹으며 나는 꽃 선물을 받고는 얼마주고 샀냐고 물어봐서 분위기 망치는 마누라처럼 조합비를 걱정했다. 밤이 깊을수록 점점 차가워오는 날씨 속에 오들오들 떨면서 그들이 허허벌판 천막에서 어떻게 잘까 염려했다. 그리곤 다음 날 낮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건설노조와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고공농성 기사를 접하고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산지회 임원들은 서울에너지공사 목동 열병합 발전소 앞에 가 있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사전모임으로 도열해 있는 무리들 중 어렵지 않게 유성영동지회 깃발을 찾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11월 대낮인데도 두꺼운 파카를 입고 서 있었다. 언제 어떻게 노숙을 할지 모르는 태세가 읽혔다. 

 

 1_조정.jpg

유성기업 영동지회 깃발

 

 

시청 앞에 5만여 명이 모였다. 예전처럼 위압적인 경찰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3시부터 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과 전태일 열사 47주기 행사를 했다. 5시가 넘자 행진을 시작했다. 전 날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며 무리하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은 다리로 그 날 8km를 걸었다. 지난겨울 그랬던 것처럼.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소속도 조직도 없다. 그러나 내 곁에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있었다. 처음 만났던 8월 9일에서 석 달 만에 그들이 동지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시청에서 을지로를 지나 광화문으로 걷고 있자니 유성기업 아산지회 노조사무실에 걸려있던 전태일 열사의 유서가 떠올랐다. 죽음으로 지펴진 불꽃은 47년이 지나 횃불이 되었다. 나는 또 한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광호.

 

 

2.-전국노동자대회_조정.jpg

전국노동자대회

 

 

은행잎이 발밑에 수북이 깔리는 11월 15일 아침, 영동역에 내렸다. 
석호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그에게 행선지를 맡겼다. 그는 나를 하얀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달렸다. 그 차는 동생 광호 씨가 타던 차라고 했다. 트렁크에는 아직도 광호 씨가 쓰던 캠핑 용품이 들어있다고. 석호 씨는 고즈넉한 영동 시골길을 달렸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다니던 학교 자리와 살던 마을 청남리 마을회관을 스쳐 죽청교를 지났다. 길가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광호 씨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있던 장소였다.

 

 

3.한광호열사가-마지막에-있던-곳_수정본.jpg

한광호 열사가 마지막에 있던 곳

 

 

광호 씨가 7기 2년차와 8기 1년차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사는 노골적으로 탄압을 했다. 경고장, 징계, 폭행, 11건의 소송 등으로 정신건강이 악화되었고 2015년부터는 출근이 힘들었다. 3월 10일에는 야간근무 중 근태관련 징계위 개최 전 사실조사 출석 요구서를 받은 상태였다. 3월 15일에 여행을 갔나 싶었는데 그 동네를 빙빙 돌고 있었다. 블랙박스가 알려준 사실이었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야트막한 강은 어린 시절 광호 씨의 아버지를 삼킨 물이었다. 밤늦게 술에 취해 강을 건너다 실족한 아버지를 어린 석호 씨가 건져냈었다. 비포장도로에 택시를 불러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광호 씨를 유독 사랑했던 아버지였다. 그 강을 내려다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것일까? 강가 정자에서 목을 맨 광호 씨는 아버지가 계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2016년 3월 17일이었다. 한 달만 견뎠어도 4월 14일의 어용노조 설립무효 판결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형은 평소에 그렇게 사이가 좋았었는데 당시 노조 임원으로서 의견 대립을 할 수밖에 없던 걸 아직도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막걸리를 좋아했던 걸 미리 알았더라면 한 병 사가지고 가는 거였는데, 아쉬워하며 나는 그가 마지막 숨을 놓던 정자 기둥을 잡고 그를 추모했다.

 

 

4.-동생을-그리는-형_조정.jpg

동생을 그리는 형(국석호 씨)

 

 

영동지회 노조사무실에 가보았다. 노조원들이 아산과 대전으로 뿔뿔이 흩어져 텅 빈 사무실에서 CJB 테마스페셜 <7년, 유성기업의 눈물>을 보았다. 아주 잘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5_조정.jpg

유성기업 영동지회 노조사무실

 

 

하루 종일 너무 많이 울어 기운이 빠졌지만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남아있었다.
석호 씨와 광호 씨의 어머니 전인숙 여사. 차가운 날씨에도 요양사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탄 채 산책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석호 씨를 보자마자 울먹이셨다.
“아이고, 그동안 왜 안 왔어. 너마저 없으면 이 엄마는 어떡하라고…….”
일주일에 한 번은 방문을 하고 자주 전화해 드려도 어머니는 아들 걱정 뿐이셨다. 연락이 없으면 구속됐는 줄 아시는 거였다. 막내아들처럼 큰 아들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시는 일흔 여덟 살 어머니.
 

