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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12 최종회 - 진도 팽목항과 하죽도

posted May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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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일곱째별
발행호수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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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뜬별 | 남도 순례길 12 최종회 – 진도 팽목항과 하죽도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2017년 2월,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 후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았다. 

이후 산티아고 순례를 했다. 

9월, <길목인> 창간에 편집위원으로 함께했다. 

2018년 6월,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를 시작했고, 11월에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8월,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가 해산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여름과 겨울이 손짓을 할 때면 이번 순례길은 어디일까 하며 톰으로부터 올 소식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순례단원들과 다음 순례 때 만나자는 약속도 할 수 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터덜터덜 걸으며 나는 다짐했다. 톰이 없어도 순례할 것이다. 순례단이 없어도 걸을 것이다. 비록 성스러운 숙소를 제공해 주던 성당을 비롯한 종교기관, 반기며 밥을 사주던 지역 활동가들은 없겠지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침묵으로 걸으리라. 몸자보 달고 지하철 타면 시비 걸어오는 노인이 있는 서울, 부실공사를 알리느라 단식하는 제보자가 있는 신고리 5·6호기 건설현장, 공극이 계속 발견돼도 멈출 생각을 안 하는 영광 한빛 핵발전소, 고준위 핵폐기물이 넘쳐나는 경주 월성 중수로 핵발전소, 그리고 울진 한울 핵발전소……. 나는 이미 순례자가 되었고 내 걸음도 톰처럼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20년부터 세 번의 순례로 7번 국도를 걸었다. 탈핵 벗들이 함께해 주었다.

2021년 4월, 세월호 참사 7주기 추모 도보 순례로 팽목항부터 진도를 종단했다. 18번 국도였다. 그때까지 내가 쓰던 글은 <탈핵 이야기>였다. 

6월부터 혼자 18번 국도를 걸었다. 그때부터 이 글은 <길뜬별>이 되었다. 

연내에 18번 국도 도보 순례를 완주했다.

2022년 1월, 하동부터 고리 핵발전소까지 걸었다. 

지난해 4.16 추모 도보 순례를 제안했던 니키가 올해는 4.3 항쟁을 추모하자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무언가를 하기로 한 건 내게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탈핵 벗 총 다섯 중 제주 4.3항쟁 추모 도보 순례가 최종적으로 가능한 사람은 나와 니키 둘뿐이었다.

3월 말 ‘봄바람 순례단’과 연대한 사흘을 하루 만에 기록해야 했다. 

4월 첫날 오전까지 원고 마감을 하자마자, 해남에서 진도 우수영여객터미널로 가서 주차했다. 

14:30, 10kg이 넘는 무거운 배낭 메고 텐트를 들고 퀸스타 2호를 탔다. 

 

다음 날 니키가 제주도로 오셨다. 이틀 후 니키는 서울로 가셨다. 

제주에서의 보름간을 지금은 쓸 수 없다. 

다만 2년 전 제주 제2공항 건설 반대 투쟁 때 함께했던 두 사람에게 주려고 제주에서 돌아오자마자 만들어서 간직하고 있던 선물을 끝내 전해주지 못했다. 걷고 쓰는 게 생활의 전부였던 내게 걸을 수도 쓸 수도 없던 제주의 시간은 처참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4월 15일. 오전 7:06에 장문의 문자가 왔다. 

 

‘04월 15일 (금) 제주-추자-우수영 구간 운항 예정이던 퀸스타 2호는 금일 해상의 풍랑 주의보로 인하여 결항되었습니다.’

 

악몽같던 나날 끝 절망의 종지부였다. 하지만 나는 제주공항으로 갔다. 

버너용 부탄가스를 버려야 했고, 따로 산 텐트 팩들은 수하물로 부쳐야 했다. 

09:30 출발 예정이었던 배보다 더 빠른 09:10 광주행 비행기를 아슬아슬하게 탔다. 

결항인 배와 달리 비행기는 이륙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탄소 절감 비행기였다. 

10:05, 광주공항은 처음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화정역에서 버스를 타고 유스퀘어 터미널로 갔다.

해남, 남창, 우수영 중 제일 빨리 출발하는 버스를 5분 전에 탔다. 

11:05 우수영 행이었다. 

 

두 시간 후 우수영 터미널에 내리자 지난 10월에 보았던 우수영 성당이 길 건너에 있었다.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십자가와 성모상과 예수상이 검붉은 천으로 가려 있었다. 

신은 이제 내게서 얼굴을 감춘 것인가. 

피폐한 나는 지난번과 반대의 기도를 했다. 그 두 기도가 하나로 만나기를.

 

우수영여객터미널까지 걸었다. 

보름 만에 만난 내 차 탈핵브리드는 무사히 그대로였다. 절친한 친구를 만난 듯 어찌나 반갑고 든든한지 몰랐다. 뭍으로 나왔고 차도 찾았으니 못 갈 데가 없었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기다려준 탈핵브리드에게 휘발유를 넣어 주고 구석구석 세차도 해 주고 팽목항으로 향했다. 

 

팽목항 빨간 등대에는 지난해 걸어두고 온 소중한 표식이 일 년 동안의 강한 햇빛과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굳건히 매달려 있었다. 

 

 

DSC05394잊지-않겠습니다_resize.jpg

잊지 않겠습니다

 

 

☆ 2022년 4월 15일 금 오후 3시 <2022 세월호 참사 제8주기 기억문화제> 

팽목항 빨간 등대 앞에는 예술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현대무용과 한국무용과 사물놀이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했다. 거센 바람 속 맨발 춤사위는 ‘그 아픔이 너무 깊어’라는 제목처럼 처연했다. 빨간 등대 앞 공연은 조촐하게 끝났다. 

 

 

DSC05325그-아픔이-너무-깊어_resize.jpg

그 아픔이 너무 깊어

 

 

공연이 끝난 후, 노중년 남자분이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내 카메라 가방에 달린 몸자보를 보고 다가오신 그분은 2015년에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를 하셨다고 했다. 고창에 사시는 그분은 세월호 참사가 나고는 팽목항에서 몇 달간 사셨고, 해마다 참사 때면 그곳에 오신다고 했다. 

그분이 내게 물으셨다. 

“탈핵과 세월호가 무슨 관련이 있나요?”

작년에 내가 관지와 청명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질문을 주로 하는 나는 답변을 준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고 답이 나왔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일이니까요.”

 

저만치 청명과 대전 및 지리산 친구들이 왔다. 

우리는 세찬 바람을 피해 빨간 등대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문>을 함께 낭독했다. 

 

세월호, 시간은 여전히 4월 16일입니다. 

세월호, 당신들은 ‘오직 생명’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간절히 기원합니다.

가리워진 진실이 환하게 드러나서 가신 이는 한을 풀고 편히 쉬기를!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빠진 유가족들이 몸과 마음 치유되고 일상이 회복되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바람이 멎은 듯 기도문 외에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았다. 

 

이틀 후 하죽도에 함께 가기로 했던 청명은 날씨 때문에 섬에서 원하는 때 못 나올까 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청명과 친구들과 기억의 숲에 들러 진도 휴양림에서 저녁밥을 먹고 산책 후 헤어졌다. 

어두운 밤길을 두 시간 달려, 맡겨둔 김치와 동백을 찾으러 해남으로 갔다. 

 

 

☆ 4월 16일 토 오후 3시 <세월호 참사 8주기 기억식> 

작년 가을에 해남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한 내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초대손님으로 온 정미이모와 나와 함께하자고 나무가 제안한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제주에서 기를 쓰고 탈출했으며, 전날부터 진도와 해남을 오고 갔다. 그러나 팽목항 세월호 참사 8주기 기억식에서 준비한 것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침묵하라.’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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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철거할 수 있는가

 

 

정미이모는 어머니와 먼저 떠났고, 나무도 화야와 돌아갔고, 나만 혼자 덩그러니 팽목항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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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갈 수 없다면

 

 

☆ 4월 17일 일 부활절 <하죽도 은혜교회>  

필사적으로 섬을 빠져나왔는데 다시 섬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이번엔 비행장도 없어 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오지 섬으로. 

게다가 제주에서 그토록 쓰고 싶었던 글을 쓸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나 약속했으니 가야 했다. 

 

09:50 한림페리11호에 오른 나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 같았다. 

사람 가득 찬 선실엔 들어갈 수 없어 선실 옆 바깥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바닷바람을 얼굴에 맞았다. 배는 진도 앞바다 섬들 사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무인도에도 화사한 분홍과 연둣빛 물이 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무인도에서 혼자 살 수 있겠냐고 물었었다. 

나는 누군가 매달 나를 찾아와 준다고 약속해 주면 있을 수 있다고 했었다. 

어찌 나는 약속이 반드시 지켜진다고 생각했을까. 풍랑이 일면 섬에는 배가 닿을 수 없는데. 

 

눈물이 흘러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배는 조도에서 멈췄다. 조도에서 내려 30분 정도 다음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진 좀 찍어도 돼요?”

내 배낭 뒤에 ‘핵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 몸자보를 말하는 거였다. 허락했다. 

“대단하시네요.”라며 사진 찍는 여자분 옆에 있던 남자분이 내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하죽도에 탈핵 벗이 전도사님으로 계셔서요.”

“아~ 그럼 그렇지. 이 근처에 무슨 핵발전소가 있다고.”

그랬다. 나는 니느웨를 피해 다니는 요나였다. 

 

섬사랑 2호를 탔다. 

선실에 아무도 없어서 들어가 앉아 눈을 감았다. 

나 한 명을 실어 나르기 위해 배에 사용되는 연료에 마음이 불편했다. 