 

6.-한광호-열사의-형-국석호-씨와-어머니-전인숙-여사_조정.jpg

한광호 열사의 형과 어머니

 

 

그 시대 어머니들 인생은 모두 기구했던가. 어머니는 첫 남편의 폭력으로 두 딸을 두고 막내 석호 씨만 데리고 집을 나왔다. 재혼을 해 딸과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은 어느 밤 강에서 익사하고 딸은 스물두 살에 급성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부산 고아원에서 80명 원아들의 밥을 해주시며 아이들을 키워내셨다. 다시 고향인 영동으로 돌아와 두 아들이 취직하고 이제 겨우 살만했는데 속절없이 광호 씨가 그리 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어머니가 의지할 자식은 석호 씨뿐이었다.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에게 나는 광호 씨에 대한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냥 손만 잡아드렸다. 그리고 헤어질 때 안아드렸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러셨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예쁜 게 꼭 우리 딸 같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의 딸이 될 수 있을까, 이 땅의 모든 가슴 무너진 어머니들의 딸이 될 수 있을까.
 

 

7-1조정.jpg

한광호 열사의 어머니 전인숙 여사(78세)

 

 

엿새 전이었던 11월 9일 오후 3시, 남부지방법원 308호 법정에서 노조파괴불법브로커 창조컨설팅 대표 심종두와 전무 김주목의 노조법위반에 대한 형사재판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묵묵히 그들을 얼굴을 보아주는 일뿐이었다. 2011년 5월, 현대차 구매관리본부장의 차 안에서 발견된 창조컨설팅이 만든 ‘회사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관계 안정화 컨설팅 제안서’에는 직장폐쇄, 용역투입 등 현대차의 유성기업 노조파괴 사전 개입 정황이 들어있었다.
그들과 맞선 7년의 강단 있는 투쟁, 그 이면에 유성기업 조합원들 43% 이상이 우울증 등 정신질환 고위험군으로 밝혀졌다. 그들 중 자살미수에 그친 사람들도 꽤 많다. 직장 스트레스로 인해 가정폭력을 행하는 이들도 생겼다. 광호 씨처럼 괴롭힘을 당하고, 징계를 받고, 고소·고발을 당한 동료들은 정신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부는 작년 7월 29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정신질환에 대한 임시건강명령을 내렸지만 회사 측에선 이행하지 않고 있다. 현재 사측이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고소고발을 해 놓은 사건이 총 1,080여 건이라고 한다. 제2, 제3의 한광호가 나오지 말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작년 10월 13일,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한광호 열사의 죽음에 대하여 업무상질병으로 인정을 했다. 그런데 회사 측은 이에 대해 산재 및 유족급여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재판을 하고 있다. 평균 임금도 아니고 온갖 징계로 채 100만 원도 안 되는 마지막 급여의 석 달간 평균액수로 책정한 그 알량한 돈, 아들 잃고 홀로 사시는 어머니의 생활비마저 안 주겠다고 치사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광호 씨가 탔던, 그리고 지금은 그 형이 타고 있는 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하는데 자꾸만 몸과 정신이 까무룩 까무룩 가라앉았다.
“광호 씨가 다 알고 있겠죠?”
그런 허하디 허한 말이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 입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한광호는 내 둘째 동생과 동갑이다. 나는 어쩐지 우리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운명론에 사로잡힌다. 지난 겨울 청와대 앞에서 만난 한광호는 결국 나를 양재동으로, 천안으로, 아산으로, 영동으로 이끌었다.   

 

오후 네 시는 내 인생과 같다. 여름엔 아직 낮이 길게 남았고 겨울엔 곧 저녁이 들이닥칠 시각. 한국에선 마지막 햇살이 기우는 때지만 유럽에선 시에스타(낮잠)를 마치고 다시 활기를 찾을 때.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발톱이 빠지고 인대가 상하도록 걷고 뛰어다니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좇아다니는 곳엔 늘 죽음이 있었다. 세월호가 있었고 원전 피해자들이 있었고 한광호 열사가 있었다.  
지난 11월 8일 오후 네 시의 가을 햇살은 고속버스 창을 통해 들어와 따뜻하게 얼굴을 감쌌다. 내 자리는 17번이었고 변호사들은 뒷자리 어디쯤에 앉았다.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따로, 각자의 역할로 같은 사람들을 대하며 존재했다. 지난 4~5개월 동안 나는 좋아서 그들에게 갔다. 그들이 내게 자기 이야기들을 해 줘서,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어서 좋았다. 인생이란 어차피 이야기다. 소설 같은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나는 쓸 뿐이다. 이 글이 무얼 어떻게 해 줄 힘은 없다. 나는 그들에게 밀린 임금을 받아 줄 수도 없고 그들을 당장에 그토록 그리는 자신들의 기계 앞으로 데려다 줄 수도 없다. 게다가 나는 다음 달이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한광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한 마디씩 하게 해 주고 싶다. 육신을 벗어난 그의 영혼이 우주 어디에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아직도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다독여 주고 싶다. 잘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이, 이 누나가 줄 수 있는 마지막 꽃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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