 

죽도가 보였다. 

손바닥 두 개를 펼쳐 마주 보게 눕히면 가려질 만한 두 섬, 상죽도와 하죽도를 다리로 연결한 섬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섬에 거대한 송전탑이 세 개나 됐다. 산등성이로는 아프리카 바오밥 나무처럼 고사목이 시커멓게 삐죽삐죽 서 있었다. 

‘왜 이런 섬이 관지에겐 한눈에 마음에 들었을까?’ 

 

 

DSC01777-(2)진도군-조도면-하죽도_resize.jpg

진도군 조도면 상하죽도

 

 

“저기 나오시네.”

선원의 말에 부두를 유심히 보니 저 멀리 관지가 바퀴 구르듯 내리막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제야 섬에 생기가 돌았다. 배낭이 무거운 데다 생수를 챙겨야 해서 잡곡과 과일, 과자를 조금씩밖에 못 넣었는데도 봉투가 찢어졌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배에서 내려 달려온 관지를 안았다. 물 자국이 찍힌 앞치마를 덧입은 관지는 근엄한 전도사님이 아닌 호호아줌마 같았다. 

 

관지의 집은 하죽도 맨 위 은혜교회 바로 아래, 파란 지붕에 초록색 창틀이 있는 베이지색 사택으로, 마을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 방 두 칸에 주방과 욕실과 거실이 있어 꽤 넓었다. 

“이걸 신고 왔어?”

현관에 벗어놓은 내 털 고무신을 보고 관지가 물었다. 등산화가 아니었으니 난 하죽도에서 걸을 생각이 없었던 거였다. 게다가 털 고무신은 계절에도 맞지 않았다.

창가 옆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었고, 제주에서 내내 입어 벌써 보풀이 많이 인 회색 집업 수트에, 보라색 바람막이에, 회색 누비 점퍼에, 딱 붙는 등산바지 대신 단지 편한 옷을 입고 싶단 이유로 입은 벽돌색 펑퍼짐한 바지. 아래위 색깔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종일 기분이 안 좋은 내가 이 무슨 몰골이란 말인가. 

“아유~ 이 머리를 누가 청담동에서 잘랐는지 알겠어. 흰 머리가 많이도 났네.”

나도 모르게 한탄이 나왔다. 

 

창가에는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키 작은 노란 꽃이 작은 화병에 꽂혀 있었다. 역시 관지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입에선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이 테이블보 일부러 뒤집어 놓으신 거예요?”

올리브 그린 모직 쇼올의 자수가 반대쪽이었다. 관지는 별 상관 안 한다고 하셨다. 

 

 

DSC01782손님을-위한-차림_resize.jpg

손님을 위한 차림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그리고 교회 명예권사 취임식이 있어 주민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관지는 부랴부랴 섬마을 사람들이 해 주신 잡채랑 고사리, 취나물이랑 밥을 차려주시곤 다시 주민들에게로 가셨다. 배고팠던 나는 밥과 반찬을 싹 비웠다. 그리고 혼자 미니 마일드 로스트 아메리카노에 우유를 타서 마셨다. 

 

“왜 그쪽에 앉아 있어?”

한참 만에 돌아오신 관지가 바다가 보이는 정면이 아닌 벽 쪽으로 앉아 집 앞 대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물었다. 

“송전탑이 보여서 불편해서요.”

거대한 송전탑에 전선은 고작 두 가닥과 한 가닥. 맞은편 서거차도에 멈춰 서있는 풍력 발전기. 자연이 아닌 것들이 눈을 피로하게 한다. 관지는 나더러 예민하다고 했다. 그리곤 잠시 대화 후 물었다.

 

“탈핵이 너를 행복하게 하니?”

 

탈핵한다고 전국을 걷는 내게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탈핵이 너랑 맞냐고? 그냥 청담동으로 가. 너는 자본의 맛도 아니까 그냥 돈을 벌어서 좋은 데 쓰면 되잖아. 네가 원하는 공모전 상금 같은 건 탈핵 정신이 아니야.”

 

원고료 없는 글을 5년째 쓰면서, 그저 편안히 앉아서 상상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걷고 기면서 매달 단편소설 분량의 원고를 두 편씩 뽑아내 무료배포하면서, 겨우 남은 미공개 이야기를 빡빡 긁어내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인 공모전을 바라보는 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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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

 

 

오후 여섯 시. 저녁 예배 시각이었다. 

관지는 하죽도에 있는 하나뿐인 교회의 유일한 목회자시다. 

하죽도에 있는 교회에 무보수 전도사로 가리라 결정하신 후, 제일 처음으로 해남에 있는 내게 찾아와 알리셨다. 그날 나는 우리나라 최남단 땅끝까지 걸어갔다 왔었다. 그때 나도 관지처럼 세상 기득권을 버리고 좁은 길을 가리라 다시금 결심했었다. 

 

그리고 신년 도보 순례를 하죽도에서 시작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도민들 불안하실까 봐 취소했었다. 그때 못 온 하죽도를 세월호 참사 8주기 진도 팽목항 오는 길에 들른 것이었다. 

 

26년 된 교회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 현판도 바꾸지 않았다. 감사헌금을 하려고 봉투를 찾았는데 오래된 십일조, 추수감사헌금 봉투뿐이었다. 몇 장 없는 하얀 봉투에다 휴대전화기에 삼등분 해 끼워 넣은 비상금을 펴서 넣었다. 재활용을 위해 이름은 쓰지 않았다. 

 

교인은 단 두 명. 팔십 대 부부셨다. 도민들 전체 네 가구 총 여섯 분 중 두 분만 교회에 나오신다. 그 두 분이 이 교회를 건축할 때부터 지금까지 섬기셨다고 한다. 야생화로 꽃꽂이를 한 수반이 양쪽 두 개나 되었는데 조화와 균형이 완벽했다. 여자 권사님 솜씨였다. 부부는 목회자 없던 교회에 전도사님이 오신다고 사택에 텔레비전, 전기밥솥, 세탁기를 들여놓으셨다. 그리고 무보수인 줄 알고 오신 전도사님에게 생활비를 모아 사례비로 드린다. 관지는 그 돈의 절반가량을 다시 교회로 내어놓으신다. 

 

예배 후 그날 명예권사님으로 추대된 부부를 소형카메라로 사진 찍어 드렸다. 교인들이 갓 쉰 살만 되면 단체로 권사 임직식을 하며 기백만 원씩 약정헌금을 받아 교회 건축을 하는 도시교회에선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교회를 짓고 평생을 집사로 살며 교역자 떠난 빈 교회를 지키다 여든 살이 넘어 받는 권사직. 그보다 더 명예로운 권사가 있을까. 낮 대예배 임직식에는 믿지 않는 도민들 전원인 네 분이 교회로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고 했다. 

관지가 그러셨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어울려 사는 교회,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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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그리고 교회

 

 

저녁 식사를 하고 관지와 함께 산책을 했다. 

상죽도에는 대나무가 없었다. 그리고 주민도 없었다. 상죽도가 하죽도보다 잘살아서 다리로 연결할 때 반대했었다는데, 그 잘살던 상죽도 사람들은 모두 그 섬을 빠져나가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 섬 바닷가 자갈밭에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관지는 그 자갈밭에서 하트 모양의 돌을 주워다 거실 책장에 진열해 놓으셨다. 언젠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마음 아픈 일이 있었을 때 바닷가에서 하트 모양의 돌멩이를 보고는 하느님 사랑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상죽도 제일 높은 지대에 남향집이 한 채 있었다. 돌담이 차곡차곡 쌓이고 마당에 정갈한 텃밭이 있는 일자형 집이었다. 툇마루에 앉아보니 적당한 거리에 맞은편 산이 보였다. 송전탑도 보이지 않아 눈이 편안했다. 

집 뒤로 난 길을 따라 동백나무와 진달래와 산벚꽃 사이로 들어갔다. 여태 본 동백 중 가장 고혹적인 동백꽃을 보았다. 털 고무신을 신고도 잘만 걸었다. 숲길을 꼬불꼬불 한참 내려가니 암벽이 나왔다. 벼랑 끝까지 가서 서 보았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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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지만 죽진 않아

 

 

☆ 4월 18일 월 부활절 다음 날 <하죽도>  

새벽 다섯 시, 새벽기도 시각이었다. 

목회자가 없던 기간에도 교인 부부는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셨단다. 

지금은 새벽 네 시부터 교회에 불이 켜있다. 관지가 한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관지는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섬에서 뱀을 보았고 두려움을 떨치려고 그 뱀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그 길을 다시 가셨다고. 

섬에서 빠져나와 다시 섬으로 들어오는 게 그토록 두려웠던 나는 기왕에 들어오는 것 두려움을 마주할 생각은 못 하고 왜 억지로 끌려오듯 마지못해 들어왔을까? 

 

새벽 기도 후 여섯 시 반부터 조반을 먹었다. 

숨이 만든 유기농 식빵 버터구이와 감자와 달걀을 으깨고, 채 썬 사과, 말린 방울토마토를 마요네즈에 버무린 매쉬드 포테이토와 내 마지막 원두 드립커피. 훌륭한 조식이었다. 

 

대화하던 중 관지가 자꾸 조끼 입고 월성핵발전소 인접지역 이주대책위 연대시위를 하지 않느냐고 재촉하셨다. 나는 다들 약속을 쉽게 안 지키는데 왜 나만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팽목항 약속도, 하죽도 행 약속도 다 깨졌는데 나도 한번 약속을 안 지켜보고 싶다고. 

 

매주 월요일 오전 8:20~40 월성핵발전소 인접지역 이주대책위 상여시위와 함께하자는 약속은 작년 6월 말, 남원 청명네에서 넷이 한 것이었다. 그중 셋만 열심히 지키고 있다. 하지만 청명이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연대시키는 바람에 인원이 늘고 있다. 한참 후에 알았는데 니키와 나 외 다른 사람들은 월요일 그 시간대가 아니라 다른 날 연대 사진을 찍어서 미리 준다고 했다. 청명은 연대가 목적이므로 시간은 상관없이 참여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요일 그 시간대에 니키와 나와 함께 순례했다. 해남에서 내가 조끼를 건네드린 관지는 한 번 이외에 도통 참여를 안 하시더니 내가 왔으니 같이 걸어주시겠다고 했다. 

 

억지로 조끼를 입고 나갔다. 상죽도 남향집으로 가다가 내가 폐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관지 블로그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하죽도 모습이었다. 

다리까지 가다 돌아서 가는 길에 찌그러진 하트 돌멩이가 눈에 띄었다. 

“어머, 얘도 하트네.”

그리곤 주웠다.

 

2004년에 폐교된 학교는 사진에서 보았을 때 느꼈듯이 공방으로 쓰고 싶은 곳이었다. 

관지는 그곳을 뭔가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예술가들이 와서 작업할 수 있는 작업실로, 또는 일 년에 일주일 정도 우리 친구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나누는 그런 공간으로.

 

 

DSC01822무엇이-될꼬-하니_resize.jpg

무엇이 될꼬 하니

 

 

그 섬에 들어갈 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점심 식사 후 한참을 대화했다. 관지는 그렇게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좋다고 하셨다. 

 

“나갈 생각이 없으면 이 섬은 천국이겠네요.”

“응, 나갈 생각 없어.”

“나갈 생각 없고, 기다리는 사람 없으면……”

 

잠시 대화를 멈춘 내가 창가 테이블에서 앉아 있는 모습을 관지가 휴대전화기로 사진 찍어서 보내 주셨다. 내 좋은 모습을 좀 보라고. 늘 바라던, 창가에서 글을 읽거나 쓰는 모습이었다. 관지는 지난해 진도에서도 내게 공주처럼 사랑받고 살아야 마땅한 애가 왜 이러고 사냐고 안타까워하셨다.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관지가 내게 색연필을 주셨다. 

영국제 24색에서 멕시코제 48색을 새로 마련해 쓰는 내게 관지는 오스트리아제 색연필 몇 개와 만화원고용지를 주며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테이블 위에 있는 노란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꽃이 뭐예요?”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쑥갓꽃.”

쑥갓은 사람에게 잎도 먹여주고 그렇게 예쁜 꽃도 피워주었다. 그 꽃은 관지가 나를 위해 꽂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테이블도 나를 위해 일부러 창가로 옮겨 놓았다고 했다. 그저 관지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었다. 모두 나를 위해서 준비하신 거였다. 

“아니 얘가 보통 때 같으면 오자마자, ‘어머~ 꽃이 이렇게 이뻐?’ 했을 텐데…….”

아름답고 예쁜 것에 화들짝 반색하던 나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이 자꾸만 지난날을 추억하며 서글퍼하고 있었다. 관지는 내 이야기의 3할이 나이고 7할은 남이라고 하셨다. 자기 이야기를 좀 하라고. 자기 안의 소리를 좀 들으라고.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산책을 나섰다. 

다시 상죽도의 맨 위 남향집에 가보았다. 담장이 예뻤다. 그 돌담 위에 아침에 길에서 주운 찌그러진 하트모양 돌멩이를 올려놓았다. 

‘다시 올 때까지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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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놓인 사랑

 

 

상하죽도 갯바위에 멀찍이 각각 한 분씩 두 분이 교집합 모양으로 허리를 구부린 채 무언가를 채취하고 계셨다. 60대 중반인 관지가 그 섬에서 제일 젊다. 그런데도 나머지 여섯 분은 배를 타거나 밭을 일구거나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쉬지 않고 노동을 하셨다. 

 

첫날 상죽도 끝을 보았으니 하죽도 끝을 보고 싶었다. 

좁은 마을이었지만 한 번 길을 헤매고는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섰다. 아담한 나무가 숲을 이룬 아름다운 길이었다. 바닥에 난 숲길을 따라 걸었다. 갈림길에서는 사람이 조금 더 많이 다닌 길을 택했다. 그런데 가다가 바닥에 떨어져 죽은 작고 예쁜 산새를 보았다. 순간 죽은 산새가 내 모습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밟히지 않게 길옆으로 밀어서 묻어주려고 했다. 새를 들려고 주운 나뭇가지는 썩었는지 툭 꺾였다. 묻어주기를 포기했다. 

‘밟히는 것도 자연이야.’ 

 

바다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깨달았다. 

관지는 지금 현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계속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과거에 가 있는. 그때 곁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소외되고 슬픈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였다. 

 

바다가 나타났다. 켜켜이 퇴적된 암석들 위에 앉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통은 마지막 지점이라고 하는 산티아고 성당을 지나, 세계의 땅끝이라는 피니스테레에 갔다가, 거기서 버스를 타고 묵시아까지 갔었다. 아무도 없는 바위산을 가시에 찔리며 기어올라 앉아 있었던, 그곳이 가장 좋았었다. 대한민국의 하죽도 끝은 스페인의 묵시아와 닮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몰을 보았다. 그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순례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비움의 끝과 같은 정적. 

 

그날 밤, 관지와 심각한 대화를 했다.

지난해 4월, 세월호 7주기 추모 도보 순례를 하려고 진도에 갔을 때 관지는 내가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 같다고 했었다. 부자 아버지를 떠나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둘째 아들. 그런데 일 년 후, 나는 창기와 가산을 탕진하고 남의 집에서 돼지 쥐엄 열매도 못 먹던 둘째 아들보다 더한 귀신 들린 자였다. 혼자 먼 길을 걸을수록 생명이 솟아 나오는 게 아니라 온갖 상념에 빠져 생각이 흔드는 대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독처하는 자는 쉽게 위험에 노출된다. 그래서 성경에 누누이 나왔다. 독처하지 말라고. 

 

“그만 걸어.”

관지가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제주에서 빠져나올 때 느끼고 있었다. 그만 걸어야 할 때라고. 

내 걸음에 더는 생명도 평화도 자유도 없었다. 

 

반면 관지는 왕후의 모습이었다. 하죽도의 모든 사람들이 관지를 대접해 주었다. 나는 관지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고 실내 꾸미기도 잘하는지 알고 있다. 봄이면 쑥과 꽃망울을 뜯어 덖어서 차를 만들고 싶어 근질근질한지도 안다. 수십 년 된 교회를 그 모습 그대로 두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관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참는다. 도민들의 섬기는 기쁨을 위해. 교인들이 지어놓은 교회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대신 관지는 새벽마다 깜깜한 교회에서 부부 둘이 드리던 예배에 한 시간 일찍 가서 불을 밝히고 기다린다. 그들을 위해 성경 말씀을 가르쳐주고 그들과 그들 가족과 나라와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 온종일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 준비를 위해 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 모습은 이전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도 하지 않았었다. 정말 이상했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대했었다. 집안 살림을 못 하는 내가 할 일은 운전이나 현장 취재와 글 쓰는 일뿐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밤낮이 바뀌도록 글만 써도 당당했었다. 글 쓰는 시간 이외에는 산책을 했고 가끔 예쁜 옷을 차려입고 멋지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정직한 노동으로 자급하며 독립하겠다고 집을 나와, 남의 집 일을 하고, 길을 찾겠다고 걸으면서 점점 내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비움 실천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했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점차 알게 되었다. 작가인데 요양보호사 일을 한다고 하면 낮은 삶을 산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나이 먹고 능력 없는 자로 취급했다. 내 거처를 염려하며 소개해 준 자리들은 나와 영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로 상처받지 않는다. 친절은 받고 나 역시 사람들의 안목을 분별할 기회도 얻은 셈이니까. 잘 차려입고 세단을 몰고 가는 나와 맨 얼굴에 걷고 낫질하는 나는 같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나를 평가했다. 

 

나는 자본의 가치로 산정할 수 없는 작가다. 내 안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 가득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게 다른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며 글을 쓰라고 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게 글쓰기이고 내 노동이 글쓰기인데 다른 일을 하라니. 의사한테 환자 병 고치지 말고, 교수한테 학생 가르치지 말고 다른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라고 하는가? 

그래도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다른 세상을 꿈꾸겠다며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쉬지 않고 걷고 썼다. 그러나 그것은 고행을 내세운 합리화였다. 물론 처음에는 순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탈핵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내 방랑을 미화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교회와 멀어졌고, 산티아고 순례 후 교회를 떠났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딸인 줄 알았다. 내가 무슨 방종을 저질러도 그분의 사랑은 날 떠나지 않는다고 자만했다. 그런데 하죽도에서 믿을 수 없이 추락한 내 실체를 목도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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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다 그대도 나도 

 

 

☆ 4월 19일 화 부활절 이틀 후 <하죽도>  

새벽 다섯 시. 성전에 올라갔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안나처럼 관지가 한 시간 전부터 앉아있었다. 

예배 후 기도시간이었다. 내 영혼은 절박했다. 나는 기도했다. 

 

“내 영혼아 잠잠하라!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 주여, 나를 도우소서!”

 

다시 우아하게 조반을 먹으며 관지가 말했다. 내 얼굴로 돌아왔다고. 기품 있는. 

 

“너는 내 이름을 세상에 꺼내게 해 준 사람이야.”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로 처음 만났던 2019년 2월 9일, 삼례 원불교 수계농원에서 내가 무슨 이름으로 부르면 되냐고 당돌하게 물었단다. 

관지(貫之). 

이전에 관지는 시 쓰는 전도사였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관지는 영혼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되었다. 

이후 1인 출판사를 차린 관지는 지난 시집을 재발간하며 내게 발문을 부탁하셨다. 청탁 마감일에 가까스로 발문을 보냈다. 여러 날이 지난 2020년 5월, 내가 집을 나와 처음으로 간 원주 토지문화관에 관지의 선물이 도착했다. 내 발문이 실린 관지의 첫 시집과 관지가 손수 덖은 쑥차와 레이스 달린 광목 잠옷 한 벌이었다. 

올해 초 유서를 새로 작성하면서 나는 그 잠옷을 수의로 입혀달라고 썼다. 

관지는 내가 자신의 장례식에 올 열 명 중 한 명에 해당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서로의 장례식에 가거나 그 사람의 선물을 수의로 입을 사이. 

 

관지가 주워놓은 하트 모양의 돌 중 하나를 기념품으로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도 제일 마음에 들어 한, 가장 작은 분홍색 돌을 쥐었다 놓는 게 보였다. 

“아니에요. 가는 데마다 돌멩이를 주워 온 적이 있었어요. 이젠 다 부질없어요.”

관지는 뭘 자꾸 주고 싶었는지 방에서 광목으로 만든 주머니를 하나 가지고 나오셨다. 

“다닐 때 속옷이나 뭐라도 넣어 가지고 다녀.”

관지가 꽃을 수놓은 그건 예뻐서 받았다. 잠옷과 세트였다. 

작년 진도에서 관지가 만들어서 주신 소창 소변 거즈와 얇은 목도리를 아직까지 잘 쓰고 있었다. 관지는 내게 필요할까 봐 일회용 양념류도 모아 놓았다고 하셨다. 모든 게 고마웠다. 

 

내가 떠나기 전, 관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느님은 순수한 사람을 좋아하셔. 여기 온 세 사람이 다 그랬어.”

내가 그 섬에 간 세 번째 손님이었다. 

 

작년 4월에 진도에서 관지가 물었다. 

“내년엔 누구랑 올까?”

“글쎄요?”

“혼자 왔으면 좋겠다.”

나는 관지가 원하던대로 다음 해 4월에 혼자 갔다. 

 

하죽도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관지가 일 년 전처럼 물었다. 

“다음에 언제 올 거야?”

그때는 ‘다음에도 올 거야?’였는데 이번엔 내가 다시 올 것이 좀 더 확실했다. 

“내일 일도 모르는데요.”

참으로 일관성 있게 답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제 다시 갈지. 그러나 그건 비밀이다. 정말 소중한 건 함부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섬사랑 2호에 올랐다. 

배가 뒤로 멀어지고 갑판이 올라갈 때까지 관지는 부두에 서 있었다. 갑판이 서로를 가리기 직전, 우리는 동시에 팔을 올려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배가 옆으로 방향을 틀어 배 사이 구멍으로 보이는 항구에도 관지는 그대로 서 있었다. 

겉보기만 그럴듯한 청주 교회에서 부당해고 당한 관지가 손주에게 온 신경을 쏟을 때 관지는 행복하셨다지만 나는 실망스러웠다. 편찮으신 할머니를 돌볼 때는 속상했다. 그런데 지금의 관지는 위로부터 오는 권위와 여유로움,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품격이 있었다. 관지는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관지는 그 섬에서 죽을 때까지 있고 싶다고 하셨다. 섬에 아무도 남지 않아도 혼자 교회를 지키며 살고 싶다고. 이 어두운 세상에 아직도 선지자가 남아있다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 관지가 내 탈핵 벗인 게 자랑스럽다. 우리는 길 위에서 만났다. 

 

 

DSC01861그-섬에-관지가-있다_resize.jpg

그 섬에 관지가 있다

 

 

진도에서 세 시간 배를 타고, 갈아타면 두 시간에 갈 수 있는 섬, 동거차도와 서거차도 사이에 숨어 관광 지도에도 없는 섬, 그 작은 섬에 쓸모없는 것 포함한 송전탑이 세 개나 박혀있는 섬, 상죽도와 하죽도가 다리로 연결돼 하죽도에만 일곱 명이 살고 있는 섬, 추레한 들고양이 서너 마리와 겁 많은 뱀 외에는 산짐승도 없는 섬, 동백꽃과 산벚꽃과 진달래가 동산 가득한 섬, 상죽도와 하죽도 끝에 아름다운 바위와 바다가 펼쳐진 곳, 그사이에 올망졸망 교회와 집들이 모여 있는 섬, 하죽도. 

하죽도는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섬이 아니다. 그곳에는 초대된 사람만이 갈 수 있다. 새벽마다 성전에서 등불을 밝히고 기도로 초청하는 사람. 낙심한 영혼, 그래서 새 힘을 얻고자 하는 영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4)

 

진도의 관지 집으로 돌아왔다. 

휴대전화기를 껐다. 관지가 싸준 삶은 달걀 세 알과 딱딱한 머핀 네 개 중 두 개로 끼니를 때우며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독했다. 집안에 시계가 없어, 해가 지고 뜨는 것으로 2박 3일이 지났음을 알았다.

여전히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제주에서 온 뒤 그토록 가기 싫었는데, 안 간다고나 못 간다고 하면 됐을 텐데, 왜 하죽도에 갔을까? 가면 정체가 드러날 게 뻔했을 텐데 왜? 

약속. 약속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쉽게도 안 지키는 약속을 나는 싫어도 지키려고 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나의 마지막 남은 도덕성. 그 이유가 떠오르자 무릎을 꿇고 울었다. 자유의지였다. 주님은 나를 강제로 움직이지 않으셨다. 내게는 걸을 자유와 멈출 자유와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다. 

 

 

☆ 4월 24일 부활 제2주일 ,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우수영 성당>

10시 정각, 우수영 성당에 도착했다. 세 번째였다.

일주일 전, 천에 싸여 가려져 있던 십자가상, 성모상, 예수님상 모두 벗겨져 있었다.

미사 시각은 11시였다.

마침내 미사를 시작했다.

스쳐 가는 신부님의 뒷모습에서 권위와 위엄이 넘쳐 흘렀다. 내 몸과 마음이 엄숙하게 반응했다. 황급히 주보를 찾아보았다.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께서 본당에 사목방문을 하셨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나는 이 용어들이 무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대주교님이 높은 분이고 매주 이 성당에 오는 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본문은 토마스의 이야기였다. 개신교에선 도마라고 한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6~29)

 

도마. 진해 주기철목사기념관에서 본 본문도 디두모라 하는 도마의 이야기였다. 도마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신다고 했을 때 저 혼자 나서서 “우리도 주(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던 제자다. 완전 행동파였다. 가슴이 움직이면 머리로 따지기 전에 발이 먼저 나가는 나랑 똑같다. 토마스, 도마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마가 특별히 믿음이 약한 제자는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을 만나서 손과 옆구리를 이미 보았다. 그런데 도마는 그때에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봤으니 믿은 거였다.

 

리얼리스트인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왔다. 스페인 산티아고부터 한국의 땅끝과 섬까지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런 나에게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시면서도, 내가 도마 같은 인간형임을 알게 해 주시는 말씀이었다. 

 

미사가 끝났다.

대주교님과 둘만의 찰나가 되었을 때, 나는 아주 짧게 세 문장을 말했다. 그런데 그분이 더 짧은 세 문장으로 말씀하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감사와 감동과 감복이 처절한 통곡으로 터져 나왔다.

 

*

 

그동안 <길목인>이 발행되면 읽어줄 만한 사람들에게 내 글을 링크해서 문자로 보냈다. 하도 민망한 일이라 최근에는 답글이 오는 사람에게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과도한 친절 내지 애걸은 없을 것이다. 2G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일 년 반, 오는 전화의 발신자를 주로 입력해서 100명 넘지 않게 관리했었다. 그 연락처를 모두 삭제했다. 앞으로 나를 찾는 사람들로 다시 휴대전화기를 채울 것이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마가복음 2:22 下)

 

이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새로 시작한다. 언제 다시 걸을지 모르겠다. 다시 걷는다면 그때는 더욱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을 것이다. 명분이 없어도 걸을 순 있겠지만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생명과 평화가 가득하고 자유가 넘칠 것이다. 사랑은 당연하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그 어느 것도 사진 찍거나 쓸 수 없는 사람이니까. 

 

길을 뜬 별은 혼자 빛을 낼 수 없다. 길에 뜬 가장 큰 별, 빛 자체이신 그분의 존재 없이는. 

 

지금까지 [길뜬별]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한다. 그리고 글에 사진을 편집해 완성해 주시고 시시때때로 하는 교정 요구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수정해 주신 권태훈 편집디자이너님께 고마운 진심을 전한다. 그동안 지면을 주신 <길목인>에도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함께 걸은 이들과 내 진정 사랑하는 탈핵 벗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대들 덕분에 내 삶이 변화했고 찬란히 빛났다. 손바닥 뒤집듯 한없이 가벼운 이 세상에서 그대들을 통해 대가 없이 타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았고 순수한 마음에 순간순간 감동하고 많이 배웠다. ‘탈핵’을 통해 ‘벗’을 만났음에 깊이 감사한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때에는 순전하고 영예롭게 서리라. 

안녕, 벗들이여. 안녕,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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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꽃말,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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